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리암 화이트가 끼어드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나름대로 나를 도와주려는 듯했다. 나는 얼떨결에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이제 공략에 대한 얘기나 하죠. 생산적인 이야기가 더 많지 않습니까?]
리암 화이트가 내뱉은 서늘한 말에 주변은 정적에 휩싸였다.
하지만 당사자인 내가 직접 나서서 보조 스킬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려 하지 말라고 못을 박았고, 리암 화이트까지 나서서 뭐라고 하니 다른 마스터들도 더는 말을 계속할 수 없었다.
결국 내 보조 스킬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넘어갔다. 나는 리암 화이트가 있는 쪽을 흘끗 쳐다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내 나름의 고맙다는 인사였다.
“…….”
“……!”
그리고 그때 공교로운 타이밍으로 리암 화이트와 딱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바라보며 리암 화이트가 씩 웃었다. 그의 새파란 한쪽 눈이 더욱 파랗게 빛났다.
어색하게 그를 보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후우…….”
공략 회의는 한나절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정말 길고 지루했다. 게다가 회의장 안에 들어올 때는 분명 해가 쨍쨍했는데, 나갈 때는 어두워져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실화인가.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며 숙소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였다.
“한이진 능력자……!”
“……?”
누군가가 나를 부르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내 곁을 지키던 길드원들이 바짝 긴장하며 곁을 둘러쌌다. 맥스 브라이언의 습격을 겪은 뒤로 나를 호위하는 길드원들은 유독 더 날이 서 있었다. 그 바람에 나에게 다가오려던 류하오란이 당황하며 엉거주춤 제자리에 멈춰 섰다.
“괜찮으니까 다들 물러나세요.”
“하지만…….”
“여긴 오딘 길드 안이잖아요.”
“…….”
생긋 웃으며 말하자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뒤로 물러났다.
“이든, 너도.”
“……쳇.”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구긴 이든도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설마하니 발리 길드의 마스터인 류하오란이 이렇게 남들에게 빤히 보이는 장소에서 무슨 짓을 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배신자인 조슈아 레만조차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일을 저지르려고 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원작을 읽은 나는 류하오란이 나쁜 인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한이진 능력자. 저는 한이진 능력자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닙니다.”
“음…….”
“정말입니다. 앞으로는 다신 그러지 않겠습니다. 맹세하겠습니다.”
“…….”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류하오란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사실 그를 포함한 다른 마스터들이 전전긍긍한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내가 정식으로 오딘 길드에 들어갔으면 모를까, 임시 계약을 한 상태로 자꾸만 여지를 주니 다른 대형 길드 마스터들이 애가 탔던 게 아닐까 싶다.
특히 중국은 땅이 넓은 만큼 클리어하기 힘든 고등급 던전이 많다. 물론 그만큼 인구수도 많아서 다른 나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고등급 능력자도 많은 편이지만, 아무래도 중국은 그 외에도 문제가 많은 편이지…….
어쨌든 그래서 더욱 내 보조 스킬에 집착해서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다른 대형 길드들도 마찬가지고.
“음…… 괜찮으니까 그렇게 미안해하지 마세요.”
“정말입니까?”
“네, 그리고 우선은 긴눙가가프 던전 공략에만 집중하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하…… 하하.”
눈을 반짝인 류하오란이 나와 악수를 하고 싶어 했지만, 그건 길드원들이 막아서 하지 못했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갔다. 원래 원작에서는 이채진의 보조 스킬 하위호환의 포션이 더 일찍 유통되었었는데, 이번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좀 늦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긴눙가가프 던전을 클리어하면 이채진의 포션이 풀릴 테고, 그러면 대형 길드들이 나에게 집착하는 것도 좀 사라지겠지. 그렇게 라우페이 길드와 나를 경계하는 신들만 조심하면서 버티면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름대로 완벽한 계획을 세운 나는 혼자 씩 웃었다.
***
어느덧 시간이 흘러 예언자가 예언한 던전 출현의 전날이 되었다.
12월 30일.
그동안 숙소 안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는데, 갑자기 내일 세상을 뒤흔들만한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졌다.
“하…….”
방에 딸린 발코니 난간에 몸을 기대고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이제 와서 새삼 무섭다거나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세상의 흥망을 결정짓게 될 전투를 앞두고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게 스스로도 좀 묘했다.
아직도 빙의한 이 세상에서 사는 게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까. 그래서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어딘가 게임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건가. 새삼 맥스 브라이언의 말이 떠올랐다.
“흐음.”
내일 내가 살아남는다는 전제하에 많은 계획을 세워 놨었는데, 만약 원작처럼 멸망 엔딩으로 끝난다면 그것만큼 허망하고 어이없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나에게 투자한 신도 클리어할 수 있을지 어떨지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하던데.
게다가…….
‘외전이라.’
일전에 꿈을 꿨을 때, 나는 다행히 빙의 전의 기억을 조금 되찾았다. 하지만 완전히 되찾은 건 아니고,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그래도 자기 이름 하나 기억하지 못했던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아무튼 그때 꿨던 꿈을 다시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많았다. 그 당시는 맥스 브라이언을 막는 데 혈안이 되어 있어서 꿈 내용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금 떠올리니 수상한 점이 많았다.
우선 불알친구인 진명섭이 나온 건 그렇다 치고, 그놈이 한 말이 거슬렸다. 외전이 나온다는 얘기는 그 꿈에서 처음 들은 소식이었다. 그냥 개꿈이라고 여기기에는 찝찝했다. 지금의 내가 평범한 꿈을 꿀 리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시스템이 알려 준 건가? 아니면 신?
어쨌든 누군가가 나에게 외전이 있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해 꿈을 통해 보여 준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귀찮게…….”
이 와중에 외전까지 생각해야 한다니. 솔직히 머릿속에 과부하가 걸릴 것 같았다. 게다가 멸망 엔딩으로 끝나 버려서 도무지 어떤 외전이 나올지 짐작할 수도 없는 원작 따위.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난간에 기대고 있던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그러자 근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바스락.
“응?”
고개를 돌리자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있는 방은 원래 1층이었는데, 용순이와 인간으로 변한 용식이 때문에 더 넓은 방으로 옮겨서 지금은 2층에 있었다. 그래서 발코니에 있으면 나뭇가지와 초록색의 나뭇잎들이 보였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흔들리는 거지?
멍청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무언가가 눈앞을 확 덮쳤다.
“으악……!”
“쉿.”
나뭇잎을 헤치고 나타난 건 놀랍게도 사람이었다. 그것도 내가 아는 사람이다. 새파랗게 빛나는 눈과 마주쳤다. 바로 강유현이었다.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던 내 입을 막은 강유현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가 풍기는 특유의 향이 코끝을 스쳤다.
“너 무슨…… 먼저 출발한 거 아니었어?”
“곧 가야 해.”
“근데 왜…….”
“…….”
강유현은 너무나도 부담스러운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무슨 할 말이 있길래 오밤중에 이렇게 찾아온 걸까. 그것도 이렇게 발코니를 넘으면서까지. 내가 만약 방 안에 있었으면 창문으로 들어왔을 거 아닌가.
어이가 없어서 강유현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아, 꿀잠 아이템 써 줘? 근데 잘 시간이 있나?”
“그런 거 아니야.”
“……?”
그럼 왜 온 거지?
강유현을 비롯한 몇 명은 예언자가 예언한 장소로 미리 가 있을 예정이었다. 최후의 던전이 출현하는 곳은 환상에서 봤던 시청역 부근이다. 그쪽은 이미 며칠 전부터 시민들을 대피시켜 놓은 상태라고 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고등급 능력자 몇 명이 미리 가서 던전 출현을 대비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오늘 밤에 강유현과 강수현은 미리 시청역 쪽에 가 있겠다고 했다. 나는 숙소에 있다가 아침에 출발할 예정이었고 말이다. 어차피 싫어도 내일 볼 건데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었다. 다른 사람들 몰래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게…….”
“……?”
답지 않게 강유현은 머뭇거렸다. 타인의 눈치 따윈 보지 않는 마이웨이 주인공인 강유현이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그만큼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난 건가 싶었다. 원작에 기댈 수 없는 지금은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켰다.
“부탁할 게 있어.”
“부탁?”
“그래.”
강유현의 나직한 말에 나는 더욱 혼란을 느꼈다.
꿀잠 아이템에 대한 얘기는 아니라고 했고……. 그럼 강유현이 나에게 할 부탁이 뭐가 있지?
내일 잘 부탁한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런 부탁을 한다고? 저랑 내가 고등급 던전에 몇 번을 들어갔는데.
감이 잡히지 않아서 눈살을 찌푸리자, 강유현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느샌가 몸이 바짝 붙을 정도로 가까이 온 그를 당황스러운 얼굴로 올려다봤다.
“한이진.”
“어…… 어?”
진지한 눈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멍청하게 입을 벌릴 뿐이었다. 그런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강유현이 말을 이었다.
“무스펠헤임 던전에서 마지막에 썼던 보조 스킬.”
“……!”
“그거 다른 능력자에게는 쓰지 마.”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강유현을 멍하니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