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그 게이트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가 일부러 열었던 거라니. 게다가 그 원흉이 바로 눈앞에 있다니.
내 시선은 절로 옆을 향했다. 역시나 강유현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기세였다. 당연하다. 철천지원수나 다름없는 인물이 바로 앞에 있는데, 아무리 강유현이라고 해도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문제는 나였다. 강유현과 헬이 치고받고 싸우기라도 한다면 보통 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퀘스트를 하려면 헬의 도움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나는 긴장한 얼굴로 강유현을 흘끗거렸다.
“……?”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강유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헬을 노려보기만 했다. 진작에 달려들었어야 정상인데.
그러다 무언가를 깨닫고 작게 입을 벌렸다.
「상태 이상: 죽음」
이 기묘한 상태 이상에 걸린 후부터는 왜인지 스킬이 써지지 않는다. 그래서 강유현도 섣불리 헬에게 달려들 수 없는 거다. 저렇게 죽일 듯이 헬을 노려보면서도 말이다.
아무래도 이 죽음이라는 상태 이상은 정말로 우리를 죽은 사람처럼 만드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니 신과 이렇게 마주할 수 있는 거겠지. 나는 강유현을 보던 시선을 돌려 다시 헬을 바라보았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미드가르드에서 전사들을 육성한 것처럼, 우리 역시 미드가르드에 전력을 만든 것이다.”
“…….”
“그게 바로 너다. 강유현.”
“……!”
강유현을 전사로 육성한 건 다른 신이 아니었나? 가령 그가 길드로 소속되어 있는 오딘 신이라든가.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던 나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주인공인 강유현에게 큰 트라우마를 준 게이트 사태가 로키 신과 그의 딸인 여신 헬이 벌인 일이었다니.
“…….”
무척이나 놀랐지만, 정작 당사자인 강유현은 의외로 무덤덤했다. 설마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헬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니플헤임에서 살아남은 자를 타락시켜 수족으로 만들 셈이었겠지. 인간은 쉽게 타락하는 존재니까.”
“……셈, 이었겠지?”
헬의 말투가 좀 이상했다.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한 말투였기 때문이었다. 공범이라고 인정한 마당에 말이다.
“난 그저 니플헤임만 빌려줬을 뿐이거든. 딱히 길드를 만들어서 나만의 전사들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
그렇다고 하기에는 강유현을 제법 찰지게 괴롭히신 거 같은데요.
속으로 중얼거렸을 뿐인데, 헬은 나와 눈을 맞추더니 싱긋 웃었다.
“발버둥 치는 꼴이 제법 볼만하길래.”
“…….”
성격이 정말…… 너무 나쁘다.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다가, 헬이 내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흠칫해서 쳐다보자, 헬은 그저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조금 소심하게 말했다.
“하지만…… 강유현은 오딘 길드에 들어갔는데요.”
만약 강유현이 로키 신과 여신 헬의 계략으로 그들의 전사로 육성되었다면, 지금쯤 오딘 길드가 아니라 로키 길드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순간 강유현이 빌런이 되었다면 어땠을지 생각해 봤으나, 소름 끼쳐서 그만두었다.
어쨌든 이 부녀가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리는 걸 수도 있었다.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자, 헬은 웃는 얼굴 그대로 또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품기에는 너무 큰 그릇이었던 거지. 그래도 ‘주인공’이지 않나.”
“……!”
나는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야 지금까지 속으로 실컷 주인공이니, 주연이니 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지만 이렇게 바로 앞에서 말한 적은 없었다. 눈치가 빠른 강유현이나 강수현이 이 말을 들으면 의심을 할 수도 있었다.
“……?”
그러나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주변이 조용했다. 그리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강유현과 그 옆에 있는 강수현, 그리고 이든과 용식이까지 찬찬히 살펴보았다. 모두 눈도 깜박이지 않고 서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이게 무슨……!”
“지금부터 할 말은 저들이 듣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그건…… 그렇죠.”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나와 여신 헬 말고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몸만 움직이지 않을 뿐 정신은 깨어 있는 건 아닐까 했는데, 헬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들은 내가 허락할 때까지 아무것도 듣지 못할 것이다.”
“하…….”
“몸에 해로운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말도록.”
“…….”
온전히 믿기는 힘들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능력도 쓸 수 없는 지금의 나는 정말로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니까. 얌전히 여신의 말을 따를 수밖에.
나도 모르게 조금 삐딱한 눈으로 쳐다본 모양이었다. 헬의 두 눈에 이채가 서렸다. 나는 조금 퉁명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로키 신은 주인공인 강유현을 이용해서 뭘 하려고 했던 겁니까?”
“…….”
다른 아스가르드 신들은 라그나로크를 막을 명목으로 전사를 육성했다. 하지만 로키 신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눈앞에 있는 헬을 비롯해 세상을 멸망시킬 만큼 강한 자식들이 있는데, 왜 구태여 인간 전사를 만든단 말인가.
물론 SS급인 강유현은 누구나 탐낼 만한 인재이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이고. 나는 로키 신의 동기 자체가 궁금한 거였다. 그가 게이트까지 열어 신화에서는 하지 않은 짓을 한 이유를 말이다.
헬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의외로 그녀는 내 말에 순순히 대답해 주고 있었다. 그 말이 모두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주인공을 이용해서 오딘 신의 흉계를 막으려 했었지.”
“오딘 신의 흉계……요?”
“그래.”
“……?”
흉계? 오딘 신이?
오딘 신은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노력한 선한 신이 아닌가? 대체 무슨 흉악한 계략을 꾸민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이자, 헬은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세상엔 절대적인 선악이란 게 없는 법이지.”
“절대적인 선악……?”
“누구보다 선을 추구한 자들이 희대의 악인이 될 수도 있고, 추악한 자들의 정의가 옳을 때도 있다는 말이다.”
“…….”
확실히 일리는 있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중적이니까. 사람 좋아 보이는 가면을 쓰고 얼마든지 모질어질 수 있다. 나는 그걸 직접 경험해 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오딘은 신이지 않은가. 게다가 신들의 왕. 그런 자가 희대의 악인이라면 정말 문제가 많은 거 아닌가?
나는 미심쩍은 얼굴로 헬을 쳐다봤다. 눈앞에 있는 여신은 누가 봐도 악역에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실제 신화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지. 악역보다는 방관자에 가까운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지만.
“방관자라. 그 말이 맞다.”
“어…….”
“사실 귀찮거든. 신들이 전쟁을 하든, 세상이 멸망하든. 나와 니플헤임에는 크게 지장이 없으니까.”
“아니, 그래도 세상이 멸망하면 니플헤임도…….”
니플헤임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중간에 멈칫했다.
니플헤임은 사후 세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후 세계는 어디에서나 존재했다. 천국과 지옥. 윤회를 믿는 동양권에서도 지옥은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 죽은 사람들이 오는 사후 세계인 니플헤임 역시 어떤 형태로든 계속 남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헬은 그렇게 라그나로크 때 소극적으로 굴었던 것이다. 결과가 어떻든 자신은 크게 손해 보지 않을 테니까. 라그나로크에서 누가 이기든지 말이다.
“뭐, 아버지의 부탁이니 가끔 들어줬을 뿐이지. 내 왕국은 어떤 일에도 굳건할 테니까.”
“…….”
“그러니 아버지가 강유현을 이용해 뭘 하려고 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만…….”
말끝을 흐린 헬이 두 눈을 내리깔았다. 시커멓게 죽은 피부 위로도 긴 속눈썹이 음영을 짙게 만들어 냈다. 나는 긴장하며 여신 헬을 응시했다.
“지금은 그 타깃이 바뀌었다는 건 알고 있지.”
“……!”
고개를 든 헬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정확히 나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로키 신이 이번에 자신의 전사로 삼은 건 강유현이 아닌 바로 나였다. 진짜 한이진을 노린 건지, 아니면 빙의한 나를 노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에게 바라는 게 있어서 찾아왔겠지.”
“……그렇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조금 걸어갔다. 온갖 진귀한 음식이 차려져 있는 테이블 한가운데서 여신 헬이 오만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죽은 발두르 신을 되살려 주실 수 있을까요?”
“…….”
내 말에 헬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의 얼굴에 흥미로운 기색이 흘렀다.
“항상 발두르를 살려 달라고 하는 건 다른 이였지.”
“…….”
“그때마다 나는 조건을 붙였다.”
발두르 신을 살리는 조건. 세상 모든 만물이 발두르 신을 위해 울어 준다면 되살려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신화의 내용을 떠올리며 얼굴을 굳히자, 헬은 여전히 흥미로운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너는 그것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군.”
“아…… 네.”
“흐음.”
손을 들어 올린 헬이 제 턱을 쓰다듬었다. 괜히 긴장된 나는 이를 악물었다.
발두르 신을 살리는 조건으로 헬이 뭘 요구할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신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세상 만물이 발두르 신을 위해 울어야 한다고 말하진 않겠지?
……설마. 그런 요구를 하면 당연히 퀘스트 실패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헬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내가 너에게 요구할 건…….”
“……!”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헬의 말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