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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134)화 (134/228)
  • 134화

    “…….”

    나는 고민했다. 이 말을 마스터들에게 하는 게 좋을까? 어쩌면 일부러 우리에게 혼란을 주려고 한 말일 수도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또다시 라이수에게 놀아나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게 아니라면…….

    “한이진 능력자?”

    “네?”

    “무슨 일 있습니까?”

    옆에 있던 박윤성이 물었다. 눈치가 빠른 그는 내가 무언가로 고민에 빠진 걸 기민하게 알아챘다. 어둡게 가라앉은 회색 눈을 보니 그에게는 숨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결국 박윤성에게 털어놓았다.

    “그게, 라이수가…….”

    “…….”

    “무슨 의미가 있는 말이었을까요?”

    내 물음에 박윤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흠칫 놀란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타임 어택 던전……?”

    “……!”

    타임 어택 던전.

    시간제한이 걸려 있는 던전을 말했다. 제한된 시간 내에 클리어하지 못하면 포털이 열리지 않아 영영 빠져나갈 수 없다고 들었다. 이 타임 어택 던전들은 발생하는 수가 적어서 그런지 소설에서도 잘 나오지 않았었다.

    처음에는 던전에 들어간 사람들이 나오지 않아서 미궁으로 불렸다. 실력 있는 길드들이 제시간에 클리어하고 나서 시간제한이 걸려 있었다는 걸 깨달았었고 말이다.

    최소 S급의 타임 어택 던전. 아주 까다로운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라이수가 말한 대로면…….

    “앞으로 1시간 안에 S급 던전을 클리어해야 한다는 거네요? 이 인원으로.”

    “라이수의 말이…… 맞다면 말입니다.”

    박윤성 역시 라이수의 말을 신뢰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괜히 우리를 교란시켜서 공략을 서두르다가 전멸하길 바라고 한 말일 수도 있었다.

    혼자서 수많은 고등급 능력자들을 휘두른 인물이었다. 그런 라이수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박윤성 혼자 결론을 짓지 못하고 다른 마스터들에게 이를 전달했다.

    “라이수 그 새끼는 끝까지……!”

    차강태가 분통을 터트리며 허공에 주먹을 날렸다. 다른 마스터들의 얼굴에도 곤혹스러운 기색이 흘렀다. 이제 제대로 공략해 보려고 하는데 라이수의 말에 또 휘둘려야 한다니.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서진한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만약 정말 이곳이 타임 어택 던전이면……. 이렇게 의논하는 것조차 시간 낭비가 될 겁니다.”

    “…….”

    서진한의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다들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목숨이 직결된 문제니 그럴 만도 했다. 눈치를 보던 나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저기…….”

    “……?”

    마스터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 시선에 잠시 멈칫했지만, 꿋꿋하게 입을 열었다.

    “잘하면 1시간 안에 던전을 공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이진 능력자, 그건…….”

    “제 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겠죠.”

    “…….”

    박윤성이 뭘 걱정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다른 능력자들도 말이다. 서지안이 그룹을 저렇게 나눈 건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녀가 생각한 작전은 세(Sæ) 던전에서 프레이야 길드가 최대한 나를 보호하며 움직였던 진형의 축소판이었다.

    하지만 이 던전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스펠헤임 던전은 나에게 있어서 시련이나 마찬가지였고, 서하준도 짜증 나는 놈이었지만 그래도 하나 깨달은 건 있었다. 주변의 능력자들에게 의지하기만 해선 안 된다는 걸 말이다.

    라이수. 그자가 거짓말을 한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진실을 말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됐든 이 불안하기 짝이 없는 던전에서 어떻게든 빨리 나가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진지한 눈으로 능력자들을 보며 말했다.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제가 말하는 대로 움직여 주세요.”

    곧 내 말을 들은 능력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

    콰과광!

    “지금!”

    서지안의 외침에 준비하고 있던 능력자들이 동시에 몬스터를 향해 공격 스킬을 썼다. 동굴 벽에 달라붙어 있던 박쥐 모양의 네임드 몬스터가 긴 비명을 울부짖었다.

    “캬아아아!”

    「어둠에 숨는 자

    등급: ??

    레벨: ??

    ? ?? ?? ??, ?? ?? ??

    …….」

    어차피 보나 마나 S급일 터였다. 우리가 조우한 첫 번째 중간 보스 몬스터. 나는 마스터들의 보호를 받으며 반대편 동굴 벽에 물러나 있었다.

    이번 공략은 스피드가 생명이었다. 1시간 안에 S급 이상인 던전을 클리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출발할 때부터 여민준에게 보조 스킬을 걸었고, 우리는 그대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선두에서 함께 달리며 말이다. 여차하면 다른 능력자에게 또 보조 스킬을 걸기 위해서.

    나 혼자서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했겠지만, 이든의 바람 능력 덕분에 나는 간신히 선두의 스피드에 맞출 수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우리는 십 분 만에 중간 보스 몬스터와 맞닥뜨릴 수 있었다.

    “캬아악--!!!”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동굴 벽에 붙은 채 몸이 녹아내리던 중간 보스 몬스터가 온몸으로 충격파를 발사했다. 공기가 웅웅거리며 진동을 울렸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우리를 덮쳤다.

    “윽……!”

    하지만 그 충격파는 제대로 닿기도 전에 차단됐다. 나는 박쥐의 앞에 굳건하게 서 있는 누군가를 쳐다봤다.

    여민준이 아무리 키가 커도 한낱 사람이었다. 중간 보스 몬스터 앞에 혼자 있는 그의 모습은 곧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위태로웠다. 하지만 그의 다리는 여전히 땅 위를 단단히 밟고 있었다.

    그의 두 손에 들려 있는 건 무기가 아니었다. 여민준의 키를 훌쩍 넘는 커다란 방패였다. 곧 여민준이 스킬을 쓰자 방패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주변에 성벽이 쌓인 것처럼 동굴 안을 밝은 빛이 가득 채웠다.

    “공격해!”

    “캭! 캬아악!”

    서지안의 외침에 다시 공격이 들어갔다. 결국 중간 보스 몬스터의 공격은 우리 쪽에 한 번도 닿지 않고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곧 시스템 음성이 경쾌하게 들렸다.

    [∬∋∂∀-S99의 중간 보스 몬스터 ‘어둠에 숨는 자’를 처치하였습니다. 아이템이 귀속됩니다.]

    “…….”

    시스템 음성에 드디어 이 던전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름이 이상하게 불분명하게 들렸다. 혹시나 해서 귀속된 아이템을 확인하니 처음 보는 문자가 떴다.

    ∬∋∂∀? 이거 그냥 특수 문자 아닌가? 왜 던전 이름이 이런 걸로 뜨는 거지? 그래도 대부분은 북유럽 신화와 관련된 것들로 떴었는데…….

    고개를 갸웃하자, 전투를 마친 능력자들도 이상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처럼 인벤토리를 확인한 능력자들의 얼굴이 의아해졌다. 그리고 남은 아이템을 회수하고 돌아온 여민준을 향해 차강태가 입을 열었다.

    “수고했다. 민준아.”

    “아닙니다.”

    보조 스킬을 받기 전에도 뛰어난 탱커였던 여민준은 지금 혼자서 중간 보스 몬스터의 공격을 모두 막아 낼 정도로 스킬 숙련도가 올랐다. 여민준의 눈이 자연스럽게 나를 향했다.

    “한이진 능력자의 보조 스킬이 아니었다면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하하…….”

    그동안은 가장 강한 공격 스킬을 가진 능력자에게 보조 스킬을 걸었는데, 그건 주변에 보조할 수많은 능력자들이 있는 공대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적은 인원으로 공략할 때는 여민준 같은 탱커에게 스킬을 걸어 주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맞았다. 여민준이 몬스터의 공격을 모두 막아 내고 스킬로 어그로까지 끈 다음 빈틈이 생긴 틈을 타 공격하니 훨씬 수월하게 물리칠 수 있었다.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한 40분 정도 남았습니다.”

    “음…….”

    20분 정도라. 다음에 또 중간 보스 몬스터가 있다면 클리어까지 빠듯한 시간이고, 이다음 바로 보스 몬스터가 있다면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무튼 던전의 상황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일단은 서둘러 정비하고 바로 출발하죠.”

    “그럽시다.”

    힐러가 없기 때문에 상처를 치료하거나 부족한 기력을 채우기 위해선 포션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여민준을 비롯해 직접 앞에서 싸운 능력자들은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인벤토리를 슬쩍 둘러보았다. 방금 중간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고 분배받은 아이템이 뭔지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무언가 수상한 걸 발견했다.

    ‘이게 뭐지?’

    「외부 통신기(S)

    외부의 존재와 통신할 수 있음.

    사용 제한 횟수 있음. 채널 제한 있음.」

    이름이 통신기라는 걸 보니 던전 내에서 연락이 가능한 통신 수단 같은데. 그런데 사용 제한 횟수가 있는 데다가 채널 제한이 있다니. 채널은 던전을 말하는 거겠지? 던전 밖이랑 통신하는 게 아니라 던전 안에서만 통신이 가능한 건가? 그런데 그러면 외부의 존재란 건 뭐지?

    궁금증을 느끼다가 아이템을 꺼냈다. 이름은 통신기라고 하는데, 모양은 좀 이상했다. 그냥 네모나고 긴 스틱 같은 모양이었다. 손으로 잡으니까 마이크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게 도대체 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머릿속에 어떤 음성이 들렸다.

    [……진?]

    “……!”

    [……이진?]

    치직, 치지직. 거슬리는 소음과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그리고 잠시 멈춘 후 조금 선명한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박……호수?]

    “……!”

    그리고 동시에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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