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하지만 큰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말에 능력자들은 억지로 화를 억눌렀다. 어이없어하는 능력자들을 마주한 드워프의 주름진 얼굴이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저나 악룡이라. 내가 알기로 스바르트알파헤임 던전의 보스 몬스터는 용종이 아니었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다른 동물 형태의 몬스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렇다면 악룡은 대체 뭐지? 네임드 몬스터는 아닌가? 하지만 무려 전설급 무기를 가지고 있는 몬스터다. 네임드가 아닐 리 없을 텐데.
“음…….”
고민하던 나는 일단 드워프의 뒤를 따라가기로 했다. 불편함을 내보였던 능력자들도 이제 와서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으니 순순히 드워프의 뒤를 쫓고 있었다. 괜히 몬스터와 마주칠 필요는 없으니 모두 입을 다물어 조용하기만 했다.
마치 도둑이라도 된 것처럼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걷던 중, 앞에서 걷던 드워프가 갑자기 우뚝 멈췄다. 덩달아 능력자들도 모두 멈춰서 드워프를 쳐다봤다.
“……!”
뒤를 돈 드워프는 말은 하지 않고 입만 벙긋거렸다. 대충 이곳이라는 뜻인 것 같았다. 그에 능력자들의 시선이 드워프의 손끝을 향했다.
“……?”
또 막다른 곳이잖아?
하지만 이미 한 번 겪었던 일이기 때문인지 능력자들은 조금 놀라다가 다시 평정심을 유지했다. 어딘가에 또 길이 있겠지. 그런데 드워프는 제자리에 선 채로 또 입을 벙긋거리기만 했다.
“……?”
무슨 말 하는 거야? 이번에는 벙긋거리는 게 너무 길어서 도무지 어떤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눈치 빠른 다른 능력자들도 마찬가지인지 하나같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옆에서 차분한 음성이 들렸다.
“이 근처 소음을 차단했으니 말해도 된대요.”
“읍……!”
“아.”
이든이 바람 능력을 써서 소음을 차단한 모양이었다. 그런 기특한 짓을 하다니. 조금 의외였다.
그럼에도 정작 본인은 여전히 말을 하지 못했다. 이든은 이 정도 했으면 스킬을 풀어 달라는 뜻으로 도결이를 맹렬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도결이는 그런 이든을 상큼하게 무시했다.
“하지만 A급 스킬이라 혹시 몰라요. 다들 조용히 말하세요.”
“후, 다행입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드워프가 식은땀을 닦았다. 그리고 능력자들을 돌아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밑으로 내려가면 악룡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설급 무기도 그 근처에 있고요.”
“뭐라고?”
드워프의 말에 능력자들은 또다시 혼란을 느꼈다. 결국은 그 악룡과 마주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악룡과 전투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 악룡이 S급 이상의 중간 보스 몬스터라면 이 인원으로는 공략하기 힘들 수도 있었다. 얼굴을 찌푸린 조슈아 레만이 드워프를 향해 물었다.
“그 악룡의 등급은?”
“네? 등급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하아…….”
“……?”
아무래도 등급 같은 건 능력자들에게나 보이는 모양이었다. 드워프는 시스템상 같은 몬스터로 분류되는 데다가 등급도 낮으니 더욱더 악룡이라는 몬스터의 등급을 보긴 힘들었겠지.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눈을 동그랗게 뜬 드워프를 남겨 두고, 능력자들끼리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
“그냥 싸울까요?”
“어떤 몬스터일지도 모르는데 이 인원으로 무작정 싸우는 건 좀…….”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공대를 끌고 다시 와요? 아직 전설급 무기가 정말로 있는지 확인도 못 했잖아요.”
“으음…….”
저마다 의견을 내놓았지만 이렇다 할 결과는 나지 않았다. 네임드로 추정되는 몬스터와 싸울 걸 각오하고 계속 탐사할지, 아니면 이렇다 할 정보나 소득도 얻지 못한 채 공대로 귀환할지. 우리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이 둘뿐인 것 같았다.
그때였다.
“저…… 굳이 악룡과 싸우지 않아도 되는데요.”
“……?”
그건 또 무슨 말이냐.
능력자들은 이젠 어이없다는 눈으로 드워프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드워프가 쩔쩔매며 대답했다.
“그게, 악룡은 한번 잠들면 잘 일어나지 않아서……. 지금 수면기 시기이기도 하고요. 날랜 분들이 몰래 들어가서 가져오면 아마 모를 겁니다, 네.”
“…….”
그걸 진작 말하라고……!
또다시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능력자들이 얼굴을 구겼다.
하지만 그럼에도 드워프의 말에는 탐탁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앤드류 베일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하지? 함정 아닌가?”
“함정이라뇨. 그래서 저도 무사히 빠져나온걸요. 그리고 보십시오. 팔찌도 멀쩡하지 않습니까.”
“음…….”
드워프의 말대로 팔찌는 여전히 멀쩡했다. 그 팔찌를 직접 채운 게 리암 화이트이고, 팔찌가 발두르 길드의 것이니 앤드류 베일리도 더는 뭐라고 하지 못했다.
“그럼 누가 내려갈지 정해 볼까요?”
“…….”
재미있다는 듯이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리암 화이트를 앞에 두고 능력자들은 침묵했다. 당연히 누구도 자진해서 내려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우선은 저랑…….”
“안 돼.”
“왜?”
“대체 무슨 말 하는 거야, 리암.”
당연히 내려가는 인원에 자신을 포함시킨 리암 화이트는 앤드류 베일리가 말리자 눈을 크게 떴다.
“넌 은신 스킬도 뭣도 없잖아. 당연히 내가 내려가야지.”
“그런 즐거운 일을 너 혼자 하겠다고?”
“아니, 그리고 너는…… 아이고, 진짜.”
장차 발두르 길드의 마스터가 될 인물일뿐더러 세계적인 거대 기업을 물려받을 사람을 주변에서 순순히 위험한 일을 하게 둘 리가 없었다. 하지만 리암 화이트도 만만치 않은 성격이라 그런지 앤드류 베일리가 무척 난감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더 문제는 앤드류 베일리의 행동을 다른 능력자들이 곱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중에서 자기 목숨 소중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남보다 중요한 위치의 인물이라고 해서 가지 말라고 말리는 게 그다지 좋은 일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앤드류 베일리는 더욱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대놓고 리암 화이트를 말리지도 못하고 한숨을 내쉬며 이마만 짚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많은 인원이 내려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
내가 앞으로 나서며 말하자, 능력자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나는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악룡이 잠들어 있다고 한 말이 진짜니까, 네임드 몬스터와 마주칠 확률은 낮을 테니 소수의 몸이 빠른 능력자들 위주로 내려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음…….”
내 말에 일리가 있는지 능력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전히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앤드류 베일리가 입을 열어 물었다.
“만약 그 악룡이 깨어나기라도 하면요?”
“그럼 피해야죠.”
“S급 이상의 네임드 몬스터라면 쉽게 피할 수 없을 텐데요?”
“그래도 피해야죠.”
무덤덤하게 대답한 나는 인벤토리를 뒤졌다. 그리고 무언가를 꺼내 능력자들에게 내밀었다.
“이건……!”
“이채진의 포션입니다.”
이채진이 후에 제작할 획기적인 포션은 내 보조 스킬과 결이 비슷했다. 하지만 이채진의 포션은 모든 능력치를 올려 주는 것이 아니라 스킬 숙련도를 위주로 올려 준다. 말하자면 내 보조 스킬의 하향 버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무척 유용한 포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직 완성 단계가 아니긴 하지만, 지금의 내가 대놓고 정체를 드러내 보조 스킬을 걸어 줄 수 없으니 포션을 제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샘플이라고 해도 그 이채진이 만든 포션이다. 효과는 확실할 게 분명했다. 내 설명에 능력자들의 눈이 커졌다.
“딱 세 병 있으니 세 분이 내려가면 되겠네요. 회피나 은신, 방어 스킬을 가지고 있는 능력자들 위주로요.”
“…….”
그러자 능력자들끼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서로 어느 정도는 스킬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아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서로 일부러 숨기는 스킬은 한두 개씩 있기 마련이었다.
“젠장.”
반면에 리암 화이트는 꽤 심통이 난 얼굴이었다. 회피나 방어 스킬이 없다는 걸 비서인 앤드류 베일리가 잘 알고 있으니 우길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다들 내려가기 싫어하는데 자기는 못 가서 안달이라니. 역시 특이한 성격이었다.
“저랑 이 분홍 머리가 갈게요.”
“……!”
“분홍 머리는 회피 스킬이 있고, 저는 정신계 스킬 가진 능력자예요.”
도결이가 이든을 가리키며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깜짝 놀라며 도결이를 쳐다봤다.
안 돼……!
순간 그렇게 소리칠 뻔했다. 하지만 겨우 입을 다물었다.
“딱 좋은 조합이긴 하군요.”
“다른 한 명은 탐지 스킬을 가지고 있으면 완벽하겠어요.”
“…….”
마치 확정이라는 듯이 말하는 능력자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도결이와 이든이 내려가게 될 줄이야.
“하지만 한도결 능력자는 던전 경험이 없는데 괜찮을까요? 차라리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아니, 그래도 그쪽은…….”
한 능력자가 거북한 눈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스스로 등급을 밝히진 않았지만 수거팀의 능력자라는 것만으로도 낮은 등급의 능력자라는 걸 밝힌 꼴이었다.
와, 진짜 확 뒤엎어 버리고 싶다. 전설급 무기고 뭐고 일단은 난리를 쳐서 도결이를 붙잡아 두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머리에 한창 열이 올랐을 때였다.
“……?”
“…….”
소매를 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도결이가 말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