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15.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
“으윽…….”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러자 눈부신 빛이 눈을 찔렀다.
“여기는…….”
겨우 제정신을 차린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눈에 익은 장소가 아니었다. 또 박호수였을 때의 꿈을 꾸는 건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주변이 온통 새하얗기 때문이었다.
이 위화감…… 전에도 느껴 본 적이 있었다. 너무 새하얀 공간이라서 오히려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던 곳.
“저긴가.”
멀지 않아 어떤 물건을 찾았다. 바로 축음기였다.
앤틱한 갈색 축음기 위에서 돌아가는 검은색 엘피판. 하지만 그곳에서 노랫소리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용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긴가민가한 기분으로 축음기를 내려보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한이진?”
[칙…… 치직…….]
“……!”
그러자 마치 내 목소리에 반응하듯 기계적인 소리가 들렸다. 치직치직, 오래된 기계에서나 나올 것 같은 소리가 얼마 동안 일정하게 계속되었다.
[박……호수.]
“그래, 나다.”
나는 침착하려 애쓰며 대답했다.
사실 지금 머릿속이 아주 혼란스러웠다. 내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있을까. 바깥은 던전 브레이크로 벌써 난리가 났을 텐데. 나는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 최대한 막으려고 했지만 말이야.]
“막으려면 막을 순 있었고?”
[꽤 뼈가 아픈데.]
어쩔 수 없이 날카로운 말이 나갔다. 그러자 겸연쩍다는 듯한 목소리가 축음기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겨우 이런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한이진, 만약 네가 돌아오면 이 일을 수습할 수 있어?”
[…….]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생각해 보니 참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내가 빙의해서 S급 보조 스킬을 받은 덕분에 원작에서 클리어하지 못한 최후의 던전을 클리어한 것인데, 그마저도 하지 못하고 원작 초반에 주인공에게 처맞아 죽은 진짜 한이진이 뭘 할 수 있을까. 나는 대놓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그럼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 너도 뭔가 이것저것 정보를 모으는 것 같았는데 말이야.”
예전에 이 축음기로 서로 대화했을 땐 진짜 한이진의 조언이 꽤 도움 되었다. 확실히 그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얻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나도 더 이상 매달릴 곳이 없었다. 그러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있잖아. 박호수.]
“응?”
[돌려보내 줄까?]
“뭐?”
나는 진짜 한이진의 말에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잘못 들었나 했더니 그게 아닌 듯했다. 진짜 한이진이 나직하게 다시 말했다.
[지금 당장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면, 넌 어떻게 할래?]
“…….”
갑작스러운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필 지금? 위험이 코앞에 다가온 지금이라고?
이게 의심의 여지 없이 정말이라면 나는 당장 돌아가겠다고 할 것이다. 지금까지 내 목표는 그거였으니까. 데드 플래그와 멸망 플래그가 포진해 있는 지긋지긋한 이곳에서 도망가는 것!
그런데 기분이 좀 이상했다. 막상 정말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입술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돌아가면 고등급 능력자들은 보조 스킬을 받지 못하고…… 모두 죽고 말겠지? 의심의 여지도 없이 말이다.
-네가 다른 놈들과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갑자기 왜 강유현이 떠오르는 거지. 나는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네가 돌아와서 모두 구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가겠어.”
[…….]
“하지만 못 하잖아. 안 그래?”
적나라한 말에 탈탈거리며 돌아가던 축음기가 조용해졌다. 진짜 한이진을 비난하거나 우습게 여기고 싶은 건 아니지만, 사실은 사실이 아닌가.
그래도 대신 죽게 되는 나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건지 권유한 의도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진짜 한이진의 말을 좋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동안 많이 변했군. 박호수.]
“하, 내가 어떤 인간인지 네가 어떻게 알고?”
[알 수밖에. 너를 점찍은 건 나였으니까.]
“뭐라고?”
[설마 빙의가 정말 무작위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허…….”
이게 무슨…….
이제 더 놀랄 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남은 반전은 내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나는 삐걱거리는 인형처럼 멍하니 축음기를 바라보다가 겨우 물었다.
“대체 왜…… 나를?”
[비열…… 아니, 꽤 독해 보였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
방금 비열이라는 단어를 똑똑히 들었는데? 지금 나보고 비열한 인간이라고 한 거 맞지? 이 자식이 말이면 단 줄 아나.
[뭐, 시간이 얼마 없으니 장난은 이쯤 하기로 하고.]
“누구 마음대로?”
[크흠. 흠.]
살기 어린 말에 진짜 한이진은 어색한 기침을 쏟아 냈다. 눈앞에 있는 거면 한 대 후려쳐 줬을 텐데. 정말이지 아쉬울 따름이었다.
[……아무튼, 네가 원래 세계에서 읽었던 소설. 그건 네가 짐작한 대로 처음 트립(시공간 이동)에 성공한 베타 테스터가 쓴 거야.]
“아…… 역시?”
원작 소설을 쓴 위인이 누군지 궁금했었는데. 역시 짐작한 대로 처음 트립에 성공했다는 그 베타 테스터였던 것 같다.
하긴, 이 세계가 회귀를 여러 번 했다면 멸망까지 지켜보다가 트립한 걸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있던 세계에서 그 소설을 굳이 쓴 이유는…….
[우리의 조건은 그 소설을 읽은 독자 중 한 사람. 하지만 끝까지 다 읽어서는 안 됐어. 그러면 유동적인 변화를 꾀하긴 힘들 테니까 말이야.]
“으음.”
그럼 심단테도 처음부터 한통속이었다는 건가. 나는 빙의했을 때부터 속아 넘어간 거였군. 하여간 능구렁이 같은 자식 같으니.
[그리고, 또…… 여러 조건이 있었지. 내 몸과 주파수도 잘 맞아야 했고.]
“동기화가 잘되기 위해서였나?”
[바로 그거지.]
“하…… 이제 와서 빙의에 이유가 있든 없든 별로 상관없어.”
어차피 다 죽는 마당에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저승길에 소소한 궁금증이라도 풀라는 건가. 참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뭐,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고 좀 들어 봐. 그래도 비장의 무기를 남겨 놨으니 말이야.]
“비장의 무기?”
[음…… 그건 우선 직접 겪어 보기로 하고. 미스틸테인은 잘 가지고 있겠지?]
“아, 미스틸테인.”
발두르 신을 죽였던 전설급 무기. 겨우살이의 나뭇가지로 만든 그 연약해 보이는 무기는 사실 신을 죽일 수 있는 무기였다. 인벤토리에 있는 걸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 있어.”
[필요해질 테니 꼭 잘 간수하라고.]
“뭐……?”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미스틸테인은 현존하는 무기 중 유일하게 신살(神殺) 속성을 지니고 있다. 즉, 이 무기 말고 다른 능력자들이 가진 무기로는 아무도 신을 죽일 수 없다는 말도 된다.
그런데 그런 무기가 필요할 거라니. 우리들 손으로 신을 죽이기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 그런 짓을 할 수는 있나?
[물론 너희가 그자에게 도달할 수 있을 때의 얘기지만.]
“뭐라고?”
[그럼 무운을 빌겠어. 박호수. 아니…….]
조금씩 털털거리며 돌아가던 축음기가 이윽고 서서히 움직임을 멈췄다. 진짜 한이진이 마지막으로 토해 낸 음성이 주변에 작게 퍼졌다.
[한이진.]
“…….”
동시에 눈앞이 다시 흐릿해졌다.
내가 선택한 것에 불만은 없었다. 이대로 모든 걸 포기하고 도망갈 수도 있지만…… 이젠 그러기 싫어졌다. 그뿐이었다.
그러니 다시 눈을 떴을 때 어떤 상황이 펼쳐져 있어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으아아악!”
“살려 줘!”
“……!”
생각보다 더 참담한 모습에 두 눈을 의심했다. 주변은 폭격이라도 맞은 듯이 엉망이었고, 몬스터가 사람들을 짓밟고 있었다. 게다가 다른 던전에서 흔히 보던 몬스터가 아니었다.
“크워어!”
그들은 사람과 비슷했다. 하지만 사람보다 훨씬 컸다. 화염을 두른 몸으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주변에 확 퍼졌다.
「무스펠헤임의 거인
등급: ??
레벨: ??
? ?? ?? ??, ?? ?? ??
…….」
요툰헤임은 거인들이 사는 곳이라더니. 정작 무스펠헤임 던전에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거인들이 지금은 밖으로 튀어나와 미쳐 날뛰고 있었다.
“크윽……!”
“이진아, 너 어디 있었어?”
“이든?”
폭발에 휘말릴 뻔한 나를 이든이 잡아 주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이든을 보다가 물었다.
“강유현은 어디 있어?”
“…….”
왜인지 조금 착잡한 눈으로 나를 보던 이든이 어딘가를 보며 대답했다.
“저기서 네임드 몬스터와 싸우고 있어.”
“그래, 그럼 거기로 데려가 줘.”
“…….”
“이든?”
별안간 이든은 나를 뒤에서 안은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다급한 상황인데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어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이든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그냥 도망칠까?”
“뭐?”
“이대로 그냥 둘이서 도망가자. 응?”
“너 무슨 소리를…….”
뒤를 살짝 돌아보자 침울해져 있는 이든의 얼굴이 보였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이 절박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나는 이든이 단순히 농담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널 좋아해. 더 이상 네가 위험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
“그러니까…… 그냥 다 버리고 나랑 같이 도망가자. 응?”
나는 차마 대답을 못 하고 눈만 깜박거렸다.
그래, 솔직히 이든이 단순히 친구가 없어서 나에게 집착하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감당할 수가 없어서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 그걸 이든은 하필 지금 터트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 네가 진짜 한이진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었어.”
“……!”
그러나 이건 정말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