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
강유현과 강수현이 말했던 것과 똑같았다. 갑자기 눈부신 빛이 터진 뒤에, 정신을 차리니 주변이 바뀌었다. 두 사람이 증언한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니플헤임 던전에 있던 강유현과 강수현을 헬헤임 던전으로 보낸 것도 여신 헬의 짓이었던 건가. 나는 밝은 빛 때문에 눈을 감고 있다가 잠시 뒤에 슬쩍 눈을 떴다.
“어…….”
그리고 두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지금까지 던전 안에 수도 없이 들어가 봤지만, 이렇게 웅장한 건물은 처음 봤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고 넓은 성벽이 성을 감싸고 있었다. 성은 전체적으로 시커멓고 우중충한 색인데, 새하얀 서리가 껴 있어서 제법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마치 옛날이야기 같은 데서 나올 법한 마왕의 성 같은 느낌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방문자 여러분들.”
“……!”
거대한 성만큼이나 큰 성문 앞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숙였다. 느릿하게 고개를 숙이고 다시 고개를 든 장신의 여성이 무덤덤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이름은 강글로트. 엘류드니르의 하녀장입니다.”
“…….”
하녀의 얼굴은 어딘가 익숙했다. 옆을 흘끗 보니, 성의 집사인 강글라티와 조금 닮은 것 같았다. 이름도 비슷하고…… 둘이 쌍둥이인가? 아니면 남매? 나이대가 조금 다른 것 같아서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헬 님에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나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그러자 하녀, 강글로트가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나를 쳐다봤다.
“여신 헬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겁니까?”
“네.”
“아니, 그래도…….”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신을 직접 만날 수 있다니. 이곳이 니플헤임이라 가능한 건가? 아니면 여신 헬이 특별한 건가?
머릿속이 의문으로 차오르는데, 하녀는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 느릿한 발걸음으로 성문 안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
말문이 막힌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다가,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으리으리한 성문을 지나며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런데 성문을 지나자마자 갑작스럽게 머리가 지끈거렸다.
“윽.”
핑, 하고 머릿속이 울렸다. 그리고 동시에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상태 이상 ‘죽음’의 영향을 받습니다.」
“……뭐?”
상태 이상 ‘죽음’이라니.
상태 이상이라는 스킬에 어떻게 ‘죽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갈 수가 있어? 황당한 나는 시스템 창을 노려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라?”
주변에 사람이 얼마 없었다. 나와 용식이, 이든. 그리고 강유현과 강수현만 남아 있었다. 나머지는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눈을 깜박이다가 강유현을 바라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
강유현은 하녀의 멱살이라도 잡을 태세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성문을 지나자마자 황당한 상태 이상에 걸렸을뿐더러 공대의 능력자 대부분이 갑자기 사라지다니. 이런 짓을 누가 했을지는 명백했다.
“다른 분들은 괜찮습니다. 그저 여러분들과 다른 곳에서 대접받는 것뿐이니까요.”
“그런 헛소리를……!”
강유현이 불같이 화를 내며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강유현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눈을 크게 떴다.
저 성질머리라면 진작에 검을 꺼내서 휘둘렀을 텐데. 아니면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겠지. 그렇게 상대의 기를 죽이는 게 특기이지 않았나.
그런데 왜인지 멍청하게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마치 능력이 없는 일반인이라도 된 것처럼.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여전히 공중에 떠 있는 시스템 창을 흘끗거렸다.
「상태 이상: 죽음」
“…….”
설마…… 정말 설마인데. 우리 다 죽어서 능력을 못 쓰나……?
가만히 있던 나는 슬쩍 손을 움직였다. 스킬을 아무거나 써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손가락에 아무 느낌이 없었다. 나는 얼떨떨한 눈으로 손을 내려다봤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다 평등하지요.”
“…….”
“곧 헬 님께서 오실 겁니다.”
“……!”
어느샌가 또 주변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나는 넓은 공간을 한 번 휘둘러보았다.
여기는…… 연회장인가? 화려하게 치장한 공간은 마치 중세 시대의 만찬장 같았다. 미술 시간 교과서에서 봤던 기억이 난다.
이곳의 한가운데에는 몇십 명이 앉아도 충분할 것 같은 커다란 테이블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온갖 음식이 올려져 있었다. 정중앙에는 닭보다 큰 고기가 통째로 구워져 올라와 있었고, 스테이크와 샐러드, 난생처음 보는 음식들도 상을 꽉 채우고 있었다. 게다가 풍기는 냄새도 심상치가 않았다.
냄새가 너무 그럴듯해서 그런지 음식이 가짜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죽은 사람도 음식을 먹을 수 있나?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차분한 얼굴의 하녀를 쳐다봤다.
“죽은 사람도 음식을 먹나요?”
“죽었기 때문에 즐길 수 있는 행위입니다. 이 음식들은 망자밖에 먹지 못하거든요.”
“허…….”
어이없어하는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하녀가 음식을 차린 테이블을 향해 손짓을 했다.
“부디 즐기십시오.”
“…….”
“…….”
하지만 아무도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막말로 음식에 무슨 짓을 했을지 알게 뭔가. 모두 의심스러운 얼굴을 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저런, 기껏 준비한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
묵직한 목소리가 만찬장 안을 울렸다.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였지만 남자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자의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또 애매했다. 나는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헉……!”
여자는 새카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까만 드레스도 잘 어울렸다. 그에 비해 새하얀 피부는 마치 눈처럼 빛났다. 전체적으로 기가 막힌 미인이었다.
그런데, 딱 절반만 그랬다. 정확히 반으로 나뉜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은 딱 절반만 멀쩡하고, 나머지는 까맣게 죽어 있었다. 단순히 피부가 까만 게 아니라, 화상을 입은 것처럼 끔찍한 자국도 더러 보였다.
나는 미처 찡그려지는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 나를 보며 여자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괜찮아. 꽤 끔찍하지?”
“으음, 그게…….”
“솔직하게 구는 것도 사람의 매력이 될 수 있지.”
중얼거리듯이 말한 여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의 상석에 앉았다. 무척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여자는 그대로 우리를 둘러보며 씩 웃었다.
여신 헬이 분명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움직인 건 딱 한 명이었다. 바로 용식이었다. 테이블에 가까이 다가간 용식이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음식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코를 킁킁거리더니, 이윽고 음식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헉, 용식아……!”
“응?”
“지지야, 지지!”
“지지야……?”
용식이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맛있어 보이는데, 라고 중얼거리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나무뿌리를 배 터지게 먹지 않았나. 나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하, 먹고 싶으면 마음껏 먹거라. 니드호그여.”
“으음.”
“주인이 널 많이 아끼니 참으로 다행이구나.”
“…….”
놀랍게도 용식이를 보는 헬의 눈에는 따뜻한 온기가 보였다. 용식이는 원래 니플헤임에서 태어나서 살아야 할 운명이었다. 그러니 아무래도 헬이 용식이에게 남다른 애정이라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독은 들어 있지 않으니 안심하도록 해.”
“흠, 흠흠.”
우리는 서로 눈치를 봤다. 강유현만은 여전히 날 선 눈으로 헬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나머지는 좀 달랐다.
꼬르르륵.
“…….”
솔직히 배가 고팠다. 던전 안에서는 최소한의 식사만 하기 때문에 언제나 배고플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눈앞에 저런 음식들이 차려져 있다니. 사실 유혹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아빠, 나 먹어도 돼? 응?”
“으으음, 그게…….”
용식이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나는 난감해하며 눈치를 봤다. 솔직히 나도 눈치가 보이지 않으면 먹고 싶긴 한데. 그렇게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또 무슨 꿍꿍이지?”
“꿍꿍이?”
“이번엔 무슨 개수작을 부려서 사람들을 괴롭힐 속셈이냐.”
“…….”
강유현의 말에서 깊은 불신이 느껴졌다. 나는 그저 강유현과 헬의 관계를 텍스트로 읽어서 알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강유현이 게이트에 빠졌던 일은 소설에서 자세히 나오지도 않았다. 그저 몇몇 에피소드에서 나온 회상을 읽고 유추했을 뿐.
헬이 한 짓을 그가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얼마나 증오하는지, 지금 처음 깨달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여신 헬이 입을 열었다.
“그저 순수한 호의인데, 그렇게 말하니 슬픈걸.”
“헛소리……!”
“우리는 그저 다른 신들처럼 에인헤리를 육성했을 뿐이야.”
“……뭐?”
예상치 못한 말에 강유현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에 열린 게이트가, 여신 헬이 열었던 거라고? 게다가 ‘우리’라니? 함께 그 짓을 한 협력자가 있었단 말인가?
순간 퍼뜩 든 생각에 나는 작게 입을 벌렸다. 그리고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로키 신과 당신이…… 그 게이트를?”
“…….”
헬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그녀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
이 부녀가 대체 무슨 짓을……!
나는 경악한 얼굴로 헬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