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내일 열립니다.”
“뭐라고요?”
연승원의 대답에 어이가 없어졌다.
내일? 회의가 바로 내일? 그걸 이제 말해?
황당해하는 나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며 연승원이 대답했다.
“예언이 나오자마자 일정을 잡은 거라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음…… 하긴.”
델리아 클레멘스가 날짜를 예언하지 않았다면 이런 회의도 하지 못했겠지. 다른 일에 급급해서 회의도 제대로 하지 못하다가, 최후의 던전이 열리는 날이 되어서야 급하게 머리를 맞댔을 거다. 하지만 그때는 회의고 뭐고 할 시간도 없었겠지. 당장 던전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을 테니까. 아마 원작도 그렇게 급하게 클리어하려고 들어갔다가 더 사달이 나지 않았을까 싶다.
“회의는 어디서 하는데요?”
“오딘 길드 본관에서 합니다.”
“협회가 아니라요?”
“네.”
의외였다. 분명 협회에서 회의를 할 줄 알았는데, 오딘 길드에서 하다니. 강유현이 있는 오딘 길드가 공대를 통솔할 예정이기 때문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연승원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협회는 신뢰하기 힘드니까요.”
“아…….”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수가 협회에 난입한 사건이 떠오른 탓이었다. 게다가 본부장인 나예림도 어딘가 수상쩍었었지. 그런 곳에서 회의를 했다간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납득하며 고개를 주억거리자, 연승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걸며 나에게 말했다.
“그럼, 내일 모시러 오겠습니다.”
“아…… 네.”
뭐지? 냉기만 풀풀 날리던 연승원이 미소를 짓다니.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큰일 난다던데.
하지만 요즘 연승원의 분위기가 묘하게 풀어져 있었다.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그저 난감할 뿐이었다. 왜 저러는지 알아야 변화를 받아들일 텐데. 짐작도 가지 않았다.
연승원이 몸을 돌려 방에서 나가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뒤를 돌자 어딘가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용식이가 보였다.
“용식아?”
“…….”
용식이는 고운 눈을 찌푸리며 연승원이 나간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왜 저러나 싶어서 다가가 용식이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용식아,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아빠.”
“그래?”
이제 제법 의젓하게 말하기 시작한 용식이가 고개를 내저었다. 왠지 탐탁지 않아 보이는데,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건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용식이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용식이가 처음 인간으로 변했을 땐 정말 작았다. 열 살 남짓한 어린 남자아이였지. 지금은 무럭무럭 자라서 청소년기의 소년 정도가 되었다. 인간의 나이로 따지면 중학생 정도? 무려 그 무시무시한 중2병이 걸릴 나이대의 소년 같은 모습이었다.
조금 걱정하긴 했지만, 다행히 아직까지 용식이에게 사춘기 같은 건 찾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대부분은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며 따랐다. 일전에 맥스 브라이언과의 일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돌발 행동도 잘 일으키지 않고 얌전한 편이었다.
그런 용식이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긴눙가가프 던전에 데려가도 괜찮은지 고민을 많이 했다. 박윤성을 비롯해서 다른 능력자들은 S급인 용식이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그게 영 탐탁지 않았다. 물론 겉모습과 다르게 용식이가 강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소환수의 모습일 때와 다르게 지금은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보니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용식이를 두고 가는 걸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결심한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용식아.”
“왜?”
“그게…….”
하지만 막상 말하려니 조금 망설이게 되었다. 비록 용식이가 사람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소환수의 특성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긴눙가가프 던전을 클리어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만약 소환수인 용식이와 오래 떨어져 있으면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클리어하지 못한다면 원작처럼 세계가 멸망하고 말 테지만. 그건 일단 논외로 치고, 긴눙가가프 던전을 클리어하는 경우만 생각했을 때 말이다.
그래도 역시 데려갔다가 위험해지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나는 다시금 결심하며 말을 이었다.
“최후의 던전에는 나랑 용순이만 가려고 해.”
“…….”
“용식이 너는 숙소에서 기다리지 않을래?”
“…….”
용식이는 내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안색이 어두워진 걸 봐서는 싫은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용식이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싫어, 왜? 나는 왜 가면 안 돼?”
“그러니까, 거긴 지금까지 갔던 던전들 보다 훨씬 위험한 곳이야.”
“용순이는 되고?”
“용순이는…….”
“삐익?”
우리들 옆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던 용순이가 자기를 말하는 걸 아는지 새된 소리를 내지르며 얼굴을 휙 돌렸다.
무스펠헤임 던전에서 용순이가 성체로 변한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지금은 이렇게 앙증맞은 작은 도마뱀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용순이 역시 무시무시한 드래곤이다. 게다가 덩치가 커서 그런지 성체 모습은 용식이보다 더 박력이 넘치기도 했다.
대답을 머뭇거렸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내 심정을 꿰뚫어 본 건지, 용식이가 얼굴을 찌푸리며 따지듯이 말했다.
“내가 아직 용으로 변하지 못해서 그래?”
“음…….”
용식이를 긴눙가가프 던전에 데려가지 않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인간으로 변한 용식이는 분명 드래곤의 모습으로도 돌아갈 수 있을 텐데, 아직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상태에서 다시 드래곤의 모습으로 도무지 변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러 번 시도했으나 매번 실패하기만 했다.
그런 불안정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던전 공략에 데려갈 수는 없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고 여기서 쉬고 있자. 응?”
“…….”
용식이 역시 납득할 거라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반항하기 시작했다.
“싫어! 나도 갈 거야!”
“뭐?”
“나도 같이 갈 거라고!”
“용식아…….”
난처해진 나는 씩씩거리는 용식이를 내려다봤다. 평소처럼 얌전하게 따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떼쟁이 어린아이처럼 굴 줄이야. 물론 용식이는 그래도 귀엽긴 하지만……. 아니, 이게 아니지.
이럴 때는 나도 좀 단호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흠흠, 헛기침을 한 나는 최대한 표정을 굳히며 진지하게 말하려고 했을 때였다.
“형! 내일 회의 있다는 거 들었어?”
“어…… 도결이?”
벌컥, 문이 열리고 불청객이 난입했다. 바로 도결이었다.
맥스 브라이언에 의해 정신적 충격을 크게 받았던 도결이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몸을 회복했다. 아무래도 어렸을 때부터 본인의 능력에 시달렸던 경험 때문에 멘탈을 회복하는 것도 빠른 모양이었다.
아무튼, 아무리 형제라지만 이렇게 노크도 안 하고 방을 벌컥벌컥 열고 들어오다니. 도결이에게도 한마디 해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한껏 당황했으나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다시 엄한 표정을 지었다.
“도결아, 아무리 형 방이라지만 그렇게 맨날 막 들어오면…….”
“응? 내일 회의한다잖아. 같이 갈 거지?”
“어……? 어딜 같이 가……?”
“내일 던전 공략 회의!”
“뭐어?”
나는 경악하며 도결이를 내려다봤다. 그러자 도결이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네가 거길 왜 가?”
“당연히 나도 긴눙가가프 던전에 가기로 했으니까.”
“누구 마음대로?”
“내 맘대로.”
“안 돼!”
버럭, 소리를 지른 나는 씩씩거리며 도결이를 노려봤다.
이 어린놈이 어딜 가? 원작의 주인공들도 클리어하지 못한 최후의 던전을 무슨 놀이공원 가는 듯이 말하고 있어?
너무 어이가 없으면 말문이 막힌다고 하던가. 지금 내가 딱 그런 상태였다. 그저 안 된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박윤성 마스터는 된다고 하던데?”
“아니, 그 인간이 진짜……!”
박윤성, 그 인간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혈한 같으니. 얼마 후면 성인이 될 강수현이라면 몰라도 아직 어린 도결이까지 최후의 던전에 밀어 넣는다고? 그게 말이 돼?
당장 가서 따지려고 방을 나서려던 나를 도결이가 붙잡았다. 내 허리를 두 손으로 붙잡은 도결이가 낑낑대며 외쳤다.
“이미 명단에 올려서 못 고쳐! 계약서도 썼단 말이야!”
“야! 형한테 미리 얘길 했어야지!”
“얘기하면 지금처럼 안 된다고 했을 거 아니야!”
“당연하지, 이것아!”
정말이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도결이가 이런 짓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충격이 컸다. 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머릿속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어?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 덴 줄 알아?”
“나도 알아!”
“알면 간다고 하지 말았어야지!”
“그치만 형도 위험한 거 알면서 가는 거잖아!”
“나는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나는……!”
다시 버럭 소리를 내지르려던 나는 도결이의 물음에 순간 멈칫했다.
내가 던전에 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S급 보조 스킬을 가진 내가 가지 않으면 최후의 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아무리 위험하다고 해도 가야 한다.
나에겐 세상을 구한다는 거창한 생각은 없었다. 그저 내가 살기 위해 가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살기 위해 위험한 던전에 자처해서 가려는 거다.
지금까지 그걸 당연하게 생각해 왔으나, 도결이가 묻자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가 가슴 속을 턱하고 막는 것 같았다.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형은 죽을지도 모르는 던전에 가도 되는데, 나는 왜 안 되는데?”
“……도결아.”
“그럼 나는 계속 혼자 기다려야 해? 형이 돌아올 때까지?”
“…….”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채로, 도결이가 나를 노려보듯이 응시했다. 나는 어쩐지 그 얼굴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