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그리고 여긴 어떻게 온 거지?”
“어…….”
“너도 내 보물을 노리고 온 거냐?”
“…….”
남자가 한 말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동족, 냄새, 폴리모프, 그리고 보물.
무엇보다 눈앞에서 반짝이는 붉은 상태 창.
「악룡 파프니르」
드워프가 말했던 악룡이 눈앞의 이 남자고, 남자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하고 있는 드래곤이다. 내 몸에 묻어 있는 용식이와 용순이의 냄새 때문에 같은 드래곤인 줄 착각하고 다가왔던 것이고.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뒤로 또 물러났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드래곤에게 붙잡혔다.
“윽……!”
“흠, 얼마 전에 도망친 쥐새끼가 데려온 건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드래곤은 짐작만으로 정답을 술술 말했다. 입술을 깨물며 내 손을 단단히 붙잡은 드래곤을 노려봤다.
수면기라며……! 자고 있을 거라며……!
해맑은 얼굴로 그런 말을 지껄인 드워프를 떠올리며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자백 포션으로 뱉은 말이니 거짓말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드워프 스스로 그게 거짓인지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드래곤은 일부러 드워프를 놔주었고, 도망친 드워프는 드래곤이 자고 있기 때문에 도망칠 수 있었다고 굳게 믿은 것이다.
그런데 왜? 드래곤은 왜 드워프를 풀어 준 거지?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왜 그런 귀찮은 짓을…….
“……!”
설마 일부러 드워프를 놓아줬던 건가? 동료를 데려오면 한꺼번에 잡기 위해서? 나는 경악한 눈으로 드래곤을 쳐다봤다.
“그런데 너희들, 그 쥐새끼들이랑은 생김새가 다른데…….”
“윽…….”
“설마 진짜 인간인가?”
드래곤이 놀란 얼굴로 내 몸을 쭉 훑었다. 그 시선에 소름이 끼쳤다. 가까이서 보니 남자의 까만 눈은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색깔만 사람과 비슷할 뿐, 고양잇과나 파충류의 눈과 비슷했다. 이질적인 눈을 마주하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흠. 인간이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을까.”
“젠장.”
“얼마 전부터 묘하게 시끄럽더니, 인간들이 들어왔기 때문이었군. 귀찮게…….”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린 드래곤의 시선은 제법 매서웠다. 그리고 나는 몬스터로 분류되는 드래곤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대화하는 상황에 무척 당황하고 말았다.
던전 안의 보스 몬스터들이 가끔 말을 하긴 했지만, 그건 마치 게임 속 보스몹의 대사 같은 부자연스러운 말이라 대화한 거라고 인식하긴 힘들었었다.
하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니. 소설에서도 이런 몬스터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읽었던 부분에선 말이다.
혹시 이건 스바르트알파헤임 던전의 숨겨진 설정인가? 내가 원작과 다른 선택을 하도록 유도했기 때문에 나온 오류 같은 건가? 아니면 내가 읽지 못한 부분에서는 이런 장면도 나왔던 건가?
혼란으로 가득 찬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드래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이 자리에서 처리해야…… 아니, 가만.”
“……!”
“내 보물을 훔치러 온 게 이 녀석 말고도 더 있을 수 있는 거잖아.”
“…….”
흠, 하고 드래곤은 생각에 잠겼다. 저 드래곤이 잠든 척하고 드워프를 놓아줬던 건 다른 침입자들을 이곳으로 꾀어내기 위한 거였다. 순간 전설급 무기를 가지러 갔던 도결이와 이든이 떠올랐다. 녀석이 두 사람의 기척을 느끼기라도 한다면 곤란했다.
“저기, 혹시 여기 온 동료들을 데려오면 저는 풀어 줄 수 있나요?”
“뭐?”
“저는 보물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저놈 잡으러 왔던 건데요.”
“……?”
나는 손가락으로 조슈아 레만을 가리켰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조슈아 레만 역시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내가 대놓고 자신을 가리키자 기겁하며 소리쳤다.
“뭘 하려는 거냐, 한이진!”
“뭘 하긴. 너랑 네 동료들을 팔아넘기려는 거지.”
“호오?”
드래곤은 내 말에 흥미를 느낀 듯 턱을 쓰다듬었다. 나는 조슈아 레만이 어이없어서 말문이 막힌 틈을 타 계속 말을 이었다.
“저놈 동료들이 여기 많이 와 있거든요. 제가 위치를 알려 드릴 수…… 아니, 이곳으로 오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
“네.”
“내가 너를 어떻게 믿고?”
“그건…….”
솔직히 처음 보는 사람을 어떻게 믿겠어, 그냥 우기고 보는 거지.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뭐, 밑져야 본전 아니겠습니까? 제가 거짓말해 봤자 드래곤인 당신께서 손해 볼 일도 없을 테고요.”
“흠…… 그렇긴 하지.”
“…….”
나는 어떻게 해서든 눈앞의 드래곤과 리암 화이트를 마주치게 할 속셈이었다. 조슈아 레만의 구속은 절대로 풀어 줄 수 없고, 대신 리암 화이트와 만나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지. 나 혼자서는 S급 이상으로 보이는 몬스터를 상대할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드래곤이 아플 정도로 꽉 잡고 있던 내 팔을 놓았다. 그제야 손목에 피가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팔을 놓자마자 드래곤의 시선이 내가 들고 있는 포션에 닿았다.
“근데 아까부터 뭘 들고 있는 거지?”
“아, 이거요?”
조슈아 레만에게 먹이려고 했던 포션을 당황한 눈으로 쳐다봤다. 이건 솔직하게 말해도 될 것 같았다. 어차피 조슈아 레만과 적대 관계라고 밝혔으니까, 괜히 거짓말을 하면 더 의심받을 터였다.
“저놈에게 먹이려고 했었습니다. S급 자백 포션이에요.”
“……자백 포션?”
“네, 이걸 마시게 하면 어떤 질문에도 솔직하게 대답해야 하거든요.”
“그런 걸 왜 저놈에게 마시게 하는 건데?”
“…….”
이 드래곤은 왜 이렇게 궁금한 게 많지? 그리고 보통 자기 집을 침범한 상대에게 이렇게 꼬치꼬치 캐묻나?
아니면 강자의 여유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언제든 상대를 밟아 죽일 수 있다면 급하지도 않을 테니까. 다 잡은 사냥감을 천천히 가지고 놀다가 죽이는 고양이의 심정 같은 걸 수도 있었다.
잠시 섬뜩한 생각을 한 나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조슈아 레만에 대해 말했다.
“저놈이 제 동료인 척을 하다가 배신했거든요.”
“큭…….”
내 말에 조슈아 레만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딱히 반박은 하지 못했다. 그리고 드래곤은 그 모습을 흥미로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군. 아주 나쁜 놈이었군.”
“……제 말을 믿는 겁니까?”
“음, 너한테 동족의 냄새가 강하게 나서 그런가. 사실 묘하게 설득력을 느껴.”
“…….”
그건 나한테 좋은 건가?
하지만 내가 동족인 어린 애들을 소환수로 부리고 있다는 건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겠지?
일단 그 사실은 숨겨야겠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래서 이 포션을 먹여 자백을 받아 내려고 했을 때 당신이 온 겁니다.”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드래곤의 얼굴은 꽤 자비로웠다. 그가 말한 대로 동족의 냄새가 나는 나에게 조금은 친근함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이 숙소에 놔두고 온 용식이와 용순이가 생각났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숙소 안에서 둘과 하루 종일 뒹굴었던 게 도움이 될 줄이야.
눈앞의 드래곤은 언제라도 나를 찢어 죽일 수 있다. 등급 확인이 되지 않는 것만 봐도 힘의 차이는 명백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죽이는 대신 미끼로 삼아 탐사팀 전체를 꾀어내려고 하기 때문에 가만히 놔두고 있는 거였다. 나는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드래곤의 선선한 태도에 순간 풀어지려던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흥미로워.”
“네?”
“인간들은 항상 쓸데없는 것 같으면서도 기발한 걸 잘 만든단 말이지. 자백 포션이라니.”
큭큭, 낮은 웃음을 흘린 드래곤이 손을 뻗었다. 나는 멀뚱한 표정으로 드래곤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쳐다봤다.
“줘 봐. 내가 마시게 할 테니.”
“어…… 정말요?”
“그렇다니까.”
“…….”
드래곤이 불량한 태도로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슬쩍 포션을 건네주었다. 드래곤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이걸 마시게 하면 되는 거지?”
“네, 뭐…….”
“알았어.”
“크윽.”
조슈아 레만에게 다가간 드래곤은 그의 입에 다짜고짜 포션을 처넣었다. 강유현이 한 것보다도 더 박력 있는 몸짓이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쳐다봤다.
“읍……!”
“자자, 흘리지 말고 다 마시라고.”
친절하게도 조슈아 레만의 머리까지 뒤로 휙 젖혀서 흘리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S급인 조슈아 레만이라고 할지라도 구속된 상태에서 같은 고등급(추정)의 손길은 뿌리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허억, 헉…….”
“다 마셨다.”
포션의 빈 통을 휙 내던진 드래곤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슈아 레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조슈아 레만?”
“으…….”
조슈아 레만은 드워프가 포션을 마신 후에 보였던 것처럼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와 똑같이 어지럼증이라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강유현이 그랬던 것처럼 기다리지 않고 그를 재촉했다.
“조슈아 레만. 대답해라.”
“으…… 네…….”
왜냐하면 자백 포션은 마신 직후에 효과가 제일 강하기 때문이었다. 고등급 능력자의 의지를 상실시키고 억지로 대답을 강요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이 황금 같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당신의 뒤에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말해.”
“그건…….”
“그건?”
조슈아 레만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곧 그의 입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걸 들은 내 눈이 크게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