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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 (214/228)

외전 5.

머리가 좀 길었나? 게다가 듬성듬성 수염도 나 있는데, 그게 또 백시후와 꽤 어울려서 놀라웠다. 하얀 피부에 여자보다 더 예쁘장한 얼굴을 해 가지고는. 지저분한 수염까지 어울릴 건 또 뭔가. 나는 괜히 심술이 나서 입술을 비죽였다. 그리고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었다.

[여긴 왜 왔지?]

“…….”

수화기 너머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백시후를 빤히 쳐다보았다.

라우페이 길드의 S급 능력자이자 라이수의 충실한 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마.

백시후를 지칭하는 부정적인 명칭은 끝이 없다. 나 역시 그에게 목숨을 위협당한 일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데 왜일까. 어쩐지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라이수가 사실은 이유가 있어 악역 행세를 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까. 백시후에게도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짐작을 할 만한 다른 이유도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수화기에 대고 물었다.

“라이수, 그자의 정체를 당신도 알고 있었어?”

[…….]

“알고 따른 거야? 아니면 몰랐던 거야?”

내 물음에 백시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유리창을 통해서도 불쾌한 기색이 여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물러나지 않고 꼿꼿하게 백시후를 응시했다. 잠시 후, 그의 입술이 열렸다.

[……그게 중요한가?]

“아니.”

[…….]

“그렇다고 당신이 치러야 할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라이수, 그자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명실상부 지독한 악인들이다. 아무리 세상을 위해서였다고 해도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짓밟은 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라이수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 역시 백시후와 마찬가지로 죗값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그럼 대답할 필요도 없겠군.]

“…….”

자조적으로 대답한 백시후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를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사실 당신의 과거를 봤어.”

[……뭐?]

“당신이 라이수와 처음 만났던 날의 기억이야. 사실 그게 진짜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무스펠헤임 던전에서 본 기억은 아직도 의문투성이로 남아 있다. 그 아이가 정말로 백시후인지도 나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백시후를 다시 보니 묘한 확신이 들었다. 그게 백시후의 과거라는 것을 말이다.

“시스템의 오류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보였어. 당신이 수많은 남자를 죽이고 라이수를 만난 그날 밤의 일이 말이지.”

[…….]

백시후는 놀란 얼굴이었다.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구나 싶었다. 감정 표현이라고는 격하게 하질 않았으니까.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조금 깨진 것 같은 느낌이 났다. 쓰고 있던 가면이 깨지고 드러난 맨얼굴은 내 예상보다 조금 더 그를 인간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저 시답잖은 이야기일 뿐이야. 굳이 들을 필요도 없는.]

“그걸 결정하는 건 당신이 아니야.”

[…….]

그리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전화기 말고 방 안에 딱 하나 있는 물건을 흘끗 쳐다봤다. 바로 시계였다. 소지하고 있는 모든 전자기기는 맡기고 들어와야 하고, 이 안에서는 뭐 때문인지 능력도 봉인돼서 인벤토리도 열 수 없었다. 결국 저 작은 시계로만 시간을 알 수 있었다.

정해진 면회 시간은 짧았다. 앞으로 몇 분 정도밖에 백시후와 대화할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백시후가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넌 정말 이상하군.]

“별로 당신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은데.”

불만 어린 목소리로 말하자 백시후가 픽 웃었다. 아주 가느다란 미소지만, 어딘지 편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 이제 어리석은 연극 따윈 그만둘 때도 되었지.]

“연극……?”

백시후의 말은 이랬다. 그는 어렸을 때 빚이 있던 부모에 의해 조폭들에게 팔렸다. 장기 밀매를 당하기 직전, 갇혀 있는 창고에 있었던 쥐약과 물건들을 이용해 감시하던 조폭들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그곳에 라이수가 나타났다.

라이수는 한눈에 백시후에게서 가능성을 보고 그를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라이수의 감은 확실했다. 백시후는 그 누구보다 훌륭한 오른팔이 되어 라이수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했다.

그러던 중, 조금의 부작용이 나타났다. 라이수는 회귀를 거듭할 때마다 예전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가 라우페이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사념체였기 때문에, 신급인 그에게는 회귀해도 이전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안정했기 때문인지 부작용도 나타났다. 그리고 그건 그의 가까이 있었던 수하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백시후는 반복되는 회귀를 깨닫고 반쯤 미쳐 갔다.

회귀 전의 라우페이 길드는 지금처럼 과격한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이 멸망하자 점점 그 방식이 바뀌었다. 절정으로 치달은 건 내가 빙의한 후였다.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은 라이수는 내 보조 스킬을 최대한 끌어 올리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다. 그 대목에서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날 납치하려고 했던 게 모두 레벨 업을 위해서였다고?”

[그래.]

“하…….”

그야말로 집념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계속되는 회귀를 막기 위해 정말 무슨 일이든 했던 건가. 나는 조금 측은한 눈으로 백시후를 쳐다봤다.

[동정은 하지 마. 그럴 필요 없으니까.]

“동정……은 안 하는데.”

대강 짐작은 해서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만약 백시후도 라이수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면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빌런 짓을 했을 테니까. 물론 순수하게 세상을 구하기 위해 한 일은 아닌 것 같지만 말이다.

“그래도 당신과 라이수에게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까. 아주…… 과격한 도움이기는 했지만.”

까딱하면 잘못될 수도 있었으니 차마 고맙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 위협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으면 백시후는 정말로 내 다리를 자르거나 죽일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그 모든 게 연극이었다고 해도, 라우페이 길드가 저지른 범죄는 모두 현실이었다. 아무리 이유가 있다고 해도 살인과 범죄는 정당화될 수 없었다.

“하지만 연극이었다고 해도, 당신들은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해.”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가.”

결국 다 각오하고 한 일이라는 거다. 어딘지 홀가분해 보이는 백시후를 바라보았다. 그는 반복되는 회귀를 막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그에게 말을 걸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때, 시간이 다 됐다는 듯이 교도관이 가까이 다가와 눈짓했다. 나는 결국 백시후에게 마지막 말만 주르륵 내뱉고 방에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정상 참작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오딘 길드에 말을 전해 놓을게. 언젠가 감옥에서 나오면 감사하러 오라고.”

[너…….]

“그때는 내 팔다리를 자르려고 하지는 말고.”

[…….]

농담 섞인 내 말에 백시후는 조금 웃었다. 나는 교도관의 재촉에 수화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싸늘한 기운을 풍기기만 하던 감옥에서 나가자 새파란 하늘이 나를 반겼다. 여전히 날씨가 참 좋았다.

“후…….”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덩달아 나도 조금은 홀가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슬슬 돌아갈까. 날씨가 좋아서 아쉽기는 하지만 더 갈 데는 없으니 다시 숙소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팔을 쭉 펴며 기지개를 켠 나는 숙소에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한이진.”

“으아악!”

갑작스럽게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서 있었다.

“가, 강유현?”

“너…….”

강유현은 내가 방금 나온 건물을 한 번 흘끗 쳐다보고 다시 나를 응시했다. 못마땅해 보이는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대체 백시후는 왜 만나러 온 거야?”

“아니, 너…… 왜 벌써 와?”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

“…….”

강유현은 단단히 화가 난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이럴 줄 알고 강유현에게는 비밀로 해 달라고 했는데. 대체 어떻게 안 거지. 이제 박윤성의 기밀 유지를 신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냥 좀, 알고 싶은 게 있어서.”

“그게 뭔데?”

“그런 게 있어.”

“너 설마…….”

나를 노려보는 강유현의 눈초리가 더욱 살벌해졌다. 눈치 빠른 강유현이 설마 뭔가를 눈치챘을까 싶어서 괜히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나는 일부러 더 뻔뻔한 얼굴을 했다.

“왜, 뭐.”

“설마 아직도 돌아갈 방법을 찾고 있는 건 아니겠지.”

“뭐?”

하지만 엉뚱한 대답을 내놓는 강유현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그건 전에 분명 확실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눈살을 확 찌푸렸다.

“아니야!”

“나 몰래 방법을 알아보고 있는 거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아, 아니라고!”

대체 왜 저렇게 의심이 많은 건지. 로키 신과의 대화를 들은 이후 강유현은 이렇게 의처증에 걸린 사람처럼 굴곤 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들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어떻게든 끝까지 찾아서 너를…….”

“야!”

“……!”

퍽, 하고 강유현의 이마를 내리쳤다. 피하려면 언제든 피할 수 있었던 주제에 강유현은 이마를 얻어맞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증스러운 놈.

“자꾸 그러면 정말 돌아가 버릴 거야. 작작 좀 해.”

“…….”

“알았어, 몰랐어?”

이럴수록 더 세게 나가야 한다. 강유현은 머리에 열이 몰리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놈이었다. 소설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냉정하고 침착한 성격이더니 왜 이렇게 변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여긴 왜 왔어?”

“……려고.”

“뭐?”

무슨 말을 한 건지 잘 들리지 않아서 되물었다. 그러자 강유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치 애교 부리려고.”

“……!”

나는 경악한 눈으로 강유현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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