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왜, 왜?”
“…….”
저 멀리 있었던 강유현이 한 걸음 만에 훌쩍 다가왔다. 그리고 아직도 내 허리를 감싸고 있는 이든의 팔을 신경질적인 눈으로 노려보았다.
“떨어져.”
“으악!”
그리고 별안간 손을 뻗어 나와 이든을 거칠게 떨어트려 놓았다. 갑자기 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나는 당황한 얼굴로 강유현을 올려다봤다.
“갑자기 왜 이래?”
“언제까지 저 새끼랑 붙어 있을 거야.”
“내가 언제 붙어 있었다고…….”
투덜거리면서 중얼거렸지만, 화가 난 듯 보이는 강유현과 차마 당당하게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대신하려는 듯이 이든이 소리를 꽥꽥 질렀다. 그리고 손을 뻗어 내 반대쪽 팔을 붙잡았다.
“이진이 이리 내놔, 이 자식아!”
“…….”
왠지 이든의 말도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
어쨌든 다 큰 남자가, 그보다 큰 남자 둘 사이에 껴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건 좋은 꼴이 아니었다. 나는 양팔을 붙들고 있는 강유현과 이든을 난감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너희들 일단 손은 좀 놓고…….”
“못 들었어? 이진이가 손 놓으라잖아.”
“팔 자르기 전에 너부터 손 치워.”
“…….”
실로 오랜만에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대로 두자니 추풍낙엽처럼 흩날리는 내 몸이 위험해지고 있었다. SS급과 A급의 힘겨루기에 팔 하나가 곧 빠질 것 같았다. 나는 경악하며 입을 열었다.
“야, 잠깐…… 잠깐만! 야!”
육지에 나온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던 나는 곧 힘에 부쳐 헉헉거렸다. 도저히 내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곧 구세주가 나를 발견하고 빠르게 다가왔다.
“한이진 능력자, 아까 갑자기 쓰러지더니…… 괜찮습니까?”
“괘, 괜찮…… 근데 지금은 안 괜찮…….”
“아.”
박윤성이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강유현과 이든을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보았다.
“치정 싸움은 밖에 나가서 하시죠. 우선은 포털을 타야 하니까요.”
“…….”
“…….”
박윤성의 차분한 말에 강유현과 이든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이 짐승 놈들이 그래도 사람의 말을 알아들어서 다행이었다. 비록 내 말은 사람 취급도 안 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
“하아…….”
얼얼한 팔을 문지르며 포털을 타기 위해 줄을 섰다. 첫 번째 스테이지보다 인원수가 많아서 조금 기다려야 했다. 포털을 탈 때는 시간 차이가 있으면 안 돼서 보스 몬스터의 뒤처리와 정비를 끝낸 다음 줄줄이 열을 맞추기 때문이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보스 몬스터…….
등급이 높은 아이템은 무작위로 분배되니, 지금쯤 내 인벤토리 안에도 보스 몬스터가 드랍한 아이템이 들어 있겠지?
순간 신의 음성이 머릿속을 스쳤다.
‘대신 이번에는 정말 좋은 선물을 줄게. 너도 만족할 거야.’
“흠…….”
이전에도 대박 아이템만 쏙쏙 골라서 주더니, 그렇게 호언장담할 정도면 얼마나 좋은 아이템인 걸까. 호기심이 샘솟은 나는 시간도 남으니 인벤토리를 한번 뒤져 보기로 했다.
아직도 조금 저릿한 팔을 들어 인벤토리를 살폈다. 그러자 방금 들어온 것 같은 아이템들이 인벤토리 한구석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응……?”
반짝거려……?
이게 순간 내 눈이 잘못된 건 줄 알았는데, 정말로 아이템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무슨 특수 효과 같은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당황한 내가 유독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는 아이템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드라우프니르(L)
9일마다 똑같은 무게의 황금을 8개 만들 수 있다.
순도 100%의 황금.
양도 불가.」
“뭐……?”
전설급 아이템이라고?
무기나 방어구도 아니고, 아이템이 전설급? 게다가 황금?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드라우프니르를 꺼냈다. 그러자 황금 팔찌가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손안에 착 감겼다. 비단 지금 내 팔이 덜덜 떨릴 정도로 아파서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황금의 무게가 장난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걸 9일마다 8개를 만들 수 있다고? 그러면 이 정도 무게의 황금이 9일마다 8개가 되는 건가? 나 황금 부자가 되는 거야……?
9일의 쿨타임이 있으니까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인벤토리에 두다가 계속 황금을 만들어 내면 세계적인 부자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미친, 미쳤다. 신이 이렇게 화끈해도 되는 거야? 응?
나는 이름 모를 신을 속으로 찬양했다.
“흠, 흠.”
그리고 누가 보기 전에 황금 팔찌를 인벤토리 안에 얼른 집어넣었다. 헛기침을 하며 괜히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이진아,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시치미를 뚝 뗐다. 패시브 스킬 덕분에 표정을 감추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내 뻔뻔한 얼굴에 이든도 더는 뭐라고 하지 못했다.
후우, 가슴이 엄청나게 쿵쾅거렸다. 이렇게 갑자기 부자가 된다고? 정말 갑자기?
“…….”
그러나 곧, 좋았던 기분이 한순간에 추락했다.
어마어마한 돈도 살아 있을 때나 실컷 쓸 수 있지 않나. 신의 말대로라면 내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그러니 번쩍이는 황금 팔찌도 이런 상황에서는 마치 나를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젠장, 아니. 돈도 좋긴 한데. 다른 아이템은 없나? 내 몸을 지킬 무기나 방어구 하나 없는 거야?
다급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황금 팔찌만큼이나 반짝이는 걸 아무거나 꾹 눌렀다. 그러자 작게 상태 창이 떴다.
「겨우살이의 나뭇가지(L)
신을 죽인 나뭇가지.
아이템을 가공하여 무기로 만들면 신살(神殺) 속성을 가지게 된다.」
“……!”
겨우살이의 나뭇가지? 신을 죽인다고?
설마 이걸로 미스틸테인을 만들 수 있는 건가? 북유럽 신화에서 신을 죽인 그 무기?
제정신인가……. 이거 정말 내가 가져도 되는 건가? 신이라는 작자가 신을 죽이는 아이템을 떡하니 줘도 되는 거야?
기겁한 나는 후다닥 손가락을 인벤토리에서 떼어 냈다. 그리고 한동안 얼떨떨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한이진 능력자?”
“네, 네?”
“괜찮습니까?”
“어…….”
박윤성의 말간 눈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일단은 괜찮아 보여야 했다.
“상태가 좋지 않으면 바로 말하셔야 합니다.”
“네, 그럴게요.”
단단한 목소리로 대답한 나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대체 그 정신 나간 신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아이템들을 나에게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점차 안심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신들이 내 목숨을 노려도, 신살 속성을 가진 무기를 지니게 되면 나를 함부로 해치려고 하지 못할 것이다.
던전에서 나가면 우선 아이템을 가공해서 무기를 만들 장인을 찾아야 했다. 지금은 한 명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 한 명이 믿을 수 없는 놈이라, 과연 이걸 맡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전설급 아이템을 가공할 수 있는 제작자는 흔치 않은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곧 차례가 되어 포털을 지났다.
후웅.
“……!”
눈을 뜨자 엉망이 되어 폭삭 무너진 건물이 보였다. 바로 던전에 떨어지기 전에 있었던 협회 건물이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무너진 협회 건물을 쳐다봤다.
“이게 무슨……!”
“마스터들이다!”
“……?”
누군가하고 봤더니, 바로 연회장 안에서 사진을 찍어 대던 기자들이었다. 건물이 저렇게 다 무너졌는데, 용케 살아서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그들은 아주 투철한 기자 정신을 가졌는지, 이런 상황에서도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박윤성 마스터! 건물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말씀을 해 주세요!”
“송차현 마스터! 차강태 마스터! 서진한 마스터!”
그들은 마스터들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협회 사람들은 무너진 건물을 수습하느라 기자들을 막을 여력도 없어 보였다.
보아하니 연회장 바닥이 갈라지면서 틈새로 떨어진 건 능력자들뿐인 것 같았다. 기자들은 일반인이라 건물이 무너지기 전에 무사히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이것도 라이수의 수작질이겠지.
마스터들은 굳은 얼굴로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각자의 길드원들을 집합시켜 사태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나는 오딘 길드가 모이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탁.
“……?”
누군가가 내 손목을 단단하게 잡았다.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리암 화이트였다. 그가 한쪽 눈썹을 위로 올리며 씩 웃고 있었다.
“던전 데이트, 즐거웠습니다.”
“뭐요?”
“후후.”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니야. 뭐? 데이트?
나는 질린 얼굴로 리암 화이트의 팔을 탁, 하고 뿌리쳤다. 그래도 리암 화이트는 좋다는 듯이 실실 웃었다.
“한국 던전은 최악이었어…….”
“…….”
리암 화이트의 뒤에 있는 앤드류 베일리는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 그렇다고 한국의 모든 던전이 그렇지는…….
순간 등급 이상 현상으로 온갖 고생했던 과거가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나는 속으로 앤드류 베일리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했다.
“이진아! 가자!”
“아, 응.”
이든에게 끌려가며 리암 화이트를 흘끗 쳐다봤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해맑은 얼굴로 나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친구에게 격 없이 인사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리암 화이트 역시 용의선상에 있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수상쩍다는 것도.
곧 우리를 배신하는 외국 길드. 그게 어디인지 꼭 찾아야 한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