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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8. (217/228)

외전 8.

“고개 드세요. 전 괜찮으니까요.”

“…….”

박윤성은 여전히 굳은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제법 심각했다. 아무래도 철통 보안을 자랑했던 곳이 뚫려서 그도 꽤 놀란 모양이었다.

“습격자의 정체는 밝혀졌습니까?”

“죄송합니다.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짐작 가는 곳은 있습니다.”

“그래요?”

나는 놀란 눈으로 박윤성을 보며 되물었다. 라우페이 길드 말고 나를 아직도 노리는 곳이 있다니. 게다가 라우페이 길드도 숙소에 쳐들어올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러고 보니, 라우페이 길드는 내 레벨 업이 목표라서 습격도 시늉만 했었지. 물론 그 시늉이 장난 아니긴 했지만.

아무튼 그동안 라우페이 길드가 완장 차고 나를 노린 덕분에 다른 자잘한 곳에서는 수작질을 덜 부렸는데, 이제 방파제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건지 대놓고 나를 노리는 것 같았다. 게다가 라우페이 길드보다 더 대담한 방식으로 말이다.

“거기가 어딘가요?”

“음…….”

박윤성은 대답을 꺼리면서 주변을 흘끗 쳐다봤다. 이런 곳에서 대놓고 말하기 어려운 건가? 나는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아이들을 잠시 병실에서 내보냈다. 그러자 넓은 VIP 병실 안에 박윤성과 나 둘만 남았다.

“라우페이가 국내에서 가장 큰 빌런 길드인 건 알고 계시죠?”

“네, 그렇죠.”

“하지만 그들이 미친 영향력은 국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압니다. 아시아권을 라우페이 길드가 좌지우지했었죠?”

“예. 미국과 유럽 쪽도 교류가 있었지만, 주로 손을 뻗은 건 한국과 아시아 국가들 쪽이었죠.”

“으음.”

나는 박윤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용식이를 노렸던 컬렉터, 맥스 브라이언 같은 놈들과 연줄이 있는 것 같았지. 하지만 라우페이 길드가 빌런 짓을 한 주 무대는 한국과 아시아 전역이었다. 게다가 아시아에서 라우페이 길드만큼 덩치가 큰 빌런 길드는 없었지. 나는 새삼 라우페이 길드의 악명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 생각엔, 라우페이 길드와 협력했던 아시아 국가 내 빌런 길드들의 소행인 것 같습니다.”

“길드……‘들’이요?”

“네. 아마 한둘이 아닐 겁니다.”

“하…… 하하…….”

이거 완전 흙탕물 피하려다가 똥 밟은 격이잖아. 라우페이 길드가 없어지면 자유로워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오히려 더 큰 지뢰가 그 밑에 다량으로 숨어 있었다니. 나는 절망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게다가 각성 센터가 한이진 능력자의 등급을 공표한 바람에 더 일이 커진 것 같습니다.”

“제 등급이요?”

“네, 한이진 능력자가 재검사를 받아 S급으로 변했으니까요.”

“……!”

“모르셨습니까?”

“아…… 네. 문자……를 받긴 한 것 같은데 확인을 못 해서요.”

각성 센터에서 연락이 온 것 같은데, 용순이가 너무 말을 안 들어서 쫓아다니다가 확인을 못 했다. 각성 센터가 직접 공표했으면 기사도 많이 났을 텐데, 인터넷 확인도 하지 못했고 말이다.

그나저나 S급이라니. A급을 노렸는데 S급은 좀 부담스럽다. 게다가 그 때문에 다시 빌런 길드들의 표적이 되고 말았으니까.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S급이라니.”

“한이진 능력자도 알고 있겠지만, S급들은 길드에 들어가는 게 선택 사항이 아닌 의무입니다.”

“그렇……죠.”

사실 등급이 낮은 능력자들은 센터에 등록만 하고 일반인처럼 살아가도 아무 문제가 없다. 길드에 잘못 들어가면 D급 이하의 능력자들은 고기 방패로 쓰이고 버려질 수도 있기 때문에 나라에서도 굳이 길드에 들어가는 걸 권장하지 않는다. 웬만큼 좋은 길드는 애초에 낮은 등급의 능력자를 필요로 하지도 않고 말이다.

하지만 고등급 능력자들은 다르다. 국가에서 그들을 특별 관리 대상으로 지정했기에, 길드에 가입하지 않으면 상당히 골치 아파진다. 지금은 애초에 S급 능력자를 길드에서 가만 놔두지 않지만, 시스템이 명확하게 자리 잡지 않던 초기에는 잡음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조건이 좋다는 이유로 아예 타 국가로 망명한 S급 능력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나라에서 고등급 능력자들의 길드 가입을 의무화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겠지. 나는 박윤성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 오딘 길드에…….”

“각성 센터에 등록한 S급 능력자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뿐입니다.”

“네?”

박윤성은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시작했다. 나는 당연히 오딘 길드에 들어가겠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생뚱맞게 S급 능력자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라니?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박윤성이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길드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아니면……?”

“본인이 직접 길드를 창설하는 것이죠.”

“……!”

그건 지금의 대형 길드 마스터로 군림하는 2세대 S급 능력자들이 취한 방식이었다.

과거에는 길드가 그리 많지 않았고, 각성자는 지금보다 더 적었다. 게다가 대부분은 초창기 자금이 부족해서 대기업의 원조를 받았고, 어떤 곳은 나라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각성자들이 늘어나고, A급 이상의 고등급 능력자들이 나타나면서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중 몇몇 실력 있는 S급 능력자들이 기존 길드들의 제의를 시원하게 걷어차고 새로운 길드를 만들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바로 지금 헌터 사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대형 길드들이다.

즉, S급 능력자가 나라에 찍히지 않으려면 길드에 들어가든가. 아니면 직접 길드를 만드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면 몰라도 한국은 이미 대형 길드들이 자리를 잘 잡았기 때문에 굳이 자기가 직접 길드를 만드는 멍청한 놈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박윤성을 쳐다봤다.

“혹시 저보고…… 길드를 만들라는……?”

“새로운 길드를 만드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한이진 능력자는 이미 소속된 길드가 있지 않습니까.”

“로키 길드요? 당연히 거기는 나오기로 한 거 아닙니까?”

“아직 나오신 건 아니죠.”

“아니……!”

이게 무슨 말장난이란 말인가. 협회가 내 계약서를 토해 냈고, 이제 파기할 일만 남았는데. 나는 공중 분해된 로키 길드에 남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박윤성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장태산이 실형을 받고 난 후에 로키 길드의 마스터 자리는 공석이 되었죠. 부마스터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고요.”

“그……런데요?”

“…….”

박윤성의 눈빛이 좀 이상했다. 나는 불안함에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다문 박윤성을 응시했다. 곧 그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로키 길드의 마스터가 되시죠.”

“네……?”

폭탄 같은 박윤성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지만, 진지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나더러 길드 마스터가 되라고? 그것도 하필 로키 길드의?

“저보고 로키 길드의 마스터를 하라고요?”

“로키 길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새로운 길드를 만드셔도 됩니다. 어차피 보여 주기식의 길드가 될 테니까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앞으로 한이진 능력자를 노리는 세력이 빌런 길드뿐만이 아닐 겁니다. 외국 길드에서도 스카우트 제의가 빗발치겠죠. 하지만 그중에는 이번 일처럼 과격한 방법을 쓰는 자들도 있을 겁니다. 이미 많은 자들이 한이진 능력자의 약점을 알고 있으니까요.”

“아…….”

약점. 나는 박윤성의 말에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등급은 S급이 되었는데, 새로운 스킬은 받지 못했다. 박윤성이 나가면 상태 창을 확인해 봐야겠는데. 아무래도 스킬 등급과 능력치가 S급에 맞게 조정되지 않았을까 싶다.

근데 그거…… 위험한 거 아닌가? 가지고 있는 스킬은 보조계와 정신계뿐인데 모두 고등급이다. 하지만 몸을 지킬 수 있는 공격이나 방어 스킬은 하나도 없다. 즉, 나는 그야말로 무방비하게 노출된 하찮은 닭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아주 맛깔나게 조리되어 맛있는 냄새를 풀풀 풍기는 치킨 같은 거 말이다.

‘로키 신, 이 새끼……!’

아니, S급으로 만들어 주려면 적어도 몸을 지킬 수 있는 스킬도 좀 추가해 줘야 하지 않나? 이대로 그냥 이리저리 휘둘리라는 거야? 그것도 전보다 더 상황이 악화된 채로?

속으로 로키 신을 욕하는데, 박윤성이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대형 길드들이 연합을 맺었던 건 알고 계시지요?”

“아…… 네. 그랬죠.”

“성좌들이 나타난 이후에는 조금 흐지부지해졌지만, 다시 연합의 필요성이 커질 겁니다. 그리고 한이진 능력자가 대형 길드 외의 길드 마스터가 된다면, 연합의 동등한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될 겁니다.”

“동등한…… 지원이요?”

“만약 한이진 능력자가 오딘 길드에 정식으로 들어온다면, 다른 대형 길드들이 한이진 능력자를 적극적으로 도우려고 할까요?”

“음…… 아니요.”

“네. 어차피 이득은 오딘 길드가 독점할 테니까요. 남에게 도움 되는 일은 하기 싫겠죠.”

“그러니까, 대형 길드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독립하라는 뜻입니까?”

“쉽게 말하면 그렇습니다.”

“허…….”

박윤성의 설명에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 사람은 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나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무리 이채진의 포션이 보급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수는 한정되어 있다. 게다가 S급 이상의 던전은 확실히 능력치 증폭 포션만으로는 공략하기 어렵겠지. 특히 S급 보조 스킬을 받아 봤던 고등급 능력자들이라면, 더더욱 비교가 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완전히 나를 미끼로 걸고 길드를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전보다 대형 길드들이 나를 지켜 준다고 하면 든든하긴 할 텐데…….

“그래도, 솔직히 제가 길드 마스터를 하는 건 힘들지 않을까요?”

“한이진 능력자라면 잘할 수 있을 겁니다.”

“하하…….”

대체 왜 그렇게 확신에 차 있는 건데? 나는 박윤성을 향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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