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엘류드니르?
처음 들어보는 지역명에 고개를 갸웃했다. 게다가 니플헤임과 합쳐지다니. 그렇단 얘기는…….
“아직 니플헤임의 보스는 잡지 못했을 텐데.”
“…….”
보스 몬스터를 또 잡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역시 일이 쉽게 풀리지 않는군.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일단 오딘 길드 공대와 만나야겠군요.”
“우선 길을 찾도록 하죠.”
리암 화이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강유현이 강수현을 돌아보았다. 강수현은 진작 준비를 끝내고 바로 능력을 썼다. 다들 이제 웬만한 일에는 당황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용식아, 다 먹었니?”
“……꺼억.”
“그래, 너라도 만족해서 다행…… 응?”
드래곤으로 변했던 용식이가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딘가 좀 이상했다. 마주 선 용식이의 눈높이가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어…….”
“…….”
그리고 용식이 역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제 두 손을 펼쳐서 내려다보았다. 큼직해진 손이 낯선 모양이었다.
용식이가 어른이 되었다. 날렵한 턱선은 더 뚜렷해졌고, 코는 종이라도 벨 듯이 오뚝했다. 어린 모습에서부터 떡잎이 남다르긴 했지만, 막상 실제로 어른이 된 모습을 보니 더 놀라웠다. 마치 미술관 같은 데서 보던 조각상이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모습이 바뀌었어도 용식이는 용식이다.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용식…….”
“싫어!”
“……뭐?”
“보지 마!”
“……?”
별안간 큰 소리로 외친 용식이가 제 얼굴을 가리며 몸을 웅크렸다. 나는 당황하며 웅크린 용식이를 내려다봤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런담.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역시 정화했다고 해도, 몬스터를 생으로 먹은 게 잘못된 건가? 마수석도 아니고 몬스터 본체를 먹어 버렸으니까.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용식이를 살폈다.
“흐윽…….”
“용식아, 어디 아픈 거야? 응?”
“…….”
“아빠한테 얼굴 좀 보여 줘 봐.”
살살 달래며 말하자, 움찔거리던 용식이가 겨우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을 치웠다. 용식이는 잘생긴 얼굴로 울먹거리고 있었다.
“보지 마…….”
“왜?”
“나, 이제 안 귀여워…….”
“……뭐?”
용식이의 말에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제야 용식이가 했던 말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우리 용식이 많이 컸네.
-난 크는 거 싫어.
-응? 왜?
-……싫어.
그때는 그저 자신의 어린 모습에 익숙해서 투정을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용식이는 내가 어른이 된 자신을 싫어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던 거였다.
생각해 보니, 용식이는 드래곤일 때도 언제든 성체로 변할 수 있었지만 어린 모습을 유독 고집했었지. 해송하는 용식이가 나에게 귀여움받기 위해서 그런 거였다고 했고.
왜 진작 알아주지 못했을까.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용식아, 괜찮으니까 울지 마. 응?”
“…….”
“아빠는 네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어.”
“……정말?”
“그래. 그리고 지금도 충분히…… 귀여워.”
어른이 된 용식이를 차마 진심으로 귀엽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아직 어릴 때의 모습이 조금 남아 있었다. 아니, 그렇다고 믿어야 한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용식이를 달랬다. 그러자 울먹거리던 용식이가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나 아직도 귀여워?”
“그래, 당연하지.”
“정말이지?”
“그래. 우리 용식이 귀여워.”
나는 웃으면서 용식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을 감고 내 손길을 느끼는 용식이의 모습은 영락없이 어린애 같았다.
그래, 몸만 컸지 아직 애라니까. 나는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용식이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으악!”
“아빠, 좋아!”
“헉……!”
용식이는 엄청난 힘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심지어 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커서 넓은 품 안에 내 몸이 말 그대로 폭 들어갔다. 단단한 몸이 돌로 만든 벽이라도 된 듯 사방을 압박해 댔다.
“용……식아, 으헉……!”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겨우 손을 들어 용식이의 등을 팡팡 쳤으나 꼼짝도 하지 않는다. 힘이 이렇게 셀 줄이야. 점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헉……! 쿨럭쿨럭.”
그러다 갑자기 용식이의 몸이 확 멀어졌다. 누군가가 나랑 용식이를 억지로 떨어트린 것이다. 나는 기침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미친 용 새끼가!”
“으…….”
“이진아, 괜찮아?”
이든은 나를 뒤에서 껴안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내 눈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검은색 코트를 보아하니 강유현이었다. 그의 뒷모습에서 소름 끼치는 기운이 느껴졌다.
“이런, 팝콘 각이군.”
“좀 조용히 해. 리암.”
“하하.”
리암 화이트와 앤드류 베일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만담 같은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기침을 하면서도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귀여운 펫 행세만 할 것이지…….”
척 듣기에도 무시무시한 목소리였다. 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강유현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강유현이 들고 있는 검에서 우웅 하고 진동이 울렸다.
설마 용식이를 공격하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놀라며 입을 열었다.
“잠깐…….”
“한이진, 넌 가만히 있어.”
“뭐?”
“맞아. 이진이는 나서지 마.”
“그래요. 형은 좀 쉬는 게 좋겠어요.”
“…….”
이것들이 평소엔 서로 죽일 것 같더니 꼭 이럴 땐 죽이 잘 맞는다. 나는 어이없는 눈으로 놈들을 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러다 죄 없는 용식이가 얻어맞겠다. 다시 놈들을 말리기 위해 한 발자국 발을 내디뎠다.
“바쁘신 와중에 죄송합니다만.”
“……!”
느릿하면서도 낮은 목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남자에게 향했다.
남자의 얼굴은 조금 피곤해 보였다. 40에서 50대 정도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는 길게 기른 콧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젊었을 때 꽤 잘생겼을 것 같은 외모지만 눈 밑에 길게 늘어진 짙은 다크서클이 조금 섬뜩하게 느껴졌다. 어딘지 느낌이 좋지 않은 남자였다.
“누구냐.”
강유현이 잔뜩 경계하며 물었다. 남자의 고개가 슬쩍 돌아갔다.
“제 이름은 강글라티. 여신 헬을 모시는 집사입니다.”
“……!”
여신 헬을 모시는 집사?
그러고 보니, 북유럽 신화에서 여신 헬은 니플헤임의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꽤 떵떵거리며 잘 살았다고 하지. 아스가르드 신들 못지않게 커다란 궁전에서 수하들을 거닐면서 말이다.
물론 수하들이 다 죽은 자들이고, 말을 잘 듣지 않아서 헬도 고생한다고는 했는데. 그래도 죽은 발두르 신에게 융숭한 대접을 해 줄 정도로 니플헤임 안에서는 재력이 넘치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집사라는 저 남자도 입고 있는 집사복이 꽤 그럴싸했다.
여신 헬이 살고 있는 그 성 이름이 뭐였더라. 북유럽 신화 책을 꽤 오래전에 읽어서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좀 익숙한 이름인 것 같은데…….
“여신 헬께서 여러분들을 엘류드니르로 초대하셨습니다.”
“……!”
맞다. 엘류드니르. 여신 헬의 궁전. 그리고 시스템 음성이 말한 것도 그거였다.
-[헬헤임-B155. 숨겨진 구역, ‘엘류드니르’이 일시적으로 일반 공개 지역으로 전환됩니다.]
-[니플헤임-S79과 지역이 통합됩니다.]
설마하니 공개 지역으로 전환된 곳이 헬의 궁전이었다니. 게다가 그곳으로 초대되었다. 퀘스트를 진행해야 하는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여신 헬이 초대했다고……?”
“네. ‘망자의 지배자’라고 하는 편이 더 알기 쉬우실까요?”
“…….”
담담한 강글라티의 대답에 강유현은 잠시 침묵했다. 곧 그의 몸에서 새카만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가 불쾌함을 느꼈을 때의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주변 온도가 낮아졌다.
역시 강유현이 게이트에 갇혔을 때 농락한 성좌가 여신 헬이었군. 강유현과 1세대 각성자들이 갇힌 곳이 니플헤임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나저나 이대로 강유현이 헬과 직접 마주치면 큰일 날 것 같은데…….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이곳, 니플헤임과 헬헤임 안에서 여신 헬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으니까요. 오딘 신이 와도 불가능합니다.”
“……!”
마치 내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강글라티는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자신이 섬기고 있는 여신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여신 헬은 태어나자마자 오딘 신에 의해 니플헤임에 버려졌다. 오딘 신이 예언가에게 로키의 자식들이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예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신 헬의 몸은 그때의 충격으로 절반이 새카맣게 죽어 있다고 한다.
아무튼, 그때의 일이 미안한 건지 오딘 신은 니플헤임과 헬헤임을 다스리는 여신 헬에게 고유의 권한을 부여했다. 이곳에서만큼은 누구도 헬에게 반기를 들지 못했다. 그녀는 완벽한 지옥의 군주, 망자들의 지배자인 것이다.
“우리 모두 초대된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흐음.”
나는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발두르 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여신 헬에게 부탁해야 하니까. 이런 때에도 그저 순진하게 눈을 빛내는 발두르 신을 흘끗 보며 신음을 흘렸다. 리암 화이트가 내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한이진 능력자. 갈 겁니까?”
“네.”
“괜찮을까요?”
“뭐…… 안 가는 게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렇겠죠.”
신의 권유를 거부하다니. 보복이 없을 리가 없다. 리암 화이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마 그곳에 발두르 신도 있을 겁니다.”
“정말입니까?”
“네…….”
사실은 지금 당신의 뒤에 있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발두르 신의 목숨은 여신 헬이 되돌려 줄 수 있으니까 맞는 말이긴 하다. 나는 그런 생각으로 뻔뻔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가도록 하죠.”
결연한 얼굴로 리암 화이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심드렁한 얼굴로 서 있는 강글라티에게 말했다.
“안내 부탁드립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흐릿한 미소를 지은 강글라티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짝, 하고 맞부딪쳤다.
동시에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