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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136)화 (136/228)
  • 136화

    사실 믿고 싶지 않았다. 원작에서 외국인 능력자들과 강유현 사이에서 크고 작은 마찰은 있었어도, 그들이 강유현의 뒤통수를 거하게 때린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다들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든, 우정 때문이든 꽤 끈끈해 보였었는데.

    하지만 내가 읽은 건 소설의 중반쯤까지였고, 후반부에 최후의 던전 공략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아직 이그드라실의 정수로 보는 환상으로도 많이 확인하지 못했다.

    원작에서는 최후의 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하고 세상이 멸망했던 것, 강유현과 능력자들이 최후의 던전 안의 보스 몬스터를 앞에 두고 전멸했었다는 것. 내가 알고 있는 건 고작 그 정도였다.

    그런데 주인공들이 최후의 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하고 세상이 멸망했던 게…… 그게 다 외국에서 온 길드가 배신했기 때문이라는 건가?

    그리고 진짜 한이진의 말대로라면 이곳 타임 어택 던전에 같이 빠진 외국인 능력자들은 발두르 길드가 유일했다. 빛의 길드라고 칭송받으며 정의로운 척은 혼자 다 했던 미국의 발두르 길드가 배신했던 거라면 정말 역대급 반전이었다. 당장이라도 뒤통수가 다 닳아서 없어질 것 같았다.

    “한이진 능력자……?”

    “네?”

    “저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너무 빤히 쳐다봤기 때문인지 리암 화이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나는 곧바로 표정을 굳혔다. 아직은 발두르 길드가 정말로 배신자라는 걸 확신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해도 리암 화이트 앞에서 그 사실을 알았다는 걸 티 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씩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

    “이해는 합니다.”

    “네?”

    “제 얼굴이 너무 잘생겼죠?”

    “……네?”

    리암 화이트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미국인 특유의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는 다 이해합니다. 그러니 마음껏 보세요.”

    “…….”

    얘는 또 왜 이러나 싶었다. 리암 화이트. 금발의 귀공자.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소설에서도 리암 화이트는 화려한 외모로 인기가 많았고, 그 소설을 읽는 여성 독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나르시시스트 적인 발언을 막 하는 캐릭터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역시 나와 엮이면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다 이상해지는 것 같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네, 잘생기셨네요.”

    “이진아, 저런 얼굴이 좋아?”

    “뭐?”

    얘는 또 무슨 헛소리야.

    이든의 충격받은 얼굴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이든은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금발…… 금발로 염색해야 하나?”

    “뭔 헛소리야.”

    “나 렌즈 낄까?”

    “눈 안 좋아졌어?”

    “…….”

    이든과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나눈 직후, 박윤성이 다시 소리쳤다.

    “이제 출발합니다!”

    “……!”

    지금은 일단 시간 내에 던전을 클리어하는 게 우선이었다.

    리암 화이트를 비롯해 길잡이 역할을 하는 앤드류 베일리. 발두르 길드인 이 두 사람을 앞으로 던전 안에서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아직도 던전을 나가면 염색하겠다고 징징대는 이든을 한 대 때리고 앞으로 달려갔다.

    ***

    “남은 시간은?”

    “……22분입니다!”

    “……!”

    서지안의 외침에 한껏 긴장했던 능력자들이 한숨을 토해 냈다.

    첫 중간 보스 몬스터를 첫 번째 그룹이 쓰러트리고, 그다음 또 다른 중간 보스 몬스터와 부닥쳤다. 우리는 사전에 합의한 대로 두 번째 그룹이 중간 보스 몬스터와 싸웠다.

    그리고 걸린 시간이 또 20분 남짓. 이제 정말 보스 몬스터가 나오지 않으면 위험한 시간이었다.

    “이번에도 빨리 이동하죠.”

    “그럽시다.”

    마음이 급해진 능력자들이 서둘러 떠날 준비를 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벤토리를 뒤졌다. 이번에도 통신기가 나왔을까 싶어서였다.

    “…….”

    하지만 인벤토리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하다못해 이그드라실의 정수라도……. 아니, 이그드라실의 정수는 보스 몬스터가 드랍할 테니 아직은 무리였다.

    빨리 배신하는 외국 길드의 정보를 알아내야 하는데.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허, 이것 참…….”

    두 번째 그룹의 주 전투원이었던 리암 화이트는 나에게 보조 스킬을 받은 후 중간 보스 몬스터를 가뿐하게 쓰러트렸다. 그의 앞에는 거미 모양의 몬스터가 쓰러져 있었는데, 이미 절반쯤은 재 가루로 변해 있었다.

    멋스러운 머스킷 건을 양쪽에 든 채로 리암 화이트가 나를 쳐다봤다. 허공에서 그와 시선이 얽혔다.

    “…….”

    “…….”

    그리고 그러자마자 한 얼굴이 중간에 불쑥 튀어나와 시야를 가렸다.

    “이진아!”

    “아, 깜짝이야!”

    입술을 비죽 내민 이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또 그러는 건데. 왜 또!

    속으로 외치며 이든의 얼굴을 손으로 밀었다. 하지만 역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볼 한쪽이 손바닥에 눌려서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리는 게 꽤 볼만했다.

    “아, 장난하지 말고 좀 비켜 봐!”

    “저놈은 왜 자꾸 쳐다보는데?”

    “누구?”

    “저 금삐까 놈 말이야!”

    “…….”

    금삐까…… 놈?

    어휴, 어휘 수준하고는…….

    아무튼 리암 화이트를 말하는 게 맞겠지? 이든이 이렇게 경계할 정도로 너무 빤히 쳐다봤던 모양이었다. 이제 자제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 그렇게 안 봤어.”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안 했거든?”

    “너 거짓말할 때 티 나는 거 알지?”

    “뭐?”

    나에게 그런 버릇이 있다고?

    깜짝 놀라며 이든을 쳐다봤다. 그러자 이든이 재수 없는 얼굴로 씩 웃었다.

    “넌 거짓말할 때…….”

    “거짓말할 때……?”

    다급한 마음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나마 있는 패시브 스킬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화려한 언변술 정도였다. 그것마저 티가 나서 쓸모없어진다면 나는 이곳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만약 남이 볼 때 내가 그렇게 티가 나는 행동을 한다면 큰일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이든에게 대답을 들어야 했다.

    “알고 싶어?”

    “어.”

    “그럼…….”

    “잠깐.”

    순간 머릿속이 차분해진 내가 이든을 노려봤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럴 때는 거의 백 프로로 이든이 헛소리를 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헛소리의 이유도 어이가 없을 때가 많았다.

    가까스로 제정신이 돌아온 내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이럴 땐 네놈이 개소리할 확률이 높거든.”

    “뭐? 개소리라니!”

    “그렇잖아. 네가 언제 제대로 된 말 한 적이 있어?”

    “있어! 엄청 많아!”

    “언제?”

    “그건…….”

    이든이 잠깐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가, 곧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지도 딱히 생각나는 게 없겠지. 아무리 뻔뻔해도 말이다.

    혀를 쯧쯧 차며 이든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아, 잠깐. 잠깐만, 이진아.”

    “저리 꺼져라.”

    “진짜야. 너 진짜 거짓말할 때 버릇 있다니까?”

    “…….”

    나는 일부러 더 팍 식은 눈으로 이든을 보다가 물었다.

    “뭔데?”

    “아니, 그걸 말하려면 내가…….”

    “못 믿겠으니까 일단 뭔지 말부터 해 봐.”

    “어어…….”

    이든은 내 차가운 태도에 당황했다. 그리고 억울해했다. 확실히 내가 거짓말할 때 나오는 버릇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이진이 너는 거짓말할 때 코를 찡긋거려.”

    “…….”

    “그게 얼마나 토끼 같고 귀여운데!”

    “…….”

    ……그러냐.

    역시 예상대로 영양가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대답 없이 한숨을 푹 쉬고 몸을 돌렸다.

    “어어, 어디 가!”

    “에휴…….”

    그래도 혹시 모르니 코를 찡그리는 건 주의해야겠다. 그런 걸 이든 말고 누가 자세히 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출발하겠습니다!”

    “네!”

    이제 20분 정도 남았을 무렵, 능력자들은 다시 출발할 준비를 끝내고 대열을 이루어 섰다. 이번엔 마지막 세 번째 그룹이 선두에 서 있었다.

    다음에 마주할 네임드는 보스 몬스터임이 분명하기에, 능력자들의 모습에는 긴장이 역력했다.

    하지만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이미 나에게 보조 스킬을 받은 전투계 능력자가 두 명이나 있고, 이제 보조 스킬을 받을 박윤성은 S급 능력자에 세계에서 손에 꼽는 랭커였다. 그리고 그를 보조하는 능력자들도 대형 길드의 마스터들이었다.

    솔직히 이 조합으로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리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되지. 나는 자신감에 찬 얼굴로 함께 달려 나갔다.

    “키아아악!”

    “온다!”

    통로에 우글대는 몬스터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가자, 지금까지 봤었던 것 같은 커다란 공간이 나왔다. 척 봐도 보스 몬스터가 있을 것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천장에서 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저건……!”

    “……!”

    하지만 보스 몬스터라고 생각하고 본 천장에는 생각지도 못한 게 매달려 있었다.

    바로 우리가 이 던전에서 처음 마주했던 중간 보스 몬스터였다. 박쥐 모양의 네임드 몬스터.

    「어둠에 숨는 자

    등급: ??

    레벨: ??

    ? ?? ?? ??, ?? ?? ??

    …….」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캬아아아!”

    능력자들이 혼란스러워하는 틈을 타 중간 보스 몬스터가 공격했다. 그러자 선두에 있었던 박윤성이 이를 악물며 외쳤다.

    “일단 공격해!”

    “젠장!”

    “…….”

    나는 능력자들이 싸우는 걸 뒤에서 멍하니 쳐다봤다.

    틱, 틱.

    손목에 찬 시계가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이대로 세 번째 중간 보스 몬스터를 물리치면 12시가 될 것이 분명했다.

    뭐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보스 몬스터가 왜 나오지 않는 거지?

    “빌어먹을…….”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멍청하게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능력자들의 싸움이 끝나기 전까지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일반적인 던전이라면 중간 보스 몬스터 한둘 정도 제거하면 보스 몬스터가 나온다. 그리고 보스 몬스터를 없애면 클리어가 되고 포털이 열린다.

    “……!”

    하지만 여긴 타임 어택 던전이다. 희귀하고 변동이 심한 던전. 그런 곳이 다른 던전과 클리어 조건이 같을 리가 없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내가 주변을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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