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140)화 (140/228)
  • 140화

    왜 그쪽이 그렇게 신경 쓰이는지 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이유를 찾으려고 하면 또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다.

    이곳은 큰 나무 하나 없는 넓은 들판이었다. 주위에 있는 거라곤 발목을 조금 덮는 높이의 풀밭 정도였다. 약간 누런 빛을 띠는 풀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길게 누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딱 한구석만 바람이 불어도 잠잠했다. 아주 작은 부분이라 유심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지도 못할 곳이었다. 그런데 나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곳에 시선이 먼저 갔고, 그다음에 수상한 부분을 찾아냈다.

    스스로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박윤성을 보며 솔직하게 말했다.

    “저기 아까부터 바람이 불어도 풀 한 포기 움직이질 않아요.”

    “네?”

    “저쪽을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박윤성은 진지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른 능력자들에게 눈짓했다.

    탐지 스킬을 가진 강수현과, 그를 지킬 여민준이 내가 지적한 부분을 살피러 갔다. 나머지는 무슨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제자리에서 대기했다.

    곧 여민준과 강수현이 걸음을 멈췄다.

    나는 괜히 긴장하며 두 사람을 응시했다. 내 예상대로라면, 저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온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물론 여민준의 방어 스킬이라면 갑자기 보스 몬스터가 튀어나와도 죽거나 크게 다치진 않겠지만, 그래도 걱정되었다.

    이 해괴한 던전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 게 당연한 곳이니까 말이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강수현과 여민준을 지켜보았다.

    바람에 영향받지 않는 풀을 확인한 강수현이 눈을 감았다. 탐지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곧 강수현이 다시 눈을 떴다. 그가 여민준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것도 없는 건가.”

    옆에 있던 박윤성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이후에도 강수현과 여민준은 계속 그 자리에 머물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강수현이 이쪽을 바라보자, 박윤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돌아오라는 뜻이었다.

    “…….”

    그럴 리가 없는데. 왜 조용한 거지? 게다가 S급의 탐지 스킬이 먹히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도 잠시 가 보겠습니다!”

    “네? 한이진 능력자……!”

    “이든, 가자!”

    “그래!”

    내 말에 이든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리고 냉큼 내 허리를 낚아채 공중에 떠올랐다. 이제 이든에게 안겨서 이리저리 이동하는 것도 무척이나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형?”

    “……?”

    막 복귀하려던 강수현과 여민준이 나와 이든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머쓱한 얼굴로 그들의 옆에 착지했다. 강수현이 눈을 마주치자마자 입을 열어 물었다.

    “위험하게 여긴 왜 왔어요?”

    “위험하긴. 아무 일도 없었…….”

    아무 일도 없었지 않냐고 되물으려던 찰나,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걸 강수현과 여민준도 느꼈는지, 몸을 움찔하며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성인 남자 한두 명이 들어갈 정도의 동그란 공간만큼의 풀이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내가 다가가자마자 진동을 일으키듯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위험합니다!”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리자마자, 여민준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와 동시에 기이한 소리가 귀를 울렸다.

    기긱, 기기긱!

    “윽……!”

    “뭐야……!”

    알 수 없는 소리가 계속해서 고막을 때렸다. 나는 두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하지만 그 행동을 비웃듯이 정체불명의 소리가 점점 더 커져 갔다.

    소리, 라는 게 얼마나 인간을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지 깨달았다. 당하고 난 뒤에야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알게 된 건 정말 통탄할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감상마저도 사치였다. 나는 귀를 막은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괴로워하기만 했으니까.

    그럼에도 어렴풋이 깨달은 게 있었다. 바로 무력감을 깨닫게 한 이 ‘소리’가 왜인지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다는 거였다. 정말 미친 생각인데,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다. 단순한 소음 같은 게 아니라,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고 말이다.

    “큭…….”

    하지만 그 전에 내 귀에서 피가 나올 것 같다. 대화고 뭐고, 그걸 시도하기 전에 내가 죽을 지경이었다. 이를 악문 내가 큰 소리로 소리쳤다.

    “그만해……!”

    그런다고 이 난잡한 소리가 멈출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화풀이에 가까웠다. 정말로 상대방이 내 말을 들어주길 바라고 한 말이 아니라,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홧김에 소리친 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소음이 뚝 하고 멈췄다.

    “……?”

    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어떤 ‘존재’와 눈이 마주쳤다.

    “어…….”

    【…….】

    뱀처럼 길쭉한 무언가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저건…… 노랗게 빛나는 건 눈인가? 형형한 눈이 관찰하듯이 나를 쭉 훑었다. 나는 떨떠름하게 그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압박감에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S급 능력자들의 앞에서도 잘만 나불거렸던 입은 이번에야말로 임자를 만난 듯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잘못 말하면 죽는다. 그런 생각이 언뜻 머릿속을 스쳤다.

    【괜찮은데. 편하게 말해도.】

    “……!”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차분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왜인지 익숙했다. 분명 어디선가 들었던 목소리인데…….

    고개를 갸웃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누구……세요?”

    【후후.】

    “…….”

    용기 내서 물었더니 정작 대답은 하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입을 다물고 버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이곳에서 산 채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구냐는 질문 빼고는 다 말해 줄 수 있어.】

    “정말……요?”

    【음…… 아니, 잠깐만.】

    “…….”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음성을 들으니 묘하게 기운이 빠졌다. 나는 차게 식은 눈으로 위를 올려다봤다.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감도 슬슬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에이, 괜찮겠지. 다 물어봐!】

    “…….”

    정말 괜찮은 거 맞는 건가?

    의구심이 들었으나 그걸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만약 내 짐작이 맞다면 이 사람, 아니, 이 존재는…….

    “하아…….”

    그런데 지금은 제대로 된 사고를 하기 힘들었다. 적응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다시 부르르 떨렸다. 몸과 머리가 따로 노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이런, 여기라면 압박감이 좀 덜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네.】

    “아니, 괜찮…… 괜찮습니다.”

    나는 오기로 버텼다. 이걸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억지로 그와 눈을 맞췄다.

    “당신이 누군지는…… 짐작이 가거든요.”

    【호오?】

    “던전에서 제가 받았던 아이템들…… 당신이 준 겁니까?”

    【…….】

    이상할 정도로 아이템 운이 좋았던 나였다. 마치 누가 작정이라도 한 듯이 나에게 아이템을 몰아준 것 같았던 날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애써 운이 좋았던 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던 나는 이제야 이유를 깨달았다.

    【뭐, 내가 준 것도 있고…… 그들이 준 것도 있고, 우리가 준 것도 있지.】

    “‘그들’? ‘우리’?”

    【그래.】

    “…….”

    독특한 화법이었다. 하지만 이제 슬슬 규칙 같은 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로를 직접적으로 불러선 안 되는 것 같았다. 인과율? 그런 것 때문인가?

    소설에서는 이들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그저 길드명 같은 걸로 언급만 됐을 뿐이었다. 작가가 그냥 북유럽 신화의 명칭들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기만 했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아이템을 몰아주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은 후, 소설에 나왔던 일들도 묘하게 의심되기 시작했다. 주인공인 강유현을 주시한 존재들이 은근슬쩍 소설에서 암시되곤 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북유럽 신화의 신들.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성좌로서 주인공들을 지켜보고 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이 소설 속 세상에 빙의한 나를 성좌들이 주시했다면……. 그렇게 생각하면 딱 맞아떨어지는 얘기였다.

    “‘그들’은 당신에게 적대적인 신들입니까? ‘우리’는 당신과 우호 관계의 신들이고요?”

    【와…… 너 진짜 똑똑하구나.】

    “이 정도 추리는 기본 아닐까요?”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내가 아는 놈은 무식하고 힘만 세서 제대로 된 생각 자체를 안 하거든.】

    “아…… 하하…….”

    누구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아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대화하면 눈앞에 있는 신의 정체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자꾸만 고꾸라지려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시간도 없는데, 날 캐묻는 건 포기하는 게 어때?】

    “그러려고 했어요.”

    하아, 한숨을 몰아쉰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나에게 바라는 게 뭡니까?”

    【그건 이미 알고 있지 않아? 당연히 최후의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

    “……한 번 실패했었으니까?”

    【응, 우리가 키운 에인헤랴르로는 클리어하지 못했었으니까.】

    “…….”

    역시. 순간적으로 떠올린 가설이 맞다고 하니 기쁨보다는 씁쓸한 감정이 먼저 들었다. 정말로 이곳은 내가 알던 소설의 세계가 아니었다.

    바로 멸망 엔딩을 겪고 한 번 회귀한 세상이었던 것이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내가 도우면, 클리어할 수 있는 겁니까?”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