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186)화 (186/228)
  • 186화

    14. 꼬이고 꼬이는 일들

    “오늘이야말로 확답을 주셔야겠습니다.”

    “…….”

    박윤성이 빙긋 웃는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어색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다가, 슬쩍 시선을 내렸다. 사실 아직 생각을 다 정리하지 못한 탓이었다.

    영웅들이 세상을 구했다.

    최후의 던전인 긴눙가가프 던전을 얼마 전 국내 대형 길드와 세계 길드 연합의 협력으로 클리어했다. 등급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최악의 던전이라고 불린 곳을 클리어하고 세상을 구한 것이었다.

    그리고 클리어한 직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바로 시스템이 능력자들에게 새로운 이벤트를 선사한 것이었다.

    각 길드의 ‘길드 채널’과 신들의 세계 ‘아스가르드.’

    성좌인 북유럽의 신들이 전면적으로 이 세상에 등장한 것이었다. 물론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것은 아니고, 새로 열린 길드 채널을 통해서 말이다.

    각 길드의 이름을 가진 신은 자신의 길드와 채널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신은 길드원들 모두와 소통하고, 어떤 신은 마스터 혹은 부마스터들과만 소통했다. 하지만 길드에 속한 일반 능력자들 모두 신의 가호를 받게 되는데, 이 신의 가호가 엄청나게 성장 속도를 높여 주기 때문에 길드에 들어가고자 하는 능력자들이 전보다 훨씬 늘어났다.

    ‘아마도 긴눙가가프 던전이 아스가르드와 연결될 수 있는 조건이었겠지.’

    그렇기 때문에 성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주인공들을 도왔을 것이다. 멸망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능력자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무튼 이제 세상은 급속도로 대 성좌의 시대. 그동안 위기에서 세상을 구해 낸 길드들은 능력자들을 비롯해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긴눙가가프 던전을 클리어한 이후 전보다 떠받드는 게 훨씬 더 심해졌다.

    그리고 길드에 속하지 않고 지내던 능력자들까지 신의 가호와 퀘스트 보상을 탐내 길드에 들어가기 위해 지원하는 일이 많아졌다. 모든 게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그리고 오딘 길드와 임시 계약을 맺고 있었던 나는 정식 길드원이 아니기 때문에 가호와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미 돈이나 아이템은 차고 넘쳤기에 큰 욕심이 나지는 않았지만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은 궁금하기도 했다.

    ‘신들의 왕인 오딘에게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

    오딘은 자존심이 높은지 마스터인 박윤성과만 연락을 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콩고물 정도는 얻어먹을 수 있을 것이다.

    결심한 나는 박윤성을 쳐다봤다. 그동안 던전에 들어가면서 다른 길드도 만나 봤지만, 역시 오딘 길드만 한 곳이 없었다. 원작과 달리 세상도 멸망하지 않았고, 한이진이 주인공인 강유현에게 죽는 데드 플래그도 이제 완전히 소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알겠습니다. 오딘 길드에 정식으로 들어갈게요.”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하, 하하…….”

    박윤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식 가입서를 꺼냈다. 예전부터 준비해 두고 있었는지 재빠르고 물 흐르는 듯이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순식간에 테이블 위에 가입서와 계약서가 주르륵 쏟아졌고, 어느새 내 손에는 펜이 쥐어져 있었다.

    “음…….”

    우선 가입서와 계약서를 눈으로 쭉 훑어보았다. 가입서는 다른 길드와 똑같은 표준 가입서였기 때문에 특별한 건 없었다. 가끔 다른 길드는 은근슬쩍 독소 조항 같은 걸 추가한다던데, 오딘 길드는 그런 것도 하나 없이 깔끔하기만 했다.

    그리고 계약서는……. 조건을 보니 S급 능력자를 기준으로 작성한 것 같았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그보다 조건이 더 좋았다.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던전 수도 1년에 세 번뿐이고, 연봉이나 입찰 가능한 아이템 수도 남들보다 배는 많은 것 같았다.

    “…….”

    오딘 길드는 정말 이런 조건으로 나와 계약해도 되는 건가? 입이 떡 벌어진 나는 박윤성을 흘끗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저…… 정말로 이 계약서로 계약해도 되나요?”

    “……?”

    조금 소심하게 묻자, 박윤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뭐가 부족하십니까?”

    “네?”

    “원하는 게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추가하셔도 괜찮습니다.”

    “아니…….”

    너무 과해. 이건 너무 과하다니까!

    강유현도 이렇게 제안받을 거 같지 않은 계약서를 나에게 주다니. 게다가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보라니. 박윤성은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아무리 내 보조 스킬이 탐난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하다니.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더 이상은 주목받기 싫은데, 만약 계약서 내용이 유출이라도 된다면 한동안 더 소란스러워질 것 같았다. 이미 내 이름은 세상을 구한 영웅 중에서도 주역이랍시고 인터넷에서도 화제였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왜? 거기서 내가 한 일이라곤 거의 없지 않나.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더 활약했던 거 같은데.

    아무튼 죽은 듯이 조용히 살다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계획은 조금 틀어질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쉰 나는 다시 펜을 들어 올렸다.

    “후, 아닙니다. 이대로 계약하죠.”

    “잘 생각하셨습니다.”

    환하게 웃은 박윤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우선 가입서에 이름을 쓰기 위해 펜을 움직였다.

    “……응?”

    그러나 이름이 써지지 않았다. 서걱거리는 소리만 날 뿐, 잉크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펜이 망가졌나? 서명란이 아닌 부분에 펜을 써 봤는데, 지금은 잉크가 잘만 나왔다. 멀쩡한 펜이었다. 의아해진 내가 다시 서명란에 이름을 쓰려고 했을 때였다.

    파지직.

    “윽……!”

    펜을 댄 서명란에서 불꽃이 확 일어났다. 그리고 가입서 자체를 활활 불태우기 시작했다. 놀란 내가 뒤로 물러나자, 경호 중인 길드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내 주위를 둘러쌌다.

    “이게 무슨 일이지?”

    “라우페이 길드가 한 짓일까요?”

    “설마, 아무리 그래도 가입서에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

    박윤성과 연승원이 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가입서가 타 버리다니. 그것도 서명란에 사인하려고 하니까. 이렇게 재수가 없을 수가.

    누군가가 일부러 방해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누가 감히 오딘 길드의 마스터가 직접 관리하는 가입서에 장난질을 칠 수 있단 말인가. 그게 가능한 건 그야말로 신급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박윤성이 눈을 크게 뜨며 제 오른쪽을 쳐다봤다. 박윤성이 저에게 뜬 시스템 창을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입에서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게 무슨…….”

    “왜요?”

    “…….”

    박윤성이 당황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왜 그러는 거지? 궁금해서 묻자, 박윤성이 얼떨떨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한이진 능력자가, 이미 다른 길드에 가입된 상태라고 합니다.”

    “네?”

    “그래서 가입을 받아 줄 수 없다고…….”

    “아니, 잠깐.”

    지금 박윤성은 오딘 신과 직접 채널로 소통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오딘이 그렇게 말했다면 내가 다른 길드에 가입된 상태라는 건 진짜인 것 같았다.

    하지만 어디? 내가 언제 다른 길드에 가입했어? 로키 길드를 나온 뒤에 임시 계약한 건 오딘 길드밖에 없었는데?

    “……설마?”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끔찍한 가정을 떠올렸다.

    분명 나는 이든을 구하기 위해 로키 길드의 고등급 능력자들의 계약서를 몽땅 태워 버렸다.

    그런데 나는? 아니, 한이진의 계약서는? 그것도 태운 게 맞나? 한이진은 고등급 계약자가 아니니까 굳이 그 금고에 보관하지 않았을 거 아닌가?

    “젠장…….”

    “한이진 능력자?”

    생각지도 못한 문제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장태산이 구속된 이후 로키 길드는 공중 분해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로키 길드원들은 협회에서 직접 중재해서 계약 파기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나 역시 당연히 오딘 길드에서 처리해 준 것으로 믿고 있었다. 나는 억울한 눈으로 박윤성을 응시하며 물었다.

    “저 로키 길드와 계약 파기한 거 아니었나요?”

    “네, 분명…… 아.”

    “……?”

    대답하던 박윤성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분명, 협회에서 처리한다고 했었죠. 아무래도 제대로 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런…….”

    협회 놈들이 문제였군. 역시 뒤가 구린 놈들이라니까. 마음에 안 들어.

    툴툴거리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박윤성이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일은 정식으로 협회에 항의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네, 꼭 부탁드립니다.”

    끈 떨어진 로키 길드에 계속 속해 있었다니.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거기보다는 앞길 창창한 오딘 길드가 훨씬 낫지, 암.

    그렇게 웃으며 박윤성과 헤어졌지만, 나는 곧 다시 그의 집무실에 와야 했다. 그것도 어처구니없는 일로 말이다.

    “네? 뭐라고요?”

    “……나예림 본부장과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허…….”

    나예림이 연락 두절? 계약 파기 정도의 건이면 간부인 나예림의 허가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연락이 안 된다니.

    머리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박윤성의 앞이라 최대한 참았다. 박윤성이 면목 없다는 얼굴을 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하겠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하…… 협회 간부가 작정하고 숨었는데 찾아낼 방법이 있나요?”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

    어딘지 일을 칠 것 같은 표정이라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억지로라도 해결하면 나에게는 좋은 일이니까.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하아.”

    협회는 대체 무슨 속셈이지. 일부러 나를 로키 길드에서 빼지 않은 이유가 있나? 그리고 간부가 숨은 것도 나와 관련이 있는 일인가?

    설마, 우연이겠지. 머릿속에서 온갖 음모론을 펼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선 씻고 잠이나 자자. 침대에 누웠다가 벌떡 일어난 나는 시스템 창의 알림이 반짝이자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응?”

    손을 뻗어 시스템 창을 열었다. 그러자 처음 보는 색의 시스템 창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글자가 반짝 떠올랐다.

    「안녕?」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