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속셈이라니. 이 지경이 됐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
“…….”
라이수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박윤성은 경계심을 놓지 않으며 더욱 날카로운 눈으로 라이수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불온한 공기가 흘렀다.
“뭐, 그래. 믿기 힘들다는 거 알아. 나도 솔직히 많이 즐겼었거든.”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를…….”
“곧 올 거야.”
“뭐?”
뜬금없는 말에 박윤성이 눈을 크게 떴다. 라이수의 손가락이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박윤성은 그 손짓을 따라서 하늘을 올려다보려는 충동을 꾹 눌렀다. 함정일 수도 있었다.
끝까지 자신을 경계하는 박윤성과 오딘 길드의 능력자들을 보며 라이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차피 던전 입구 앞에서 개싸움을 벌이는 건 박윤성도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수상하게 굴면 여지없이 공격을 퍼붓겠지. 라이수는 손가락을 접으며 여상한 어조로 말했다.
“요툰헤임 던전을 공략할 능력자들 말이야. 내가 불렀거든.”
“하…… 당신이 무슨 수로?”
던전 안에 들어간 능력자들과는 무슨 수를 써도 연락할 수 없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그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건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박윤성이 흠칫 몸을 떨었다.
공략 중인 던전 안에 난입하는 건 라우페이 길드가 수시로 한 짓이었다. 박윤성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라이수를 응시했다.
“당신, 설마……?”
“후후.”
경악하는 박윤성을 보며 라이수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의 두 눈이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걱정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
“우리 애들은 유능하니까 말이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는 라이수를 박윤성은 복잡한 얼굴로 쳐다봤다.
라이수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극악한 악당이었다. 그동안 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죽이고 망가트린 능력자만 해도 수백 명이었다. 박윤성은 결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아니, 용서를 운운하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만큼 그의 능력 역시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협회가 뒷배로 있었다고 해도, 수많은 대형 길드를 위협하고 농락한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만약 라우페이 길드가 그 능력으로 선을 추구했다면 지금쯤 오딘 길드보다 더 세간의 추앙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난 당신을 믿지 않아.”
그러나 지금에 와서 ‘만약’의 일 따위 생각해 봐도 의미 없는 일이었다. 라이수와 박윤성은 너무나도 먼 길을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박윤성의 두 눈이 적의를 불태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자신은 무력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세상을 위해 싸워 왔지만, 결국 아무것도 막지 못했다. 지독한 패배감이 박윤성을 채우고 있었다.
철천지원수나 다름없는 인물의 손을 빌려야 한다니. 박윤성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결국 점차 어두워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
“이런 미친……!”
SSS급? 물론 S급도 있고 SS급도 있으니, 결국엔 SSS급도 나오긴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필 지금?
SSS급 던전을 무슨 수로 클리어하란 말이야. 정말이지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요툰헤임은 긴눙가가프 같은 요행을 바라긴 힘들겠지.”
“……역시 긴눙가가프 던전에는 숨겨진 설정이 있었군요?”
“그래. 그리고 네가 만든 인연의 결과지. 다음에도 성공할 거란 보장은 없다. 아니, 아마…… 이제 다음은 없겠지만.”
“…….”
미드가르드가 아스가르드를 대신해서 멸망한다면, 앞으로는 회귀할 필요가 없겠지.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떵떵거리면서 잘 먹고 잘살 테니까!
생각하니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다. 그동안 내가 한 개고생을 보답받기는커녕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뒤통수 맞은 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씩씩거리는 나를 지그시 쳐다보던 헬이 입을 열었다.
“다 끝날 때까지 이곳에 있는 건 어때?”
“네?”
“너를 비롯해 다른 이들도 몇 명 정도는 보호해 주마. 그러면 목숨 정도는 건질 수 있겠지.”
“…….”
나는 흠칫하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 자리에 있는 건 용식이와 용순이, 그리고 이든과 강유현, 강수현이었다. 그리고 다른 곳에는 오딘 길드와 발두르 길드의 능력자들도 있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그들이라도 구할 수 있으면 그렇게 나쁜 수지는 아닐 것이다. 막말로 다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무엇보다 나도 살 수 있고…….
“……!”
그러다 퍼뜩 누군가가 생각났다.
‘형!’
바로 도결이었다. 도결이는 이곳에 없다. 미드가르드에 남겨 두고 왔기 때문이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거절할 모양이군.”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흐음.”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헬이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일일이 사정을 말할 생각은 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헬이 어쩔 수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하는 수 없지. 그럼 너를 제외하고 모두 내쫓는 수밖에.”
“뭐……라고요?”
“조건을 잊은 건 아니겠지? 너는 발두르를 대신해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
“잠깐……!”
나는 당황하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나 나보다 헬이 훨씬 더 빨랐다. 넓은 공간 안에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나는 놀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게 무슨…….”
“모두 엘류드니르 밖으로 내보냈다.”
“……!”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순식간에 내보내다니. 나는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저는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합니까?”
“왜? 좋지 않나? 이곳에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
“그건…….”
“그러고 나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되지 않나.”
“……!”
무언가로 머리를 내려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겨우 심호흡을 하며 몸을 바로 세웠다.
지금까지 나는 내가 살아남는 것만을 우선시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도 나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아서, 나만이라도 스스로를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혼란스러웠다. 다른 이들이 죽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나만은 살 수 있다는 걸 기뻐해야 하나? 염원했던 대로 안전한 곳으로 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차피 가짜인 나는 이쪽 세계에서 진실된 관계를 맺을 수도 없다. 그러니 어차피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외면해야 하는 건가?
“……지랄.”
“뭐?”
헬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나는 고개를 들고 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랄하지 말라고.”
“…….”
명확하게 귀에 꽂히는 말에 헬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고상한 여신께서는 생전 욕설을 들은 적도 없었나 보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총을 꺼낸 뒤 외쳤다.
“나도 당장 저택 밖으로 돌려보내!”
“……그건 안 된다.”
“대체 왜……!”
욕설의 충격에서 벗어난 헬은 다시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얼굴 전체에서 확고한 빛이 흘렀다.
“재미있으니까.”
“……!”
이거 완전 사이코 아니야.
더 이상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나는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총을 겨눴다.
“깜찍한 짓을 하는군. 장난감인가?”
“장난감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흐음.”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고 내 금손 스킬까지 더해 업그레이드된 총은 몬스터를 상대로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지만, 그게 신에게도 통할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분명 통하지 않겠지.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아주 조금의 틈이다. 우습게 여기며 장난감 취급하던 무기가 의외의 화력을 내뿜으면 아무리 신이라고 할지라도 조금은 당황할 것이다. 그 틈을 타 아이템을 써서 이곳을 빠져나갈 셈이었다.
순식간에 생각을 정리한 나는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불길을 머금은 총탄이 정확히 헬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나는 그걸 보자마자 인벤토리에서 임시 이동 아이템을 꺼냈다. 던전 안에서 쓰는 순간 이동 아이템이었다. 좌표를 지정할 수 없어서 어디로 갈지 알 수 없고, 단 한 번밖에 쓰지 못하는 일회용이지만 나름 고급 아이템이다. 지금은 이런 아이템도 감지덕지했다.
길쭉한 모양의 아이템을 손에 들었다. 이걸 손안에서 부수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 아이템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윽……!”
그러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당황하며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이 하나도 까닥여지지 않았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손을 꽁꽁 싸매고 있는 것 같았다.
“제길.”
“역시 장난감이군.”
“……!”
예상은 했지만 저렇게 멀쩡할 줄이야. 티끌만큼도 타격받지 않은 얼굴로 여신이 무심하게 손을 내저었다.
“으윽……!”
털썩, 무릎이 꺾여 제자리에 쓰러졌다. 동시에 손안에 쥐고 있던 아이템이 빠져나가 땅바닥을 굴렀다.
또각.
흐릿해지는 눈앞에 까만 구두가 보였다. 헬이 내 앞까지 다가온 것이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나는 겨우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제 목숨만 귀히 여기는 줄 알았더니.”
“윽…….”
“이러는 건 별로 재미가 없구나.”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저런 단순한 행동으로도 열받는 걸 보니 부전여전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과연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턱에 힘을 주며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해서든 여기서 나가야 하는데. 이제 정말 방법이 없는 건가? 점차 눈앞이 컴컴해져 갔다.
쾅!
“……!”
갑작스럽게 들리는 폭음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나는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길게 펄럭이는 검은색 코트를 보며 멍청하게 눈을 깜박였다.
“……강유현?”
“…….”
비슷한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강유현밖에 떠올리지 못했다. 저택 밖으로 쫓겨난 다음 다시 나를 구하러 온 건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을 때였다.
뒤를 돌아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