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강원도 삼척의 한 조용한 읍내.
얼마 전 그곳에 던전이 출현했다. 던전의 이름은 스바르트알파헤임. 처음 출현한 이름의 던전에 작고 조용했던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곧바로 협회가 파견되었고, 추정 등급은 S급 이상. 이번엔 예외적으로 길드에 입찰을 맡기지 않고 협회가 독자적으로 관리하기로 했다. 첫 출현임에도 던전 브레이크가 우려될 정도로 파장이 불안정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협회는 한 길드에 토벌을 의뢰했다. 바로 한국의 대표 대형 길드인 오딘이었다. 오딘 길드의 마스터인 박윤성은 의뢰를 받아들이고, 곧바로 공략할 길드원들을 모았다. 오딘 길드로서도 참으로 오랜만에 처음 출현한 던전을 공략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협회는 최후의 던전을 지원하기 위해 온 연합 길드들의 참전도 요구했다. 연합이 합의한 건 예언가가 예지한 최후의 던전뿐이었지만, 고등급의 던전을 공략하고 아이템까지 얻는 건 연합으로서도 이득이기 때문에 흔쾌히 수락했다.
오딘 길드 역시 장차 최후의 던전을 함께 공략해야 할 이들과 합을 맞춰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오딘 길드와 연합의 던전 공략 준비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온다!”
던전 앞에 먼저 도착한 건 오딘 길드의 차였다. 가장 먼저 장신의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
강유현이었다. 그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계속해서 플래시가 맹렬하게 터졌다. 무심한 눈으로 사람들을 훑어본 강유현이 긴 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뒤를 동생인 강수현과 고등급의 능력자들이 줄줄이 따라갔다.
“한이진은 왜 없지?”
“뭐야, 한이진은 이번에 투입 안 된 거야?”
기자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S급들의 집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한이진은 현재 가장 뜨거운 감자였다. 그 라우페이 길드마저 눈에 불을 밝히고 확보하려고 한 능력자라는 소문에 세간의 관심은 더욱 그에게 쏠렸다.
하지만 협회 붕괴 사고 이후 오딘 길드의 숙소 안에만 머무는 한이진은 지금까지 밖으로 나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공식적인 스케줄도 모두 취소하고, 간간이 찍던 너튜브 영상도 올라오지 않아 네티즌들의 원성도 자자했다.
그래도 미지의 던전 공략에 S급 보조 스킬을 가진 능력자를 투입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라는 생각에 기자들은 한껏 신나 있었다. 한이진과 강유현의 투샷 사진만 잘 찍어도 조회수는 맡아 놓은 당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던전 공략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니. 기자들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그들은 포털 입구로 유유히 걸어가는 오딘 길드의 능력자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에 입맛을 다셨다.
“리암 화이트다!”
“오!”
그러나 속속들이 등장하는 연합 소속 능력자들의 모습에 금방 시선을 빼앗겼다. 곧 그들의 머릿속에서 한이진의 대한 것은 빠르게 사라졌다.
***
“후…….”
나는 멀리서 포털을 향해 걸어가는 능력자들을 응시했다.
지금 내 모습은 투명화 아이템으로 가려진 상태였다. 몰래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했지만, 어떻게든 시간에 맞춰 올 수 있어 다행이었다.
심단테를 통해 이채진과 연락한 나는 그에게 포션을 얻었다. 천재 연금술사라는 별명에 맞게 그는 다양한 포션을 가지고 있었다. 소설을 읽었던 나는 그가 가진 포션이 단순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강유현과 강수현이 스바르트알파헤임 던전을 공략하려 떠나고 난 뒤, 마치 나를 감시하듯이 도결이와 이든이 번갈아 가며 나를 찾아왔다. 기회만 되면 내가 나갈 거라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을 몰래 재우고 순간 이동 아이템을 썼다. 이든과 도결이를 동시에 재우는 건 타이밍이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우선 이든을 따로 꼬여 내 꿀잠 아이템을 썼고, 도결이에게는 이채진에게 받은 포션을 먹였다.
S급인 도결이를 잠재울 수 있는 포션은 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채진이 만든 포션은 그게 가능했다. 눈치 빠른 도결이는 꿀잠 아이템을 쓰려고 하면 경계했지만, 음료수에 탄 수면 포션은 의심하지 못했다.
그리고 순간 이동 아이템을 쓰기 전에도 이채진에게 받은 포션을 썼다. 그건 바로 일정 시간 동안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포션이었다. 혹시 몰라 투명화 아이템이 풀리면 난감할 테니 요구한 건데, 다행히 아직 투명화 아이템이 풀리지 않았다.
“이제 저기를 어떻게 들어간담.”
나는 포털 주변에 모여 있는 능력자들을 노려보듯이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이제 문제는 예민하기 짝이 없는 능력자들 사이로 어떻게 잘 숨어드냐는 거였다. 투명화 아이템은 다른 사람과 부딪치거나 누군가가 기척을 알아채면 풀리고 만다.
고등급의 능력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포털을 타려고 기다려 봤자 투명화 아이템은 금방 풀리고 말 것이다. 모습을 바꿨다고 해도, 소속이 불분명한 낯선 능력자를 선뜻 공대로 받아들여 주지 않을 것이다.
“음…….”
솔직히 여기까지 오는 것만 생각했지, 그 이후의 일은 잘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이 없어서 대충 계획을 세운 것을 후회했다. 개고생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어떡하지.
“차례대로 포털 안에 들어가세요!”
“헉.”
고민하는 사이 정비를 끝낸 능력자들이 하나둘씩 포털을 타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역시 끄트머리에 살짝 붙어서…….”
“붙어서?”
“붙어서 몰래…… 응?”
“응?”
굵직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나는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나를 쳐다보고 있던 새파란 눈과 마주쳤다.
“헉……!”
“쉿.”
놀라서 그만 큰 소리를 낼 뻔한 내 입을 기다란 손가락이 막았다.
“무, 무슨…….”
“후후.”
리암 화이트가 짓궂은 소년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발두르 길드의 대표로 선두에 있어야 할 그가 왜 여기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천천히 눈을 깜박인 그가 나에게 물었다.
“이런 데서 혼자 뭐 합니까? 길드원들 놓쳤어요?”
“어, 그게…….”
뭐지? 설마 나를 낙오된 타 길드원쯤으로 보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수상한 모습이지 않나? 내가 스스로 말하기도 뭐 하지만…….
상식적으로 투명화 아이템을 써서 던전 공략하러 들어가는 공대를 몰래 지켜보는 모습은 정상이 아니다. 다짜고짜 빌런으로 몰아가도 나는 할 말이 없는 입장인 것이다.
혹시 내가 한이진이라는 걸 들킨 건 아니겠지?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리암 화이트의 생각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하…… 네, 그래서 저 혼자 여기서…….”
“흠, 거짓말 잘 못 하네.”
“네?”
리암 화이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뜨는 나를 보며 리암 화이트가 큭큭 웃었다.
“귀여워. 거짓말할 때 코 찡긋거리고.”
“뭐, 뭐라구요?”
나는 경악하며 리암 화이트를 바라보았다.
이 새끼, 이든이랑 똑같은 말을 하다니. 그것보다, 내가 정말 거짓말할 때 눈에 띄는 버릇이 있는 건가? 이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코를 감싸 쥐었다.
“이상한 거 보지 마세요!”
“하하, 미안합니다. 쏘리.”
“…….”
번역 아이템 오작동인가, 왜인지 리암 화이트의 말이 콩글리쉬처럼 들렸는데. 내 기분 탓이겠지.
“어쨌든 다 들어가기 전에 빨리 가죠.”
“어엇!”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리암 화이트가 나를 잡아끌었다. 이미 풀려 버린 투명화 아이템을 바닥에 떨어트린 채, 리암 화이트에게 질질 끌려갔다. 어차피 일회용이니 상관없기는 한데, 좀 아까웠다.
“리암! 대체 어디 갔다 온 거야?”
“산책.”
“산책이라니, 이런 상황에서 정말 너는…… 응?”
한바탕 잔소리를 시작하려던 앤드류 베일리가 나를 보고 말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야?”
“저 앞에서 만났어.”
“아니, 그래서 누구냐고.”
“몰라. 공대 능력자겠지.”
“뭐어?”
“…….”
어이없어하는 앤드류 베일리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적잖이 당황했다. 정말 아무 의심 없이 나를 데려온 건가?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친 거 아닌가?
아무리 리암 화이트가 귀공자처럼 자랐다고 해도, 세상 물정 모르는 게 너무 심한 것 같은데. 이렇게 사람 의심할 줄을 모르다니. 그런 그의 면모에 덕을 보는 중이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소설에서는 이 정도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리암 화이트 역시 회귀의 피해자인 걸까.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에게 애도를 표했다.
“당신 누굽니까? 어디 길드 소속이죠?”
“그러니까, 저는…….”
“일단은 포털부터 타자고, 앤드류.”
“아니, 잠깐……!”
내 정체를 추궁하려던 앤드류 베일리는 막무가내로 잡아끄는 리암 화이트에게 질질 끌려갔다. B급인 나는 몰라도 A급인 앤드류 베일리까지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다니. 엄청난 힘이었다. 이래서 S급들이란.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곧 새파란 포털이 넘실거리며 내 몸을 집어삼켰다.
***
“으…….”
가까스로 눈을 뜬 이든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의 앞에서 작은 시스템 창이 계속해서 경고를 보냈다. 이든은 그걸 무시하며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습니까?”
“이진이는……?”
“…….”
이든을 지켜보고 있던 박윤성이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걸 무시한 이든이 누군가를 찾자, 박윤성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갔어?”
“……네.”
“제길.”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더라니. 이든이 이를 갈았다. 마지막 기억은 작은 향수 통 같은 걸 손에 들고 있던 한이진이 자신을 향해 그 향수를 분사한 것이었다. 이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한이진은 자신을 억지로 잠재운 것이다.
“빨리 따라가야 해. 이진이 혼자서는 위험하다고.”
“이미 던전 안에 들어갔을 겁니다.”
“뭐?”
“응, 형은 이미 던전에 들어갔어.”
이든보다 먼저 깨어나 있었던 한도결이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 고개를 든 한도결의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나도 갈래, 던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