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저희도 있습니다!”
“여러분들 괜찮으세요?”
다른 발키리 멤버들이 쾌활한 얼굴로 외쳤다. 구슬이 강유현의 팔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큐어!”
구슬이 강유현의 독을 치유하는 걸 보고 있는데, 송차현이 가까이 다가왔다.
“한이진 능력자, 이건…….”
“요툰헤임 던전이 출현하고 바로 터졌어요.”
“요툰헤임 던전?”
송차현의 눈이 커졌다. 프레이야 길드도 성좌에게 무슨 말을 들은 게 있는 듯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길게 말할 시간이 없습니다. 본격적으로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기 전에 보스로 추정되는 네임드 몬스터들을 격퇴해야 해요.”
“음.”
고개를 끄덕인 송차현이 펜리르와 싸우고 있는 발키리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요르문간드를 보았다. 송차현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이쪽은 우리가 맡겠습니다. 어서 가세요.”
“네, 제 소환수들이 전투에 도움 될 겁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도 꽤 강해졌으니.”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은 송차현이 뒤를 돌았다. 그녀에게서 숨길 수 없는 강력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프레이야 길드는 다른 대형 길드와 달리 단체 전투 경험이 풍부했다. 소수의 고등급 능력자들을 앞세우지 않고 인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항상 단체로 싸워 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발키리의 전투원들은 서로 손발도 딱딱 맞았다. 이쪽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강유현, 가자.”
“그래.”
강유현은 바로 나를 안고 달려갔다. 내가 달리는 것보단 강유현에게 안겨서 달리는 게 빠르니까 그렇다 치지만, 아까부터 가슴 속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그리고 그 울렁거림은 스킬을 써야 할 때가 오니 절정이 되었다.
“강유현, 저기…….”
“……?”
발키리들이 시간을 벌어 줬다고 해도, 박윤성과 리암 화이트가 요르문간드를 막고 있다고 해도, 다급한 건 변함이 없는데 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건가 싶었다.
언제나 썼던 보조 스킬이라고. SSS급 던전이니 처음부터 스킨십 강도를 높여야 해서 키스를 해야 하는데, 자꾸만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강유현은 그런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읍……!”
말캉한 무언가가 입 안을 휩쓸었다. 부드러운 것이 때로는 약하게, 때로는 강하게 입 안 곳곳을 훑고 쓸어내렸다. 나는 입천장을 누르면 쾌감을 느낀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머릿속에서 벼락이 내리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강유현의 팔을 나도 모르게 꽉 잡았다.
그동안 보조 스킬을 내가 주도해서 썼기 때문인가. 먼저 입맞춤을 당하니 너무 당황스러웠다. 몸 안쪽에서부터 터져 나온 열기가 확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보조 스킬은 정상적으로 발동되는지, 뜨거운 기운과 함께 능력이 써진다는 감각도 느껴졌다. 그럴수록 강유현은 내 몸을 더 으스러트릴 듯이 껴안았다.
“읏…… 그만…….”
“하아…… 한이진.”
왜, 왜 그렇게 귓가에 이름을 속삭이는 거냐고!
진득한 저음이 귓가를 건드리자 기분이 더욱 이상해졌다. 이제 스킬 때문에 몸이 뜨거운 건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나는 최후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강유현의 몸을 밀어 냈다.
“읏, 빨리, 싸우러나 가라고, 이 멍청아!”
“…….”
혀를 반쯤 내민 채로 강유현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봤자 지금 상황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콰과과광!
“그쪽 연애질도 중요하다는 거 알지만, 지금은 좀 도와주시는 게 어때요?”
어느새 다가온 리암 화이트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유롭다는 듯이 말했지만, 그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원거리 스킬을 가진 공격수이면서 온몸이 너덜너덜했다. 그에게도 스킬을 걸어 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기다란 무언가가 동시에 땅을 갈랐다.
콰드드득!
“큭……!”
뱀의 꼬리였다. 요르문간드의 몸이 게이트에서 다 빠져나온 거였다. 이젠 정말 시간이 없었다.
“강유현!”
“하지만…….”
요르문간드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나를 안고 있던 강유현이 망설이듯이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난 괜찮으니까 어서 가!”
“…….”
“빨리!”
그에 강유현은 마지못해서 몸을 돌렸다.
그나마 데드 플래그 같은 말은 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야. 후우, 한숨을 돌린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근처에 남아 봤자 전투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큭!”
그리고 그 생각을 하자마자 거세게 터진 기운이 내가 있는 곳을 향해 뻗어 왔다. 나는 납작하게 몸을 웅크렸다.
“……?”
하지만 생각보다 큰 충격이 느껴지진 않았다. 왠가 하고 보니, 눈앞에 투명한 막이 처져 있었다. 실드였다. 게다가 꽤 기운이 강한 걸 봐선 상급 실드였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한이진 능력자.”
“박윤성 마스터?”
박윤성은 나를 보며 기운 없이 웃었다. 리암 화이트와 단둘이 SSS급으로 추정되는 몬스터를 막았기 때문인지 그의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찾는 나에게 박윤성이 나직하게 말했다.
“여기서 피해 봤자 안전한 곳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렇죠…….”
“제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
지금 보니 박윤성은 단순히 다쳐서 기운 없어 보이는 게 아니었다. 지금까지 누구보다 세상을 위해 싸워 왔는데, 그 종착점이 멸망이라니. 얼마나 허무할까. 게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파멸에 손을 보탠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놀랍게도 나는 별로 박윤성을 위로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럴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 같은 것보다 박윤성이 훨씬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정신 차려요, 박윤성 마스터. 당신이 그렇게 자책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
“이놈들을 막지 않으면 인류는 정말로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요.”
긴장하며 양쪽을 모두 쳐다봤다. 펜리르 쪽은 프레이야 길드와 용식이, 용순이가 함께 막고 있었다. 하지만 네임드인 두 몬스터 모두 SS급 이상인지 그럼에도 고전을 하고 있었다. 저대로는 쉽게 쓰러트리지 못할 것이다.
요르문간드는 보조 스킬을 받은 강유현과 리암 화이트가 점점 압도하고 있었다. 아까 리암 화이트에게도 보조 스킬을 걸어 줬어야 했는데.
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펜리르와 싸우고 있는 프레이야 길드에 보조 스킬을 걸어 줄지, 아니면 아까 스킬을 걸어 주지 못한 리암 화이트에게 접근할지 말이다.
그러자 옆에서 실드를 펼치고 있던 박윤성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한이진 능력자. 멍청한 실수를 할 뻔했군요.”
“……박윤성 마스터.”
“여긴 괜찮으니 발키리분들에게 보조 스킬을 걸어 주세요.”
다행히 박윤성은 그사이 멘탈을 다잡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합니다.”
“네, 박윤성 마스터.”
그대로 박윤성은 요르문간드와 싸우고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뒤늦게 보조 스킬을 걸어 줘야 했다는 자각을 했지만, 왜인지 박윤성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올 때는 강유현의 도움으로 쉽게 왔는데, 돌아갈 때는 아니었다. 게다가 주변이 온통 무너지고 길이 파여서 달리기 쉽지 않았다.
“큭!”
“크아아!”
심지어 몬스터가 우글거렸다. 나는 달려드는 몬스터를 향해 총구를 겨눴지만, 건물 잔해에 발을 헛디뎌 조금 늦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눈을 꽉 감았다.
콰득!
“……!”
“한이진 능력자, 괜찮습니까?”
여민준이었다. 그리고 토르 길드의 능력자들이 몰려든 거인들을 쓰러트렸다. 나는 놀라서 그들을 쳐다봤다.
“당신들이 여긴 어떻게…….”
프레이야 길드도 그렇고, 하나같이 던전 공략 중인 길드가 돌아오다니. 마치 백시후의 아이템으로 빠져나왔던 우리처럼 말이다.
“그건 됐고, 지금 엄청 위험한 상황인 거 맞지?”
차강태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펜리르와 싸우고 있는 발키리를 보다가 소리쳤다.
“워, 뭐야. 저놈 등급이 안 보이잖아? 그럼 SS급이야?”
“아마도 SSS급으로 추정 중입니다…….”
“뭐라고?”
심각한 표정으로 차강태가 혀를 찼다. 확실히 아무리 차강태라고 할지라도 SSS급으로 추정 중인 네임드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하는 게…….
“공적을 빼앗길 순 없지! 돌진이다!”
“엑?”
“자자, 어서 가자고. 한이진 능력자!”
“으악!”
오히려 더 투지에 불탄 토르 길드의 능력자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나는 얼이 빠진 채 그들과 함께 달려갔다.
“아마 다른 쪽으로는 헤임달 길드 놈들도 갔을 거라고!”
“헤임달 길드도요?”
“그래, 합동으로 던전 공략하던 중이었거든!”
“아…….”
그렇다면 요르문간드 쪽에도 대형 길드가 지원을 간 거다. 정말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안심하며 숨을 돌렸다. 인류가 살아날 가능성이 조금은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했던 게 문제였을까.
[요툰헤임-SSS405의 네임드 몬스터 ‘펜리르’를 처치하였습니다.]
[요툰헤임-SSS405의 네임드 몬스터 ‘요르문가드’를 처치하였습니다.]
“……?”
왜…… 둘 중 무엇에게도 보스 몬스터라고 하지 않는 거지? 둘 중 하나가 보스 몬스터가 아니었어?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지 않으면 던전 브레이크를 막을 수가 없는데?
“나참, 그렇게 쉽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어?”
“……!”
“하여간 순진하다니까.”
어느새 다가온 라이수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에게서 풍기는 서늘한 기운이 귀를 시리게 만들었다.
“라이수……!”
“후후.”
이윽고 해가 지며 하늘 저편에서부터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지독한 냉기가 주변을 감쌌다.
“크우우…….”
서리거인들이 게이트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