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
이런 미친……!
뜬금없이 퀘스트?
아니, 그것보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말이야.
「실패 시: 멸망」
“…….”
이게 말이야, 방구야.
퀘스트 실패하면 세상이 멸망한다니. 이제 시스템 창도 시도 때도 없이 멸망 드립 치는 건가? 이렇게 사람 협박해도 되는 거야?
어처구니가 없어서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창을 노려보자, 리암 화이트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이진 능력자?”
“아.”
시스템 창에는 의뢰인이 리암 화이트라고 적혀 있는데, 정작 당사자인 리암 화이트는 나에게 퀘스트를 줬다는 자각이 없는 것 같다. 이 시스템 창은 나에게만 보이는 것 같았다.
하긴, 원래 퀘스트는 성좌들이 주는 거였지. 그런데 인간인 리암 화이트의 이름이 적혀 있다니. 물론 리암 화이트가 부탁한 일이긴 한데…….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나는 리암 화이트를 향해 머리를 휘휘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닌데요.”
“그럴 리가요.”
나는 리암 화이트를 향해 억지로 씩 웃었다. 그러자 떠올라 있는 시스템 창의 아랫부분이 반짝거렸다.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ES/NO」
설마 이거 거절할 수 있는 건가? 물론 거절할 수 있다면야 당연히 거절하고 싶다. 내 손가락이 ‘NO’를 향해 저도 모르게 뻗어 나갔다.
“…….”
하지만 중간에 멈칫했다. 실패 시 멸망이 조건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거절하면 실패로 간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퀘스트를 거절하는 순간 멸망 확정이다.
젠장. 속으로 혀를 찬 나는 들어 올렸던 손을 살며시 내렸다. 그런 나를 리암 화이트가 여전히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네.”
그리고 생각해 보니 리암 화이트와 계약서를 써서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다. 다른 부탁을 들어주면 안 되냐고 말해 봤자, 고집 센 리암 화이트가 받아들일 거 같지도 않았다. 나는 리암 화이트를 향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발두르 신을 찾아보죠.”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리암 화이트가 활짝 웃는 얼굴로 말하자마자, 퀘스트가 수락되었다는 알림이 저절로 떴다. 손으로 누르지 않아도 의뢰인인 리암 화이트에게 수락하겠다고 말하면 알아서 처리되는 모양이다. 이럴 땐 참 쓸데없이 편리하다.
“발두르 길드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내 상황은 상당히 미묘했다. 오딘 길드와 정식 계약을 맺으려고 했지만 거절당하고, 끈 다 떨어진 로키 길드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가 퀘스트를 해야 하니 지원해 달라며 오딘 길드에 선뜻 손을 벌릴 수가 없었다. 아직 임시 계약이 남아 있어서 숙소를 쓰고 있긴 하지만.
그러던 차에 발두르 길드에서 지원해 준다니 다행이었다. 우선 급한 불을 끈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발두르 신의 실종.
우선 이게 단순한 실종인지, 아니면 신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발두르 신이 죽은 건지 생각해 봐야 한다. 신화대로라면 발두르 신이 로키 신의 계략 때문에 죽어서 저승에 있어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발두르 신이 어떻게 죽었더라.’
나는 잘 생각나지 않는 기억을 억지로 떠올렸다. 발두르 신이 형제에게 죽을 거라는 예언을 받고, 발두르 신의 어머니인 프리그가 세상 만물에게 발두르 신을 죽이지 말라고 약속을 받아 낸다. 하지만 그중에서 사람 하나 죽이지 못할 것 같은 약한 겨우살이에게는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로키 신은 그걸 이용해서 발두르 신의 형제인 호드가 겨우살이의 나뭇가지로 만든 화살을 날리게 조종한다. 그리고 그 화살에 발두르 신이 죽고 말았지.
“음…….”
겨우살이의 나뭇가지라. 왠지 익숙한 이름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인벤토리를 뒤졌다.
「겨우살이의 나뭇가지(L)
신을 죽인 나뭇가지.
아이템을 가공하여 무기로 만들면 신살(神殺) 속성을 가지게 된다.」
“…….”
맙소사. 내가 가지고 있었잖아! 발두르 신을 죽인 겨우살이의 나뭇가지. 이걸 가공해서 발두르 신을 죽인 미스틸테인을 만들었었지.
하지만 이건 아직 가공 전의 힘없는 나뭇가지일 뿐이다. 내가 이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것과 발두르 신의 죽음은 별로 상관이 없겠지.
나는 조용히 나뭇가지를 다시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었다. 리암 화이트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나를 그저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리암 화이트를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던전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요.”
“던전 말입니까?”
“네.”
의아해하는 리암 화이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발두르 신이 있을 확률이 가장 높은 곳.
바로 헬 여신이 다스리는 헬헤임. 신이 아닌 우리가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던전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선은 헬헤임 던전을 보유 중인 길드를 알아내서 협상해 주시고요. 던전을 공략할 인원도 맞춰 주세요. 빠를수록 좋습니다.”
“음.”
발두르 신을 찾을 때까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48시간. 약 이틀 정도다. 참으로 짧은 기간이다. 고작 이틀 동안 헬헤임 던전을 물색하고 공략해야 한다니. 게다가 들어간 던전에서 발두르 신을 찾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면 빼도 박도 못하고 퀘스트를 실패하고 말 것이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도록 하죠.”
자리에서 일어난 리암 화이트가 상큼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일이면 던전에 들어가 있을 겁니다.”
“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훗.”
싱긋 웃은 리암 화이트가 핸드폰을 꺼냈다.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리암 화이트를 보니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
탁.
“후우.”
회의실을 나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모든 게 전화 통화 몇 번만으로 끝나다니. 역시 전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대재벌 총수의 후계자다웠다.
그가 어딘가에 전화를 걸자마자 비어 있는 헬헤임 던전이 확보됐고, 그다음 비서인 앤드류 베일리에게 연락하자마자 내일 헬헤임 던전을 공략할 능력자 리스트까지 쫙 뽑혔다. 나는 그걸 그저 놀란 얼굴로 쳐다보기만 했다.
아무튼 이로써 모든 준비가 끝났다. 어서 헬헤임 던전에 들어가 발두르 신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저도 모르게 나오는 콧노래를 부르며 숙소에 돌아가기 위해 발을 옮겼다.
“이진아!”
“……이든?”
회의실이 있는 층을 벗어나려고 했는데, 마침 다른 문에서 나온 이든이 나를 불렀다.
그러고 보니 이든은 주은영을 만나러 왔었지. 나는 기대 어린 표정을 지으며 이든의 뒤를 흘끗거렸다.
“기자님은?”
“기자?”
“어, 넌 주은영 기자님 만나러 왔었잖아.”
“아.”
그런 이름이었나? 이든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에 나만 괜히 초조해졌다.
“얘기 잘했냐?”
“응, 어머니 유품 받았어.”
“그리고?”
“어머니가 남긴 말도 들었고…….”
“또?”
“그게 끝인데?”
“…….”
이게 아닌데. 무언가가 어긋나는 기분이 들었다. 이든과 주은영이 만나는 건 원작에서 굉장히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사건 사고만 끊임없이 일어나는 현판 소설에서 몇 되지 않는 감정선이 짙은 에피소드이기도 했고.
원래는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이든이 충격받고, 그녀가 남긴 유품과 유언을 주은영에게서 전해 받은 후 눈물을 펑펑 흘리는데. 이 모습이 그간 이든이 보였던 면모와 달라서 꽤 호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이든의 모습은 무척이나 무덤덤하기 그지없었다. 이건 내 잘못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먼저 주은영보다 어머니의 죽음을 이든에게 알렸으니까.
그래도 주은영은 이든과 맺어질 서브 히로인이다. 이번 만남에서 이든은 그 느낌을 조금 받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기대의 끈을 놓지 않으며 물었다.
“주은영 기자님이랑 더 할 말은 없어? 같이 밥이라도 먹든가.”
“내가 그 사람이랑 밥을 왜 먹어?”
“아니, 그래도 고마운 일 해 주신 분인데.”
“그냥 물건 전해 준 건데, 뭘.”
“…….”
시큰둥하게 말한 이든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별안간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며 물었다.
“너 혹시 그 여자한테 관심 있어?”
“뭐? 아니!”
나 말고 네가 관심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이제 슬슬 주변 눈치가 보였다. 나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이든의 손을 잡아끌었다.
“무슨 헛소리야. 그런 생각 전혀 안 했거든?”
“근데 왜 자꾸 물어봐? 정말 관심 있는 거 아니야?”
“아니래도!”
답답한 마음에 작게 소리치고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숙소에 돌아가는 동안 이든은 계속 옆에서 가자미눈을 뜨고 종알거렸다. 거참, 아니래도. 진짜.
“야! 그만 좀 해!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
결국 숙소에 돌아와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괜히 서브 커플 도와주려다가 이상한 오해나 받고 말았다. 열받아서 씩씩거리는 나를 이든이 묘한 눈으로 쳐다봤다.
“정말 아니지?”
“그렇다니까.”
“정말 아닌 거지?”
“…….”
이든은 이상할 정도로 집요하게 물어봤다. 분홍빛을 띠는 눈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왜인지 그 눈빛에 압도당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진아.”
“……!”
“똑바로 대답해야지.”
어깨를 감싸 쥔 이든의 손이 아프게 파고들었다.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자, 이든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응?”
“…….”
가까이 다가온 이든의 얼굴이 어쩐지 섬뜩하게 보였다. 당황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