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앤드류 베일리가 짓는 저 표정이 어딘가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세(Sæ) 던전을 공략했을 때 해송하가 지었던 표정과 왠지 비슷했다. A급인 해송하가 등급 이상 현상 때문에 탐지를 하지 못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을 때와 느낌이 비슷했다.
앤드류 베일리의 등급이 뭐라고 했더라. A급이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불길함에 침을 꿀꺽 삼키자 앤드류 베일리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탐지가…… 안 됩니다.”
“뭐?”
차강태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또 무언가를 말하려는 걸 서진한이 말리듯 팔을 잡고 자신이 앞으로 나섰다. 서진한의 시선이 난감해하고 있는 앤드류 베일리에게 향했다.
“탐지 스킬이 A급이라고 했습니까?”
“네…….”
“숙련도는요?”
“거의 한계치에 가깝습니다.”
“음…….”
발두르 길드의 대표로 올 정도면 A급이라고 할지라도 그만한 이유는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스킬에 꽤 자부심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등급의 차이는 존재하는 법이었다.
“아무래도 이 던전, S급 이상인 것 같군요.”
“젠장.”
우려하던 사태에 차강태가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아무리 고등급 능력자들만 있다고 해도 S급 이상이라니. 공대가 와서 공략해야 할 등급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었을 마스터들의 얼굴에도 난감한 빛이 흘렀다.
“그래도 우선은 탐지라도 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
서지안의 나지막한 말에 능력자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예상했던 일에 나는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보조 스킬을 걸어 드리겠습니다.”
“오…….”
앤드류 베일리의 얼굴에 흥미가 떠올랐다. 그가 호기심을 감추지 못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흠칫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
왜 저러지? 의아한 눈으로 나도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싱글싱글 웃고 있는 리암 화이트가 있었다.
“부럽네. 앤드류.”
“아니, 그게…….”
왜인지 앤드류 베일리가 난감하다는 듯이 리암 화이트를 흘끗거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어색하게 얽혀 들었다.
“네가 먼저 경험할 줄이야. 나중에 소감 말해 줘.”
“아, 그래. 알았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앤드류 베일리는 쩔쩔매며 나에게 다가왔다. 둘이 왜 그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하다 앤드류 베일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악수……?”
“네, 제 손을 잡으시면 됩니다.”
“아, 그렇군요.”
고개를 크게 끄덕인 앤드류 베일리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겉보기와 다르게 조금 딱딱하고 큰 손이 내 손을 감쌌다. 나는 정신을 집중해서 보조 스킬을 썼다.
“와…….”
“……?”
앤드류 베일리의 반응은 어딘가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 다른 능력자들도 스킬을 쓰면 좀 이상한 행동을 보였지만, 앤드류 베일리는 그 느낌이 좀 달랐다. 외국인이라 반응이 좀 남다른 건가? 작게 탄성을 내지르는 앤드류 베일리를 보다가 손을 살살 빼냈다.
“다 됐습니다.”
“아하, 그렇군요.”
얼굴이 확 밝아진 앤드류 베일리가 신기하다는 듯이 나와 닿았던 손을 들여다봤다. 그의 얼굴이 묘하게 붉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앤드류 베일리에게 리암 화이트가 가까이 다가왔다.
“어때? 어떤 느낌이었어? 응?”
“음, 그게…….”
“손이 뜨거웠나? 아니면 차가웠어? 그것도 아니면 다른 부분에 느낌이 왔나? 응?”
“…….”
속사포로 쏟아지는 질문에 앤드류 베일리가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가 질린 표정을 지으며 리암 화이트에게 대답했다.
“손이 좀 뜨거웠고…… 아니, 젠장.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잖아.”
“그럼 나중에 감상문이라도 써 줄래?”
“알았어, 알았다고. 보고서 제출해 줄게!”
“…….”
투덕거리는 앤드류 베일리와 리암 화이트를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봤다. 무슨 감상문에 보고서까지 제출해? 그냥 농담으로 치부하기에는 두 사람 다 쓸데없이 진지한 얼굴이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흠흠, 탐지 스킬을 써 보겠습니다.”
앤드류 베일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에 기묘한 글자들이 떠 올라 있었다. 얼굴 가득 기쁜 기색을 띤 앤드류 베일리가 크게 외쳤다.
“이제 보입니다!”
앤드류 베일리의 탐지 스킬은 길을 ‘보는’ 타입이구나. 보통의 탐지계 능력자들은 해송하나 강수현처럼 맞는 길을 ‘느껴서’ 찾는 타입인데. 눈으로 직접 보는 건 어떤 느낌일지 조금 궁금해졌다.
“A급 능력자가 보조 스킬을 받아야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건……. 일단 추정 등급을 S급이라 생각하면 되겠군요.”
“하, S급 던전이라…….”
우선 길을 찾는 문제는 해결했다. 하지만 다른 문제들도 남아 있었다. 전략가 길드라고 일컬어지는 헤임달 길드의 서진한과 서지안을 중심으로 짧은 회의가 이어졌다. 서진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보통 S급 던전이면 중간 보스 몬스터와 보스 몬스터, 혹은 중간 보스 몬스터 둘과 보스 몬스터 하나일 확률이 높습니다. 중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전력을 셋으로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보조 스킬을 받을 능력자도 미리 정하는 게 좋겠어요.”
서진한과 서지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능력자들의 시선은 또 나를 향했다. 나는 그들을 보며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저도 무스펠헤임 던전에서 알게 되었는데, 제가 하루에 보조 스킬을 쓸 수 있는 횟수는 네 번 정도가 한계입니다. 그 이상은 정신력에 한계가 오더라고요.”
“아…….”
내 말에 서진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담담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오히려 잘 되었군요. 오늘은 탐지 스킬을 쓰기 위해 한 번 쓰셨으니, 중간 보스와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릴 능력자에게만 써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서진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지안이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녀가 꺼낸 동그란 모양의 아이템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곳에서 사람 모양의 작은 모형들이 둥둥 떠올랐다. 그 모형에는 각 능력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제가 일단 그룹을 나눠 봤어요. 첫 번째 그룹은 여민준 부마스터를 주력으로 했고, 두 번째 그룹은 리암 부마스터, 세 번째 그룹은 박윤성 마스터, 그리고 보조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서지안은 이 짧은 시간에 이곳에 있는 능력자들의 밸런스를 고려해서 그룹을 나눴다. 물론 그녀가 헤임달 길드의 부마스터이기 때문에 다른 고등급 능력자들의 능력을 미리 알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데이터가 있어도 이 짧은 시간에 빠릿빠릿하게 작전을 짜는 건 말이다.
첫 번째 그룹은 여민준을 비롯해 서지안과 다른 능력자가 있었고, 그쪽에서 내가 보조 스킬을 걸 능력자는 주력인 여민준인 것 같았다. 뒤에 있을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첫 번째 그룹은 부마스터들 위주로 그룹이 짜여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그룹의 주력은 리암 화이트였다. 아마 중간 보스 몬스터가 또 등장하면 상대할 그룹인 것 같았다. 리암 화이트는 아직 발두르 길드의 부마스터이긴 한데, 실질적으로는 그가 마스터 대우를 받고 있으니 전력으로서는 충분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그룹은 화려했다. 무려 마스터들이 그곳에 다 있었으니까. 박윤성을 주력으로 해서 차강태와 서진한이 있었다. 아무래도 보스 몬스터가 SS급일 수도 있는 걸 상정해서 짠 모양이었다.
나머지 보조 그룹에는 나와 이든, 그리고 길을 찾을 앤드류 베일리가 있었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작전에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음?”
하지만 사람 모형에서 한 명이 빈다. 내가 그걸 깨닫자마자, 다른 능력자들의 시선도 한 사람에게 쏠렸다.
“당신은 어쩔 겁니까? 나예림 본부장.”
“…….”
나예림은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협회 한국 지부의 수장이나 다름없는 그녀가 협회 아래에 있는 던전에 대해 몰랐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스터들의 위협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전력이 되어 줄지 서지안은 의심이 된 것이다.
곧 나예림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저도 협력하겠습니다.”
“…….”
그 말에 능력자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의심이 간다고 해도, 나예림 역시 고등급 능력자이기 때문에 전력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그녀를 무조건 의심해서 배제한다면 S급 던전 공략이 쉽지 않을 것이다.
마스터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박윤성이 앞으로 나왔다. 그가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미안하지만 나예림 본부장, 정황상 우리가 당신을 온전히 믿을 수 없다는 걸 이해해 줬으면 합니다.”
“…….”
박윤성이 나예림에게 내민 건 계약서였다. 아마도 우리를 배신하거나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제약을 내건 계약서일 것이다. 척 봐도 계약서 표면이 반들반들한 것이, 꽤 높은 급의 계약서인 것 같았다.
그것을 고요한 눈으로 보던 나예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예림이 계약서에 서명하고, 그녀는 두 번째 그룹에 들어가게 되었다.
길이 보이는 앤드류 베일리를 선두로, 그의 곁을 첫 번째 그룹의 능력자들이 지켰다. 그리고 중간에는 두 번째 그룹이, 마지막 세 번째 그룹이 내가 포함된 보조 그룹을 지키듯이 둘러쌌다.
그렇게 막 발걸음을 뗐을 때였다. 나는 문득 마지막에 라이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만약 12시 안에 해결하지 못하면…….’
‘그럼 영원한 잠에 빠져들 거야. 공주님.’
왜 하필 지금 그 말을 떠올린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하니 상당히 찝찝한 말이었다. 나는 황급히 시계를 쳐다봤다.
시계는 정확히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