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군.”
고급스러운 소파에 앉은 라이수가 느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그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눈썹을 까닥였다.
“그렇게 재촉을 하는데 안 올 수가 있어야지. 원래는 카지노에서 죽치고 있을 예정이었는데.”
강렬한 붉은색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며 남자가 웃었다. 언뜻 천진난만해 보이는 미소였다. 하지만 라이수는 그저 그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맥스 브라이언.
미국 빌런 길드의 수장 격인 수르트 길드의 투자자이자 실질적인 마스터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워낙 귀찮은 일을 싫어해서 일선에 물러나 있다시피 한 것일 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그의 영향력은 굳이 말로 할 필요도 없었다.
눈동자마저 붉은 기가 도는 맥스 브라이언은 성미가 불같이 급한 걸로도 유명했다. 외모만 봐선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할 것처럼 유약하고 선하게 생겼지만 행동거지는 완전히 반대였다. 저 천사 같은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해치니까 말이다.
그야말로 순수한 악. 라이수마저 그를 그렇게 평가하고 있었다. 물처럼 고요하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라이수와 달리 다혈질적인 맥스 브라이언은 다소 섞이기 힘든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게 정말인가?”
“음.”
하지만 맥스 브라이언은 컬렉터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수집벽이 심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흥미로운 정보를 주고 제 입맛대로 이용하는 게 라이수가 터득한 맥스 브라이언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걸 잘 알면서도 매번 라이수에게 낚이곤 했다. 당연히 자발적으로 말이다.
“그래. 얼마 전에 S급 용종 소환수가 인간으로 변했지.”
“오호.”
맥스 브라이언의 눈에 명백한 호기심이 깃들었다. 제 색처럼 붉은 와인을 홀짝이던 맥스 브라이언이 손을 올려 턱을 쓰다듬었다.
“용종을 소환수로 삼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닌데, 인간으로 변하기까지 했다라.”
“‘이쪽 세계’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지.”
“그리고 다른 쪽도 흔한 일은 아니지.”
라이수의 말을 비슷하게 따라 한 맥스 브라이언이 씩 웃었다. 그리고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그가 개입한 일인가?”
“물론.”
라이수는 마시고 있던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갈색빛이 진하게 감도는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얼음이나 물을 전혀 섞지 않은 농도가 진한 위스키였다. 그러나 전혀 취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 라이수의 두 눈은 맑기만 했다.
“그래서, 그 용종을 빼앗으면 내가 가지게 해 줄 건가?”
“할 수 있다면.”
“하하.”
도발적인 라이수의 말에 맥스 브라이언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일부러 자신을 부추기기 위해 하는 말임을 안다. 하지만 알면서도 맥스 브라이언은 이번에도 흔쾌히 낚여 주기로 했다.
“에반이나 시후를 나에게 붙여 줘.”
“뭐, 어렵지는 않은데…….”
“왜? 멍멍이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나?”
“흐음.”
라이수는 술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진한 빛깔의 위스키를 들여다봤다. 그의 새파란 눈이 일렁이는 액체를 응시하다가 말했다.
“뭐, 큰일은 아니고. 약간의 고장 정도?”
“고장?”
맥스 브라이언이 의아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라이수를 응시했다.
“네가 그렇게 허술하게 멍멍이들을 관리할 리가 없는데?”
“나를 너무 높게 평가하는 모양이야.”
헛웃음을 지은 라이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분명 겸손을 떠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묘하게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맥스 브라이언은 픽, 하고 웃으며 와인을 마셨다.
“그래서, 빌려줄 거야, 말 거야?”
“재촉하지 마, 맥.”
친근한 어조로 말을 내뱉은 라이수가 씩 웃었다. 성격이 급한 맥스 브라이언은 이렇게 라이수를 닦달할 때가 많았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라이수는 최대한 느긋하게 굴어서 맥스 브라이언을 안달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보내 줄 수 있어. 이번엔 시후를 내주도록 하지.”
“에반은?”
“그 애는…… 알다시피 좀 거칠잖아.”
“왜? 이번 일은 최대한 조용히 처리해야 하나?”
“후후.”
그 말에 라이수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확실히 라이수 역시 일을 저지른다면 최대한 화려하게 하는 게 좋았다. 일전에 협회 본부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건 막 한국에 도착한 연합이 방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후의 던전 출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은 그들도 잔뜩 날이 서 있을 터였다. 그러니 이번 이벤트는 최대한 방해받지 않고 치르는 게 나았다.
물론 그 사정을 저 다혈질이 잘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뭐, 방식은 네 마음대로 해. 내가 일일이 관여하진 않을 테니.”
“그렇게 말해 주니 더 기대되는걸.”
맥스 브라이언은 버릇처럼 제 입술을 핥았다.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용종 소환수. 아직 어떻게 생겼는진 모르지만 어차피 생김새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미 그 희소한 가치 때문에라도 당장에 잡아다가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끓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 주인도 만만치 않다고 했던가? S급 보조 스킬 때문에 대형 길드가 애지중지한다고 들었는데.”
“한이진 말이지.”
라이수가 즐거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숨길 수 없는 희열을 엿본 맥스 브라이언은 고개를 갸웃했다. 미국에서도 너튜브로 인해 오딘 길드의 능력자들이 꽤 화제가 되긴 했지만, 그는 사람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다지 용종 소환수의 주인을 눈여겨보지는 않았다.
“뭐, 네가 원한다면 겸사겸사 그 주인도 가져다줄까?”
“흐음.”
맥스 브라이언의 말에 라이수는 잠시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눈이 남색으로 보일 정도로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러다 눈을 들어 맥스 브라이언을 응시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그건 이미 충분하거든.”
“그래?”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맥스 브라이언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필요 없다는데 강요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냥 자신의 욕구만 충족하면 될 뿐. 그렇게 생각한 맥스 브라이언은 홀가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또 연락하라고.”
“그러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자 맥스 브라이언은 미련 없이 방을 나갔다. 탁, 하고 닫힌 문을 바라보던 라이수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고삐 풀린 개는 내가 어쩔 수 없겠지.”
어느덧 그의 파란 눈은 기대로 반짝이고 있었다.
***
“네? 저도 팝업 던전에요?”
“그렇습니다.”
갑작스러운 박윤성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얼마 전 강유현이 팝업 던전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그는 내가 착용할 페어 아이템을 찾기 위해 팝업 던전에 들어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숙소 안에서 강유현과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직도 뜸하게 보이는 걸 보니 계속 팝업 던전에 들어가는 것 같은데, 뜬금없이 나도 거기에 가라고? 왜?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박윤성은 내가 아닌 다른 쪽을 쳐다봤다. 바로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용식이였다.
“그건 용식…… 능력자의 훈련을 위해서입니다.”
“훈련이요?”
“네.”
“……?”
그는 온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용식이가 사람으로 변했다는 걸 알아도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던 박윤성이었다. 지금도 용식이를 막 각성한 능력자 취급을 하며 이름을 부르는 게 조금 어색해 보일 뿐, 당황한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해송하의 의견을 전해 들은 박윤성은 흔쾌히 용식이가 각성자 센터에 등록하는 걸 도와줬다. 그리고 가짜 신분까지 만들어 주었다. 용식이는 현재 내 양아들로 입적한 상태였다. 그 과정이 물 흐르는 듯이 자연스럽게 진행되어, 혹시 박윤성이 미리 이 일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기가 막힌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딘 길드의 전력을 위해서였다. 용식이는 사람으로 변했어도 여전히 S급이었다. 박윤성은 약삭빠르게 인재를 놓치지 않으려 한 것이었다.
어쨌든 박윤성이 그렇게 한 덕분에 나와 용식이에게도 도움이 되긴 했다. 각성자 등록이나 신분뿐만이 아니고 각종 교육까지 길드에서 풀 케어로 지원해 주고 있으니 말이다.
나와 이든, 그리고 도결이처럼 용식이 역시 오딘 길드와 임시 계약을 맺었다. 박윤성은 은근히 오딘 길드에 우리 모두 정식으로 가입하길 원하는 것 같았지만……. 왜인지 대답하기가 좀 꺼려졌다. 아직 아스가르드의 신들 중 누가 나에게 우호적이고 적대적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후의 던전을 클리어하고 난 다음에 차근차근 알아보는 게 좋겠지. 국내 길드가 아니면 외국 길드에서 보금자리를 찾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면 아예 독립을 하는 것도 괜찮겠지. 라우페이 길드만 어떻게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박윤성에게 질문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박윤성도 생각에 잠겨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용식이를 보며 침묵하고 있었다. 이윽고 박윤성이 입을 열었다.
“훈련이라고 하기보다는 레벨 업에 가깝겠군요. 게임을 하던 능력자들 사이에서는 ‘버스를 탄다’라고 얘기하던가요.”
“아아, 버스.”
나도 이곳에 빙의하자마자 했던 일이었다. 능력자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본인의 레벨과 능력치를 올리는 건 중요한 일이다. 나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박윤성을 보며 물었다.
“그럼 버스는 누가 태워 주는데요?”
“적합한 인재가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
설마 내가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겠지?
온화하게 미소 짓고 있는 박윤성을 보며 등에서 땀이 주륵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