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뭐라고?”
“나는 그 여자가 뭐라고 하든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만나기도 싫은데. 네가 꼭 만나라고 하면 만나려고.”
“어…….”
순간 말문이 막혀 버린 나를 향해 이든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너는 나한테 뭘 해 줄 거냐고.”
“…….”
뭘…… 해 줄 거냐고?
왜 이런 흐름이 된 거지? 이러면 마치 내가 이든에게 꼭 주은영을 만나라고 엎드려 빌기라도 한 것 같지 않은가.
아니,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다. 이유가 어떻든 이든은 지금 주은영에게 관심이 전혀 없다. 따지고 보면 내가 그렇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조금의 계기만 생기면 이든과 주은영은 급속도로 가까워질 것이다. 두 사람은 그럴 운명이니까. 지금은 별다른 관심이 없어도 어머니의 일을 계기로 만나고, 또 자주 마주치면 이든의 생각도 달라지겠지.
어쨌든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이든을 주은영과 만나게 해야 한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해 줄게.”
“뭐든지……?”
“그래!”
호기롭게 외쳤지만, 순간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이든이 이런 식으로 원하는 걸 말했을 때 정상적인 요구를 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요즘엔 자기를 때려 달라든가, 키스를 해 달라든가, 하는 변태적인 요구를 잘 말하진 않았지만. 지금은 혹시 또 모른다. 이든은 이든이니까.
그런 의심을 가지며 슬쩍 노려보자, 이든은 아주 해맑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네가 정 그렇게 말한다면.”
“어…… 그래.”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쨌든 이든이 주은영과 만나기만 하면 되니까. 그 이후에는 이후에 이든이 주은영과 잘 되면 나한테 갖는 이상한 관심은 좀 덜해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
다음날,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나를 찾아왔다. 아니, 나를 찾아온 거긴 하지만 사사로운 만남을 박윤성이 허락해 줄 리가 없으니 연승원을 비롯한 다른 길드원들이 주르륵 감시하는 형태였다.
아무튼 오딘 길드까지 찾아온 능력자는 다름 아닌 리암 화이트였다.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아직 안 돌아가셨네요?”
“하하, 저는 그렇게 서둘러 귀국하지 않아도 괜찮아서요.”
“아하…….”
연합의 대표 중 하나로 왔던 리암 화이트는 다른 마스터들과 달리 아직 마스터가 아닌 부마스터였다. 리암 화이트의 아버지가 워낙 회장으로서 화이트 기업을 꽉 잡고 있고, 그의 수하가 발두르 길드를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는 여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긴눙가가프 던전을 클리어하자마자 다른 연합 길드의 마스터들은 잽싸게 돌아갔는데, 발두르 길드의 리암 화이트만 이렇게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나에게 볼일이 있다니. 언뜻 든 생각에 괜히 불안해진 나는 눈앞에 있는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한이진 능력자는 답답하지 않습니까? 긴눙가가프 던전을 클리어하고 성좌들의 가호로 던전 공략이 더욱 활발해졌는데. 한이진 능력자는 여전히 두문불출하고 있군요.”
“하하…….”
“라우페이 길드가 그렇게 무섭습니까? 그쪽도 요즘은 잠잠한 것 같습니다만.”
“그런가요.”
라우페이 길드 얘기가 나오자, 살짝 긴장되기 시작했다. 내가 숙소 밖으로 나가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지금은 그것보단 오딘 신에게 찍혀서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더 크지만 말이다.
“소문에 의하면, 라우페이 길드에는 성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게 정말입니까?”
“네, 확실하진 않습니다만. 그쪽에도 성좌가 나타났다면 전보다 더 움직임이 활발해졌을 텐데, 그렇지 않으니까요.”
“흐음.”
그러고 보니 라우페이는 신이 아니라 거인이었지. 라우페이는 바로 로키 신의 어머니다. 보통 북유럽 쪽에서는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이름을 자기 이름에 붙이는데, 로키 신은 특이하게 어머니의 이름을 붙였다. 아마도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권력이 컸기 때문이겠지.
어쨌든 라우페이는 신이 아니니까 성좌로 등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길드를 만든 걸까. 심지어 로키 길드를 수하로 부렸지. 참으로 미스테리한 길드다.
“그래도 경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잘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네에.”
이런 말이나 하려고 온 건 아닐 텐데. 꺼림직한 느낌이 든 내가 경계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자, 리암 화이트가 씩 웃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아, 그게 말이죠.”
리암 화이트는 말을 하려다 말고 뜸을 들이며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지금은 오딘 길드 본부 안의 회의장을 빌려서 리암 화이트와 만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안에는 나 말고 연승원과 다른 능력자들도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이들 앞에서는 얘기하기가 곤란하다는 거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연승원과 호위 중인 길드원들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 부탁했다. 연승원은 처음엔 거절했지만, 내가 거듭 말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회의장을 나갔다. 그리고 리암 화이트를 돌아보자, 그가 나를 향해 눈꼬리를 휘었다.
“전에 했던 약속 기억하시죠?”
“약속……이요?”
“네, 스바르트알파헤임 던전에서 했던 약속이요.”
“아…… 그거요.”
하필 피하고 있었던 주제를……. 그냥 그대로 잊었으면 했는데.
스바르트알파헤임에서 전설급 무기를 얻는 과정에서 리암 화이트의 도움을 받았다. 그가 강유현이 전설급 무기를 가질 수 있게 연합을 설득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실제로 리암 화이트는 그 약속을 충실하게 지켰고, 결국 강유현이 전설급 무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니 나는 그와 한 약속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대체 리암 화이트가 나에게 어떤 요구를 할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모든 걸 다 가진 리암 화이트인데, 과연 그가 나에게 원하는 게 있을까? 역시 보조 스킬? 아니면 심단테나 이채진에게 볼일이 있어 내 도움을 받으려는 건가?
사실 그쪽이 더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리암 화이트가 전설급 무기를 포기할 리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물었다.
“저한테 원하시는 게 뭡니까?”
“음, 그게 말이죠.”
“……?”
뭔가를 말하려던 리암 화이트가 별안간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왜 저렇게 심각한 얼굴로 턱을 쓰다듬는 거지? 리암 화이트나 되는 인물이 무언가 곤란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
호기심이 생길뿐더러, 혹시라도 최후의 던전급의 재해가 발생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지금은 원작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니 전처럼 원작에 기댈 수가 없었다. 어쩌면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거였다.
긴장하고 있는 나를 보며 리암 화이트가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이건 발두르 길드원들도 잘 모르는 일이라서요. 철저히 비밀을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원하시면 계약서도 쓰죠.”
“그건…… 서로 신뢰하는 관계로 남고 싶으니 정중히 사양하죠.”
“그래요.”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암 화이트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실은…… 발두르 신이 실종된 것 같습니다.”
“……네?”
“저희 성좌가 실종 상태인 것 같다고요.”
“……?”
그게 무슨…….
성좌가 실종? 집을 나가?
발두르 길드의 성좌라고 하면, 당연히 발두르 신을 말하는 거겠지?
오딘 신의 아들이자 빛의 신, 정의의 신, 그리고 순수의 신이라고 불리는 발두르. 생각해 보니 발두르 신은 북유럽 신화에서도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로 인해 라그나로크가 발생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신이…… 실종되었다고?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없습니까?”
“음, 처음 길드 채널이 열렸을 때만 해도 발두르 길드는 소통이 꽤 활발했습니다. 발두르 신은 모든 길드원과 얘기하길 좋아하는 선하고 자애로운 성정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얼마 전부터 연락이 뚝 끊겨서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성좌들은 여전히 멀쩡하게 길드원들과 소통하고 있는 것 같지만요.”
“음…….”
발두르 신은 다른 신들뿐만 아니라 모든 세상 만물이 좋아했을 정도로 착하고 아름다운 신이었다고 했지.
그런 발두르 신을 질투해서 로키 신이 죽게 했고, 결국 그로 인해 본격적으로 라그나로크가 일어났다. 얼마 전 로키 신과의 대화로 지금이 한창 라그나로크가 일어나는 중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아마도 발두르 신이 사라진 이유는…….
하지만 이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하면 내 입장이 너무 난처해진다. 당신들의 신이 실종된 이유가 내가 속해 있는 신 때문이라고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그러니 여기선 모르는 척을 해야 하는 게 옳았다.
“혹시 저에게 부탁하실 거란 게…….”
“네, 맞습니다. 한이진 능력자께서 실종된 발두르 신을 찾아 주었으면 합니다.”
“…….”
그러나 모르는 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나는 난처함을 느끼며 리암 화이트를 쳐다봤다.
“그런 일은 저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시는 게…… 박윤성 마스터가 더 잘 돕지 않을까요?”
“아니요. 저는 한이진 능력자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대체 왜요?”
“음, 제 감은 한이진 능력자가 이 일을 해결해 줄 거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
그런 이유로 부탁하다니. 게다가 전에 약속한 바람에 나는 리암 화이트의 부탁을 거절하지도 못한다. 그때 분명 계약서도 썼었지.
그렇게 난처해진 내 앞에 새파란 시스템 창이 번뜩 떠올랐다.
퀘스트 발생!
실종된 신 찾기(1)
길드와 연락 두절된 발두르 신을 찾으시오.
의뢰인 : 리암 화이트
난이도 : B급
제한 시간 : 48시간
보상 : 경험치 200, 스탯 포인트 2 추가, 100골드
실패 시: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