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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135)화 (135/228)
  • 135화

    “……뭐지?”

    온통 새하얀 공간이었다.

    너무나도 새하얗기만 해서, 이질적인 기분이 드는 그런 곳.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여긴 또 뭐야.”

    갑자기 환상을 보는 거야 이제는 익숙하긴 한데. 이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환상은 또 처음이다. 대체 나에게 뭘 보여 주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음……?”

    그러다 뒤를 돌아봤는데, 그쪽에 무언가가 보였다. 저건…….

    “축음기……?”

    가까이 다가가서 낡은 축음기를 살펴보았다. 엔틱한 갈색 가구 위에 검은색의 엘피판이 돌아가고 있었고, 거대한 나팔이 지직거리는 소음을 조금씩 내고 있었다. 하지만 노랫소리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척 보기에도 너무 오래된 것 같은데, 고장이라도 난 건가?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역시 이 새하얀 공간에는 이 축음기만 하나 달랑 놓여 있었다.

    대체 뭐지. 아까 들렸던 목소리는…….

    ‘……박……호수?’

    “박……호수.”

    묘하게 익숙한 이름이었다. 분명 처음 듣는 것 같은데, 그런 느낌이 들었다. 눈살을 찌푸리다가 다시 거대한 축음기를 쳐다봤다.

    [칙…… 치직…….]

    “……!”

    그때, 축음기에서 지직거리는 소음이 더 강해졌다. 놀란 얼굴로 쳐다보니, 곧 사람의 말소리가 인위적으로 흘러나왔다.

    [……안……녕?]

    “…….”

    안녕이라고 한 건가? 다른 소음도 너무 심해서 겨우 알아들었다.

    남자의 목소리라는 것만 겨우 알 수 있을 정도로 훼손된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만 들어서는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와 대조할 수도 없었다. 짧게 고민한 나는 인상을 찡그린 채 입을 열었다.

    “넌 누구냐?”

    [한……이진……?]

    “그래.”

    [칙…… 치직…….]

    고개를 끄덕이자, 축음기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잠시 뒤, 웃음기를 담은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아니잖아…….]

    “……!”

    [넌…… 한이진 아니잖아.]

    목소리가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렸다. 나는 놀란 눈으로 축음기를 쳐다봤다.

    이 녀석, 내가 진짜 한이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대체 정체가 뭐지?

    내가 빙의한 존재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심단테밖에 없다. 하지만 심단테가 굳이 이런 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놈은 지금 실험에만 미쳐 있으니까.

    “넌 누구냐니까?”

    [칙…… 치지직…….]

    “…….”

    이 새끼, 지가 불리한 질문에는 소음이 심한 척하는 거 아니야? 갑자기 다시 이상해진 축음기를 노려봤다. 그렇게 한참 후에야 축음기에서 다시 사람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

    [……누굴까?]

    “……!”

    나도 모르게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저 축음기, 그냥 부숴 버릴까?

    아니야. 진정하자. 부글부글 끓는 속을 잠재우며 엘피판이 축음기에서 휙휙 돌아가는 걸 쳐다봤다. 대체 음악 소리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왜 엘피판과 축음기 모양인 거지. 센스가 참…….

    그러다 흠칫하며 다시 새카만 엘피판과 축음기를 응시했다. 자꾸 보니까 왜인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선가 봤던 거 같은데…….

    “……!”

    지금의 오딘 길드 숙소가 아닌, 로키 길드 숙소의 한이진 방에서 가득 쌓인 엘피판을 봤던 것 같다. 나는 그런 쪽에 흥미가 없어서 그냥 지나쳤었지. 그저 한이진 취향이 좀 고리타분하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물론 그 방에 이렇게 큰 축음기까지는 없었지만……. 이게 그 녀석의 취향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이 정말로 환상이라면, 그 녀석의 취향이 반영되었을 테니까.

    게다가 심단테가 아니라면, 내가 빙의한 인물인 걸 알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너…… 진짜 한이진이냐?”

    […….]

    축음기에서 나오던 모든 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왜 돌고 있는지 알 수 없던 엘피판도 움직임이 멈췄다. 나는 긴장한 눈으로 축음기를 바라보았다.

    [정답.]

    “……!”

    전보다 조금 더 선명한 목소리가 축음기의 나팔 부분에서 흘러나왔다. 이제야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바로 지금의 내 목소리와 무척 닮아 있었으니까 말이다.

    한이진. 내가 빙의한 인물. 소설에서 주인공인 강유현에게 빌런 짓을 하다가 맞아 죽었던 그 등장인물이었다.

    “너…… 너 대체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나 말고 심단테에게 연락을 해서 빨리……!”

    [그건 안 돼. 심단테는 던전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뭐?”

    한이진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던전 안이 아니면 연락을 할 수 없다고? 왜지?

    “왜?”

    [내가 좀 사정이 있어서……. 그리고 애초에 차원이 달라서 던전 안이 아니면 연락하기도 힘들어.]

    “음…….”

    한이진의 말을 들으니 그것도 맞는 것 같았다. 지금 한이진이 있는 곳은 내가 원래 살던 세상일 테니 말이다.

    짧게 고민한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심단테를 던전에 데리고 오면…….”

    [S급 던전 이상이어야 하는데 걔는 입장하자마자 죽지 않을까?]

    “…….”

    설마 심단테가 그렇게 약골일까. 아무리 전투계 스킬이 전혀 없는 생산계 능력자라고 해도 S급은 S급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심단테가 자신의 몸을 잘 지킬 자신이 있다면 그렇게 아지트에 박혀 숨어 있지 않을 테지.

    이채진처럼 인원수가 많은 공대에 낀다면 가능하겠지만, 그렇게 눈에 띄면 심단테의 위치가 발각돼 위험해질 가능성이 컸다. 이러나저러나 심단테를 이런 S급 던전에 데리고 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한테 할 말이 뭐냐? 진짜 한이진.”

    우선은 한이진의 용건부터 들어 봐야 했다. 분명 이 녀석도 자신의 몸을 찾길 원하고 있을 것이다. 동생을 끔찍하게 아꼈으니, 도결이의 안부도 궁금하겠지.

    생각난 김에 나는 도결이에 대한 것부터 한이진에게 말하려고 했다.

    “아, 참고로 도결이는 내가…….”

    [그것보다는, 네가 알아야 할 게 있어.]

    “……뭐?”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것보다는?

    이게 진짜 한이진이 할 말인가? 그렇게 동생을 살리려고 발악을 했던 놈이?

    환상을 유지하는 시간이 촉박한 걸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꺼림직한 기분이 느껴졌다. 아무리 그래도 도결이에 대한 얘기 한두 마디도 듣지 않고 이렇게 끊어 내 버린다고?

    “너…… 진짜 한이진 맞냐?”

    […….]

    한 번 의심이 드니 걷잡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던전 안에 이런 환상을 만들 정도로 한이진은 대단한 능력자도 아니었다. 내 사정을 심단테만 알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위험했다. 그놈이 누군가에게 발설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해서 심단테가 얻을 이득은 딱히 떠오르지 않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조용해진 축음기를 노려봤다.

    한참 후에 축음기에서 다시 말소리가 튀어나왔다.

    [……사정이 있다고 했잖아. 도결이……. 그래, 내 동생의 이름이 그랬던 것 같긴 하군.]

    “너…….”

    [동기화가 끝나서 기억이 사라진 건 너뿐만이 아니야. 현재 한이진. 아니, 박호수.]

    “…….”

    박호수.

    순간 그 이름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게 원래의 내 이름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대화를 하고 있는 사람이 진짜 한이진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도 나처럼 동기화가 끝나서 강제로 기억이 지워졌다면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넌 용케 자기 이름을 기억해 낸 모양이야.”

    [뭐, 여러 일이 있었지.]

    “그래서 내가 알아야 한다는 건?”

    [그건…….]

    잠시 뜸을 들인 한이진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지금 같은 던전에 있는 외국인 능력자들을 조심해. 그중에 배신자가 있어.]

    “뭐?”

    [그놈들 때문에 최후의 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할 거야.]

    “그게 무슨…….”

    [……를…… 최대한…… 해서…….]

    “뭐라고?”

    잘만 돌아가던 축음기가 갑자기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이진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축음기가 있는 부분부터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벌써 시간이 다 됐나? 이렇게 빨리 끝나다니. S급 아이템이면서 너무 지속 시간이 형편없는 거 아닌가?

    [살아……라. 박……수.]

    “한이진!”

    손을 앞으로 뻗었으나, 어느새 축음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하얀 공간이 새카맣게 변했다.

    ***

    “헉……!”

    “이진아!”

    비틀거리는 내 몸을 이든이 붙잡았다. 거친 숨을 내쉬던 나는 놀란 눈으로 이든을 쳐다봤다.

    다시 돌아온 건가? 얼른 주위를 둘러보니, 한이진과 대화하기 전에 있었던 던전의 풍경과 똑같았다. 흘끗 시계를 보니 시간도 몇 초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진아, 괜찮아? 갑자기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통신 아이템도 감쪽같이 손에서 사라졌다. 나는 아이템을 쥐고 있었던 손에 힘을 꽉 줬다.

    주먹을 쥔 채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준비가 다 끝났는지 박윤성이 능력자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이제 출발합시다!”

    “네!”

    스킬 지속 시간이 끝나지 않은 여민준을 선두로 다시 달릴 준비를 했다. 이번에 중간 보스 몬스터가 나오면 두 번째 그룹이 앞에서 싸워야 했다. 여민준의 뒤에 자리를 잡은 능력자와 눈이 마주쳤다.

    “…….”

    “…….”

    -지금 같은 던전에 있는 외국인 능력자들을 조심해. 그중에 배신자가 있어.

    리암 화이트. 미국의 대형 길드인 발두르의 부마스터. 이곳 타임 어택 던전에 빠진 외국 길드는 발두르가 유일했다.

    저 능력자가 배신자일까?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리암 화이트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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