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13. 예상치 못한 일
아이는 말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용식이가 있던 자리였다. 나는 놀란 얼굴로 아이를 내려다봤다.
“누구……?”
“…….”
내 물음에 아이는 왜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왜 그런 걸 묻냐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저 순해 보이는 아이를 빤히 보다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설마, 용식인가?
생전 처음 보는 아이가 용식이일 리가 없는데,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주변을 흘끗 곁눈질했다. 방 안에 용식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용식이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대신 이 꼬맹이가 있다. 판타지 세상인 이곳에서 내 의심은 꽤 합리적이었다.
용식이가 인간이 되었다.
순간 스바르트알파헤임 던전에서 만난 용종인 파프니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 폴리모프한 동족이 아니었구나.’
폴리모프란 판타지 소설에서 드래곤이 인간으로 변할 때 쓰는 마법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런 말을 한 파프니르 역시 처음 봤을 땐 감쪽같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야 본모습을 드러냈었지. 그의 본체는 던전의 구역 한쪽을 꽉 채우는 아주 거대한 드래곤이었다.
“…….”
눈앞의 아이는 조그마했다. 용식이가 아직 성체가 아니기 때문에 폴리모프한 모습도 작은 아이의 모습인 것 같았다. 나는 확신을 담아 다시 입을 열었다.
“……용식아?”
“꺄…… 우……?”
평소처럼 소리를 내려던 용식이는 기쁜 얼굴로 외치다가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자신의 목 부근을 불편한 얼굴로 매만졌다. 그러더니 제 손과 몸을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이크, 옷을 먼저 입혀야지.”
“……?”
용식이는 지금 알몸인 상태였다. 폴리모프할 때 옷은 만들 수 없는 건가? 아니, 다른 용과 달리 용식이는 아직 어려서 스킬 활용이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끙, 하고 속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아이 옷을 얻을 수 있을까? 어차피 용식이가 사람으로 변했다는 건 오딘 길드에 알릴 수밖에 없긴 한데. 다들 자는 시간에 깨워서 아이 옷을 마련해 달라고 하는 건 좀…….
나는 용식이를 흘낏 쳐다봤다. 겉으로 봐서 나이는 대략 여덟? 아니면 열 살쯤 되었을까. 딱 초등학생들이 이 정도 크기일 것 같은데. 그나마 용식이의 몸이 아주 작았던 것에 비하면 인간의 몸은 좀 더 큰 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작긴 하다. 도결이 옷도 맞을 것 같지 않았다. S급으로 각성한 도결이는 하루가 다르게 몸이 커지고 있었다. 차라리 날이 밝을 때까지는 내 옷을 걸치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디 보자…….”
옷장으로 다가간 나는 치수가 좀 작은 흰색 면티와 바지를 꺼냈다. 바지는 꺼낼까 말까 하다가 일단 가져왔다. 우선은 흰색 반팔 면티부터 용식이에게 입혀 보기로 했다.
“자, 용식아. 이거 입자.”
“……?”
그러나 용식이는 명백히 경계하는 얼굴로 면티를 빤히 쳐다봤다. 그걸 보니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다. 무스펠헤임 던전에서 더위에 지친 내가 면사포처럼 생긴 천을 뒤집어쓰자 용식이가 장난감인 줄 알고 환장하며 달려들었던 때 말이다.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옷을 응시하는 용식이의 눈이 그때처럼 초롱초롱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불안함은 곧 현실이 되었다.
“꺄우!”
“이 녀석!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물지 마! 놔!”
용식이는 환장하며 티셔츠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손발을 바동거리며 사납게 티셔츠를 물어 댔다. 나는 식겁하며 용식이에게서 티셔츠를 뺏으려고 했다.
“헉, 헉…… 죽겠다.”
“꺄우우……?”
한참 후, 나는 진이 빠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큰 사이즈의 반팔 면 티셔츠를 어색하게 입은 용식이가 또 고개를 갸웃했다. 역시 바지는 가져올 필요도 없이 반팔 면티 한 장만으로 용식이의 작은 몸이 가려졌다.
아침이 되자마자 박윤성에게 말해서 용식이 치수에 맞는 옷을 받고, 그리고 해송하도 부르자. 다른 소환수에게는 이런 일이 없는지, 그리고 정말 용식이에게 아무 문제가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꺄우, 우…….”
“불편하니?”
옷을 입은 용식이는 연신 안절부절못했다. 눈으로 보는 제 모습도 낯선데, 옷까지 입으니 정말 불안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손을 들어 입고 있는 티셔츠를 박박 긁는 용식이를 말리며, 원래 그랬듯 용식이의 몸을 끌어당겨 품에 안겼다.
“쉬, 괜찮아. 아빠가 옆에 있잖아. 응?”
“우우…….”
인간으로 변한 용식이는 조금 더 커졌지만, 그럼에도 작고 따뜻했다. 품에 안으니 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느낌이 들었다. 딱딱한 비늘과 가시 때문에 이렇게 힘을 줘 안지는 못했는데, 지금은 인간의 부드러운 피부를 가지고 있어 마음껏 안을 수가 있었다.
“아이는 체온이 높구나…….”
나는 멍하니 중얼거리면서 용식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품에 안긴 용식이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꺄우우, 꺄우…….”
“그래, 그래. 이제 자자.”
“삐? 삐이?”
“용순이도 재워 줄게.”
모습이 바뀐 용식이에게 선뜻 다가오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던 용순이도 이제 졸린 지 작은 발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원래는 전용 자리에 방석을 깔고 용식이와 용순이를 재운 후 나만 침대에서 잤는데, 오늘은 그러기가 좀 불안했다. 용식이가 인간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하는 수 없이 용식이와 용순이를 데리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이제 용식이가 잘 수 있는 침대도 하나 더 들여와야 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 침대는 좁으니까 말이다. 혼자 자기에는 꽤 넓긴 하지만, 큰 걸로 바꿀 바에는 용식이 전용 침대를 하나 더 들이는 게 낫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용식이와 용순이를 재우던 나도 까무룩 잠이 들었다.
***
“헉, 저, 정말이네요?”
내 연락을 받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온 해송하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마침 던전 파견 중이 아니라서 해송하는 예상보다 빨리 숙소를 방문했다. 용식이를 교육할 때는 거의 매일 왔었는데, 그러고 보니 해송하의 방문도 꽤 오랜만이었다.
사람이 된 용식이를 보며 해송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 연락을 받았을 때만 해도 설마 하는 생각을 했었던 건지 지나치게 놀라고 있었다.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말이다.
“그래 봤자 파충류는 파충류지.”
“교육부터 다시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쓸데없는 시간 낭비야.”
“…….”
쓸데없는 건 네놈들이다. 이 고등급 능력자 놈들아. 나는 속으로 욕을 하며 이를 갈았다.
데자뷔가 느껴졌다. 이놈들은 예전에 용식이가 해송하에게 교육을 받을 때도 우루루 몰려나와 내 속을 뒤집어 놓곤 했지. 정말이지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너희들 그렇게 할 일 없어?”
“무슨 소리야. 나야 네 옆에 꼭 붙어 있는 게 할 일이지.”
“뭐래.”
이든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강수현이 보였다. 쟤는 뭐가 그렇게 걱정인지, 혼자서 시종일관 심각해 보였다.
“어쩌면 저건 진짜 용식이가 아니라 외계 생물 같은 거 아닐까요?”
“뭐어?”
“진짜 용식이는 이미 없고, 가짜가 있는 거면…….”
“에휴.”
더 들어줄 가치도 없었다. 쟤는 게임 좀 그만하게 해야겠어.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강수현을 외면했다. 그러자 조금 떨어진 곳에 멀뚱하게 서 있는 강유현이 보였다. 쟤는 다른 놈들과 다르게 외출복을 입고 있는데, 어디 나가려는 중이었나?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강유현에게 물었다.
“너 어디 가?”
“…….”
강유현은 나를 빤히 보다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는 그다지 강유현에게서 위압감을 크게 느끼지 않았지만, 그래도 습관적으로 남아 있는 건지 몸이 움찔 떨렸다. 내 앞에 선 강유현은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오딘 길드가 관리하는 팝업 던전에 다녀온다.”
“뭐? 왜?”
팝업 던전이란, 예전에 서울 한복판에서 갑자기 열린 게이트처럼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해 두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열리는 던전을 말했다. 약간 게임으로 치면 이벤트성으로 열리는 던전인지라 다른 던전에 비하면 공략이 빠른 편이었다. 하지만 도심 한복판에 열릴 수도 있기 때문에 한때는 골칫거리였던 모양이었다.
지금은 협회와 길드에서 마력 수치를 조사해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미리 알아내서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공대가 갈 정도의 던전이 아니면 강유현이 굳이 갈 필요는 없을 텐데. 무슨 일로 간다는 거지. 의문 섞인 내 얼굴을 보며 강유현이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했다.
“누가 페어 아이템을 개 목걸이 같다고 해서 말이지.”
“…….”
“좀 더 평범한 걸로 얻을 생각이다.”
그건……!
아니, 그게 내 탓이냐? 솔직히 누가 봐도 착용하기 싫은 모양 아닌가? 그런데 나를 까탈스러운 사람이라는 듯이 모함하다니. 나는 흥, 하고 콧방귀를 끼며 강유현을 외면했다.
“그래, 잘 다녀와라.”
내 말에 강유현은 곧바로 몸을 돌려 척척 걸어갔다.
아무래도 저 집념으로는 멀쩡한 페어 아이템을 금방 찾아낼 것 같은데……. 주인공 버프로는 뭔들 못할까. 꼼짝없이 페어 아이템에 구속될 미래가 보여 암담한 한숨을 내쉬었다.
“용식아, 자. 따라 해 봐. 형!”
“혀……언?”
“아니, 아니. 형! 혀엉!”
“……!”
도결이는 용식이를 보자마자 말을 가르친다고 분투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말이라고는 전혀 하지 못하던 용식이가 드디어 도결이의 말을 조금은 따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얼른 용식이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