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후…….”
남아 있던 몬스터를 해치운 나는 숨을 돌리며 총을 내려놓았다.
그나마 도결이가 정신 지배 스킬로 몬스터들끼리 싸우게 해서 수를 줄여 놓았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나 혼자서 해치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때마침 중간 보스 몬스터를 해치웠다는 시스템 음성이 들렸다.
[스바르트알파헤임-S666의 중간 보스 몬스터 ‘탐욕스러운 게로니르’를 처치하였습니다. 아이템이 귀속됩니다.]
“타이밍 참…….”
죽여주네, 라고 말하려 했지만 뒷말을 잇지 못했다.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아 거칠게 몸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너…… 뭐야?”
“어?”
이든이었다. 눈살을 찌푸린 그가 내 팔을 으스러트릴 듯이 잡으며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설마 내가 누구인지 알아낸 건가? 이채진의 포션으로 나는 겉모습뿐만이 아니고 목소리까지 미묘하게 달라졌다. 외형만 바꿔 주는 아이템과는 다르게 완벽하게 타인의 모습을 유지시켜 주는 게 이채진의 포션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알아낸 거지?
놀라서 그저 눈만 깜박거리고 있자, 이든이 재차 입을 열었다.
“너 뭔데 이진이랑 똑같은 총 써? 누구야, 너?”
“아…….”
나를 알아본 게 아니라 총을 알아본 건가?
하여간 쓸데없이 눈썰미는 좋아선…….
속으로 혀를 쯧, 차고는 팔을 털어 내 이든의 손을 뿌리쳤다. 기왕 변장하고 있는 거, 들키지 않도록 적당하게 연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무슨 소리예요? 이거랑 똑같은 무기가 얼마나 널렸는데.”
“아니, 그래도…….”
“우연히 제작자가 똑같았나 보죠. 저는 이거 마켓에서 중고로 싸게 산 거라고요.”
“…….”
시치미를 뚝 뗐지만, 그래도 이든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는 변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뭔 무기가 똑같다고 처음 보는 사람을 추궁하고 있어? 아니면 그냥 시비 걸고 싶은 것뿐인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몸을 돌렸다.
“형…….”
“……!”
도결이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몸이 굳었다.
눈이 마주치자 도결이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도결이야말로 나를 알아본 건가?
침을 꿀꺽 삼키는데, 도결이가 먼저 고개를 휙 돌렸다.
뭐지? 알아본 게 아닌가?
도무지 알 수 없는 행동에 서서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아.”
방금 결계 안에서 나에게 청삼환을 주려고 했던 능력자였다. 다친 곳이 없는지 내 몸을 눈으로 쭉 살핀 그가 안도한 얼굴을 했다.
“와, 정말 대단하네요. 무기 등급이 엄청 높나 봐요. 아니면 공격 스킬 등급이 높은 건가요? 전투 부대 쪽으로 배치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뇨, 아닙니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에 머리가 어질거렸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리는 눈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몬스터들이 무기랑 상성이 잘 맞았어요. 아니면 힘들었을걸요.”
“아…… 그래요?”
능력자는 여전히 미심쩍은 눈을 하고 있었으나, 내가 뻔뻔하게 계속 우기자 뭐라고 더 말하지 못했다.
곧 전투가 끝난 고등급 능력자들이 이든과 도결이를 발견하고 몰려들었다.
“너희가 여기엔 왜 왔지?”
“…….”
강유현이 추궁하며 두 사람을 쳐다봤다.
이제 내가 사라졌다는 걸 강유현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공략을 잠시 멈추고 나를 찾으려 하지 않을까?
그러면 꼼짝없이 들키게 될 것 같은데. 그냥 지금 자수하는 게 신상에 더 이로울지도 모른다.
포기한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을 때였다.
“그냥, 던전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요.”
“뭐?”
“야!”
도결이의 말에 강유현은 황당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고, 이든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도결이의 눈길 한 번에 이든은 입을 딱 닫았다. 그럼에도 불만스러운 표정은 숨길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한이진을 두고 네가…….”
“형은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강유현의 매서운 시선이 무서울 텐데도 도결이는 제법 의연하게 받아쳤다. 아무리 꿀잠 아이템의 효과로 강유현이 안정되어 있다고 해도, 그새 강유현을 똑바로 마주할 정도로 성장한 도결이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래도 더 얘기하면 큰일 날 것 같은데. 도결이의 손이 점점 떨리고 있었다. 보다 못한 내가 다시 나서려고 했을 때였다.
“여기 몬스터가 숨어 있었습니다!”
“헉……!”
중간 보스 몬스터를 처치한 곳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대치하고 있던 강유현과 도결이가 고개를 돌렸다. 나 역시 소란이 일어난 곳을 쳐다봤다.
“……!”
환상에서 봤던 그 몬스터였다. 그때 봤던 것처럼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 엎드려서 덜덜 떨고 있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제발 살려 주세요!”
“몬스터가 말을……?”
공대가 경악하며 모여들었다. 개중에는 몬스터에게 경계심을 가진 자도 있었고, 호기심을 가진 자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부정적인 시선으로 몬스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는 악룡에게 붙잡힌 한낱 드워프일 뿐입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드워프……?”
자신을 드워프라고 밝힌 몬스터의 말에, 나는 얼른 아이템을 써서 열람했다. 만약 같은 사람이면 상태 창이 초록색으로 뜰 것이고, 몬스터라면 붉은색을 띨 것이다.
「지나가던 선량한 드워프
등급: C
레벨: 21
악룡에게 붙잡힌 선량한 드워프.
그는 악룡의 비밀을 알고 있다.」
“…….”
아니, 분명 선량한 드워프인데 왜 상태 창은 몬스터처럼 붉은색을 띠는 거지? 이러면 몬스터라고 오해해서 죽여도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상태 창 색이랑 쓰여 있는 글의 괴리감이 엄청난데?
단순히 종족이 다르기 때문인가? 게임이 아니니까 NPC 같은 개념은 없는 거겠지. 타 종족은 무조건 적으로 인식해서 붉은색으로 나타나는 건가.
“제가, 악룡이 숨겨 둔 보물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거기엔 분명 저, 전설급 무기도 있었습니다!”
“뭐라고?”
드워프가 한 말로 공대가 술렁거렸다. 전설급 무기라는 단어에 능력자들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정말인가?”
“…….”
아, 여기서부터 환상으로 보여졌던 부분이다. 나는 긴장하며 드워프와 강유현을 응시했다. 바닥에 이마가 닿을 정도로 엎드린 드워프가 벌벌 떨며 외쳤다.
“네, 정말입니다. 저는 결코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몬스터들처럼 상태 창이 붉어서는 그 말에 신뢰가 가지 않는다니까. 답답함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아마 이 타이밍쯤에…….
“몬스터가 하는 말 따위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습니다. 당장 처리하죠.”
“…….”
나왔다. 이 드워프를 처리하자고 주장했던 능력자들. 처음은 분명 우르 길드의 마스터, 조슈아 레만이었다. 환상과 똑같이 흘러가는 모습에 긴장하며 상황을 주시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형.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
강수현도 앞으로 슬쩍 나서며 말했다. 고등급 능력자 중 두 명이나 부정적인 의견을 말하니, 강유현 역시 고민하는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가.”
“……!”
지금의 강유현은 환상 속과 달리 안색이 나쁘지 않았다. 당연했다. 내가 매일 밤 꿀잠 아이템으로 개고생을 하며 케어해 줬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작과 다른 결정을 내릴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저, 정말입니다! 제가 전설급 무기가 있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다 찾아서 드리겠습니다!”
드워프 역시 환상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말을 외쳤다. 그리고 그 후에 다른 능력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말을 내뱉었다.
“분명 우리를 꾀어내려는 함정입니다. 몬스터의 말은 듣지 않는 게 좋아요.”
“맞는 말입니다. 중국에서도 사람의 말을 할 줄 아는 몬스터가 능력자를 꾀어내 공격한 적이 있었습니다.”
“불쾌하니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죠.”
“…….”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환상으로 한 번 봤기 때문에 이런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그러면 이제…….
나는 이든 쪽을 쳐다봤다. 이제 이든이 이죽거리듯이 말하며 초를 칠 차례이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이든은 불만 어린 표정을 짓고 있을 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왜지? 이제 이든이 말해야 할 차례인데?
‘그러다가 진짜 있으면 어쩌려고?’
다른 고등급 능력자들의 눈치 따윈 보지 않고 지옥의 주둥아리로 나불거려야 하는데. 왜 이든만 다른 거지.
“아.”
도결이었다. 도결이가 이든이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걸 막기 위해 능력을 쓴 거였다. 그래서 원작과 달리 이든이 말해야 할 타이밍이 어긋나고 말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이든이 여기서 반대 의견을 말하지 않는다면, 다음에 말해야 할 리암 화이트는?
“흐음.”
“…….”
이든 다음에 말할 차례였던 리암 화이트는 그저 흥미롭다는 얼굴로 엎드리고 있는 드워프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역시, 원작이 완전히 어그러지고 말았다.
잠깐의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흐른 후, 다시 연극이 이어지듯 능력자들이 저마다 입을 열었다. 반대하는 의견이 나오지 않으니, 대체로 드워프를 그냥 죽이자는 목소리만 높아졌다.
“젠장.”
이거 오히려 원작보다 상황이 더 나빠진 거 아닌가? 이 불쌍한 드워프의 목숨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저기……!”
급한 대로 무작정 앞으로 나섰는데, 그만 스텝이 꼬이고 말았다.
“으악……!”
나는 꼴사납게 드워프의 앞에 철퍼덕 넘어졌다. 능력자들의 시선이 단번에 꽂혔다.
“아이고…….”
“너…….”
“……!”
얼른 고개를 들어 올리자, 강유현의 서늘한 시선과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