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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209)화 (209/228)

209화

“그럼 이제 당신도 자유로워진 겁니까?”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

왠지 남 좋은 일만 한 것 같다. 나도 살기 위해 오딘 신과 맞선 거지만, 어쩐지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로키 신은 노려보는 나를 향해 쩔쩔매는 듯이 두 손을 비비적거렸다.

“그럼 이제, 퀘스트 보상으로 원래 살던 곳으로 보내 줄까?”

“뭐라고요?”

“그게 소원이었잖아…….”

“…….”

그렇긴 하다. 그렇긴 한데.

정작 그 말을 들은 내 마음은 미묘해졌다.

생각해 보니, 이제 오딘 신도 없고 아스가르드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면 내가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잖아? 앞으로 한이진은 이쪽 세상에서 영웅 취급을 받을 테고. 그리고…….

아니, 다른 생각은 우선 하지 말자. 그래.

대놓고 말해서 아깝다. 겨우 데드 플래그를 다 없애고 잘살 일만 남았는데 돌아간다니. 내가 돌아가고 싶었던 건 데드 플래그를 부수지 못했을 때의 차선책이었다고. 근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는 거잖아?

“으으음.”

“돌아가기 싫다면, 돌아가지 않아도 돼.”

“……그래도 되는 겁니까? 그럼 진짜 한이진은…….”

“아, 그거 말이지.”

“……?”

어쩐지 대답을 망설이는 로키 신을 지그시 노려봤다. 그러자 로키 신이 겨우 입을 뗐다.

“사실 한이진이란 인물은…… 없어.”

“엥?”

“아하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해가 잘되지 않는 말이었다. 한이진이 원래 없는 인물이었다니? 버젓이 존재하는 사람이지 않았나. 그리고 이 몸도, 실제로 살아 숨 쉬는…….

“……!”

내 손, 아니, 한이진의 손이 투명해지고 있었다. 놀라서 내려다보자, 로키 신이 혀를 찼다.

“아스가르드와 채널이 끊기면서, 그 아이도 자각했나 보군.”

“그 아이?”

“그래, 너를 만든 아이 말이야.”

“뭐……?”

쿵쿵, 심장이 불안하게 울렸다. 로키 신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한도결.”

“……!”

“원래 한이진이란 존재는 없었어. 그 아이가 만들어 낸 거지.”

도결이가…… 한이진을 만들었다니? 그게 무슨…….

“아…….”

그 순간, 도결이의 스킬이 떠올랐다.

거짓된 진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특정한 사물이나 생명체를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시킬 수 있는 정신계 스킬이었다. 게다가 도결이는 이미 그 스킬을 사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아이는 원래 부모를 잃고 혼자가 되거든. 너무 외로웠던 거지. 자기에게는 사실 형이 있었다는 상상을 하다가 스킬을 발동시킨 거야.”

“…….”

로키 신의 말은 이랬다.

자신이 각성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쓴 도결이의 스킬은 불안정했다. ‘한도결의 형’이라는 인물은 만들어졌지만 영혼이 텅 빈 인형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걸 이용한 게 바로 로키 신이었다.

오딘 신에 의해 아스가르드와 미드가르드에서 추방된 로키 신은 한이진의 육신을 이용해 훼방을 놓았지만 자꾸만 실패한다. 그렇게 몇십 번을 실패한 후에야 한이진의 몸에 다른 영혼을 데려올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에 당첨된 게 바로 나였다.

결과적으로는 모두 좋게 끝난 얘기지만, 만약 내가 고집을 부려서 돌아간다고 했다면 도결이의 스킬은 그대로 사라졌을 것이다. 저 로키 신이 계속해서 한이진을 연기하며 살진 않았겠지.

“하아…….”

“아무튼 안 돌아간다니 다행이네. 하하. 잘됐어, 아주 잘됐…….”

“설마 보상이 이게 끝이 아니겠죠?”

“뭐?”

“당신이 싼 거한 똥을 다 치워 줬는데, 그냥 이렇게 먹버하겠다고요?”

“그, 그럼 내가 뭘…….”

우선, 다시는 미드가르드가 침공받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요툰헤임의 게이트를 철저히 닫도록 했다.

알고 보니 요툰헤임 던전은 말 그대로 실제 요툰헤임을 본떠서 만든 던전이었을 뿐, 우리가 쓰러트린 펜리르와 요르문간드는 정말로 죽은 게 아니었다.

그러니 다시는 요툰헤임의 게이트가 미드가르드에 열리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할 것을 약속을 받았다.

“돈은 넘치도록 많으니 필요 없고, 제 등급이나 좀 올려 주세요.”

“으음, 그건…….”

“안 됩니까?”

다 좋은데 한이진의 몸은 너무 약했다. 로키 신도 자기가 쓸 몸이었으면 좀 쓸모 있게 만들었어야지 B급이 뭐냐, B급이. 스킬만 S급을 받으면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정작 육체가 허약하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S급은 못하더라도 최소한 A급은 만들어 줘야죠?”

“그,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나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거래를 끝마칠 수 있었다. 씩 미소를 짓자 로키 신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 육체가 갑자기 사라지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아. 이 세계에 정상적으로 머물고 있는 게 아니니까. 이른바 버그 같은 거지.”

“버그라.”

“뭐, 나도 그동안 시스템에게 버그 취급을 많이 받긴 했지만 말이야. 하하.”

“…….”

던전 안에서 로키 신이 부렸던 수작질은 죄다 버그였구나. 나는 본의 아니게 치트 키를 남발한 건가? 아니면 핵 사용 유저?

“정 안되면 그냥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되니까 나한테 말만 하면…….”

콰직.

“……?”

“……!”

어라? 저기에 왜 균열이 가 있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는 위기의식도 느끼지 못하고 멍청하게 생각했다. 동시에 온통 새하얀 공간이 쩌적, 하고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한이진.”

“……!”

강유현이었다. 나는 경악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아니, 아니. 그래도 신이 만든 결계라고? 아무리 SSS급으로 각성했다고 해도 이건…… 으악!”

“로키 신……!”

강유현이 휘두른 검에 놀란 로키 신이 저 멀리 달아났다. 하여튼 달아나는 데는 선수였다. 나는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은 로키 신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다 들었어. 한이진.”

“뭐, 뭘?”

“숨기는 게 있는 줄은 알고 있었는데.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

“……!”

성큼 다가온 강유현이 내 팔을 꽉 잡았다. 그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상관없어. 절대로 도망가지 못하게 할 테니까.”

“야, 잠깐…….”

“반드시 너를…….”

“야!”

“……!”

나는 손을 들어 폭주하려는 강유현의 이마를 탁, 하고 내리쳤다. 그러자 강유현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홧김에 한 짓이긴 하지만 효과는 꽤 좋았다. 맛이 간 강유현의 눈이 조금은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았다.

“안 가, 안 간다고. 네놈들 옆에서 모기처럼 쪽쪽 빨면서 살 거니까 그렇게 알아!”

“……정말?”

“그래.”

그럼에도 강유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이렇게 보니 아이가 떼를 쓰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정말 미친 것 같은 생각이지만 말이다.

“너 계속 그렇게 무섭게 굴면 안 만나 줄 거야.”

“뭐?”

“날 붙잡고 싶으면 애교라도 부려 보든지.”

“뭐라고?”

내 으름장에 강유현은 당황했다. 지금까지는 몰랐는데, 강유현은 당황할 때 꽤 인간적으로 보였다. 그동안 나를 죽일 남자 주인공이라고 해서 벌벌 떨기만 했는데 왜 그랬나 싶었다. 강유현은 그냥 강유현인데.

“와아, 축하해요. 축하해. 예쁜 사랑 하세요.”

“…….”

“…….”

“그럼 나 슬슬 돌아가도 되려나? 나도 토끼 같은 자식들이랑 살아남은 걸 축하하고 싶어서 말야. 하하.”

토끼 같은 자식들이라니. 하나는 괴물 늑대고, 하나는 괴물 뱀이고, 하나는 저승의 여왕이잖아. 정말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들이었다.

아무튼 로키 신에게는 보상을 꼭 약속받고 돌려보냈다. 나는 상쾌한 표정을 지으며 강유현을 돌아보았다.

“우리도 이제 돌아가자.”

“……그래.”

“……?”

생각에 잠겨 있던 강유현이 느릿하게 대답했다. 또 왜 이러나 싶어서 빤히 쳐다보니, 강유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까 한 말…….”

“뭐?”

“그러니까, 애교를 부리면…….”

“아…… 그거?”

그건 그냥 홧김에 한 말인데. 사실 강유현이랑은 앞으로 어떤 관계로 발전할지는 모르지만, 계속 무섭게 굴면 나도 난감해지니까 일부러 으름장을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강유현은 그 말을 꽤 진지하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정말, 그러면…… 나와 사귀어 주는 거야?”

“어…….”

사……?

사귀어……?

나는 넋을 놓은 채 강유현을 쳐다봤다. 하지만 역시 농담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너도 설마…… 나 좋아하냐? 아니, 그 많은 히로인들은?

얼이 빠졌던 나는 황급히 물었다.

“너, 그…… 성유빈 능력자는 어떻게 생각해?”

“성유빈?”

강유현은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이 눈을 찌푸렸지만, 내가 재촉하자 마지못해서 대답했다.

“꽤 강하지.”

“그거 말고! 인간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냐고!”

“꽤 훌륭한 지도자라고도 생각해.”

“아니…….”

후, 그래. 성유빈이랑은 이것저것 어긋난 게 많으니 그렇다고 치자.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유나유나는?”

“……그건 누구지?”

“우리 맨날 같이 너튜브 찍었던 여자애!”

“아…….”

나는 어쩐지 마지막 희망을 가지며 강유현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이 꽤 복잡해졌다.

“유나유나를 예쁘다고 생각한 적 없어?”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데.”

“…….”

망했다. 망했어.

강유현까지 이러는 걸 보면 소설의 장르가 바뀌어 버린 게 틀림없었다. 나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어디 가?”

“아니, 잠깐 생각할 시간 좀…….”

“안 돼. 못 가.”

고집을 부린 강유현이 내 앞을 막아섰다. 나는 꼼짝없이 그에게 붙들렸다.

“하…….”

어쩌면 이것도 운명을 너무 바꾼 내 업보일 수 있다.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용케 버텼다. 그리고 강유현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내가 읽던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 게이가 되다니. 그리고 나를 좋아한다니. 더 미칠 것 같은 건, 나도 그다지 싫지 않다는 거였다.

“네가 받아 줄 때까지, 애교를 부리겠어.”

“아, 그래……. 잘해 봐라…….”

결국 나는 싱긋 웃는 강유현에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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