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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132)화 (132/228)
  • 132화

    연회에 참석했던 능력자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며 그들을 응시했다.

    방금 소리친 사람은 토르 길드의 마스터 차강태였다. 그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바로 협회의 본부장인 나예림이었다. 그녀는 연회장 안에서보다 조금 지친 것 같은 얼굴로 차강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모르는 일이기는! 협회 밑바닥에 떡하니 이런 곳이 있는데!”

    “……?”

    이런 곳?

    나는 차강태의 외침에 그제야 주변을 살펴보았다. 능력자의 눈은 그사이 어둠에 익숙해져 있었다.

    주변은 울퉁불퉁한 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뚫려 있어야 할 천장은 다 막혀 있었고, 그곳에는 고드름 같은 뾰족한 것들이 매달려 있었다.

    젠장. 아무리 봐도 동굴 안이잖아, 여긴. 세(Sæ) 던전의 해저 동굴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지만 말이다. 거기는 주변에 물이 있어서 습한 느낌이 들었지만 여기는 아니었다. 동굴 안이라 똑같이 싸늘하긴 하지만, 종유석이나 석순의 모습도 좀 다르단 말이지.

    하지만 지금 문제는 그런 게 아니었다. 능력자들이 모인 곳에서 탐탁지 않은 목소리가 섞였다.

    “우리끼리 다퉈 봤자 소용없는 일입니다. 우선은 이 던전에서 빠져나가도록 하죠.”

    헤임달 길드 마스터인 서진한. 그가 은테 안경을 치켜올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에 차강태가 분개하며 외쳤다.

    “하여간 협회 놈들이란!”

    씩씩거리던 그가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다가갔다. 차강태의 뒤에 서 있던 토르 길드 부마스터 여민준이었다. 둘이서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 얘기하기 시작했다.

    서진한은 이곳이 던전이라고 했다. 나 역시 둘러보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협회 밑에 던전이 있었다니. 그리고 나예림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한이진 능력자, 정신이 들었습니까?”

    “박윤성 마스터…….”

    이곳에 떨어진 능력자는 대략 열댓 명 정도였다. 토르 길드의 마스터와 부마스터, 헤임달 길드의 마스터와 부마스터, 그리고 협회의 본부장인 나예림과 오딘 길드의 나와 이든, 그리고 박윤성이 있었다. 그 외에도 같은 길드의 고등급 능력자들도 몇 명 정도 있었고, 또…….

    “여기가 한국의 던전인가?”

    “…….”

    리암 화이트는 잠시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캄캄한 동굴 안에서도 그의 금발은 번쩍번쩍 빛이 났고, 그가 밟고 있는 딱딱하고 거친 동굴 바닥은 마치 레드 카펫이 깔린 파티장 같았다.

    그는 흥미로운 얼굴로 동굴 벽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영문 모를 말들을 중얼거렸다. 그의 옆에 있는 다른 외국인 능력자가 인상을 쓰며 리암 화이트를 말리고 있었다.

    “가만히 좀 있으라니까, 리암!”

    “이것 좀 봐, 앤드류. 신기하지 않아?”

    “동굴은 미국에도 많아!”

    마치 낯선 곳에서 철없이 구는 어린 아들과 그를 말리는 학부모를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을 떨떠름한 눈으로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박윤성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괜찮습니다.”

    “목에 상처……는 포션으로 치료했습니다.”

    그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목에 손을 댔다. 그러자 뒤늦게 라이수의 칼에 베였던 게 생각났다. 순간 그때의 느낌이 떠올라 소름이 끼쳤으나, 아무 흉터 없이 반들반들한 살갗이 만져지자 점차 가라앉았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

    하지만 내 대답에 박윤성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한이진 능력자. 라이수 그자가 한이진 능력자를 노릴 거라는 걸 알고 행동했어야 했는데, 제가 감정에 치우쳐서 미숙한 대처를 했습니다.”

    “어…….”

    확실히 박윤성은 라이수 앞에서 지나치게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말이다. 연회장 안의 마스터들도 박윤성과 비슷했다. 그래서 더 라이수에게 휘둘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대형 길드의 마스터들이 그동안 라이수에게 쌓인 게 많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걸 다 생각하고 라이수가 혼자 연회에 참석했던 거라면, 정말 악랄하기 짝이 없었다. 적이지만 정말 종잡을 수 없고 비상한 사내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쟁쟁한 능력자들을 농락하며 그동안 악의 군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거겠지. 그놈의 스펙이 너무 뛰어난 탓이다. 작가가 작정하고 그렇게 설정한 건데 뭘 어쩌겠어.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다니까요. 그리고 저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는걸요. 그렇게 쉽게 잡혀서 곤란하게 만들었고…….”

    “아닙니다. 한이진 능력자는 잘못이 없습니다.”

    “맞아, 이진이는 잘못한 거 없어!”

    “…….”

    박윤성과 이든이 동시에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들이 소리친 것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깨어나셨군요.”

    서진한과 서지안이 제일 먼저 다가왔다. 그리고 차강태와 여민준도 나를 보자마자 얼른 이쪽을 향했다. 순식간에 내 주변을 능력자들이 둘러쌌다.

    “무사히 눈을 뜨셔서 다행입니다.”

    “상처는 괜찮으신가요? 많이 놀라셨을 텐데, 그 외에도 안 좋은 곳 있으면 말해 주세요.”

    “하하, 겉보기와 달리 튼튼해서 마음에 드네!”

    “…….”

    여민준, 서진한, 차강태가 동시에 말했다. 그 덕분에 말소리가 온통 뒤섞여서 무슨 말을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뉘앙스는 비슷했다. 어쨌든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나를 걱정한 것 같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능력자라면 그 정도는 견뎌야지. 암!”

    “윽…….”

    차강태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내 등을 팍팍 두드렸다.

    그가 워낙 화통한 성격인 건 나도 알고 있었지만, 좀 곤란했다. 왜냐하면 그는 힘과 체력 스탯이 최고치일 게 틀림없는 S급 능력자였고, 나는 고작해야 정신력과 마력치가 조금 높은 B급 능력자였기 때문이었다. 죽을 것 같은 통증이 나를 덮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러다 애…… 아니, 능력자 잡겠어요!”

    “어어…….”

    박윤성과 서진한이 동시에 소리치자 차강태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아마도 그의 주변에 있는 고등급의 능력자들과는 일상인 행위였을 것이다. 나는 겨우 한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전 괜찮……습니다.”

    “이진아, 괜찮아?”

    “괜찮……다니까.”

    내 뒤에 있던 이든이 부드러운 손길로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분홍색의 눈에 안타까운 빛이 흐르더니, 곧 날카롭게 변했다. 이든이 내 앞에 있는 능력자들을 노려보며 외쳤다.

    “우리 이진이 괴롭히지 마. 이 나쁜 새끼들아!”

    “…….”

    아니, 날 위해 주는 건 고마운데. 우리 제발 분위기 좀 살피자, 이놈아. 앞에 있는 능력자들은 죄다 S급이라고. 이 겁 없는 분홍색 포메라니안 같으니.

    나는 그만하라는 듯이 이든의 옷깃을 붙잡고 살짝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나가기 전에 고등급 능력자들한테 죽을 일 있나.

    그러나 눈치 없는 이든은 나를 보며 활짝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넌 내가 지켜 줄게!”

    “고, 고맙다…….”

    떨떠름하게 대답하고 난 후, 고개를 돌리자 차강태가 의외로 당황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뒷머리를 손으로 긁적이며 말했다.

    “아이고, 미안하다. 버릇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아닙니다. 정말 괜찮은데, 힘 조절만 좀 해 주시면…….”

    “아하하, 그래. 사나이가 화끈하고 좋구만!”

    “…….”

    차강태는 직접 보니 조금…… 아재 같은 느낌이 나네. 소설에서는 그냥 마초 같은 이미지로만 묘사됐었는데 말이다. 내 말에 금방 기운이 난 차강태가 기분 좋다는 듯 껄껄 웃었다.

    그리고 그를 한심한 눈으로 보고 있던 서지안이 입을 열었다.

    “아무튼 이런 곳에 계속 있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아요. 한이진 능력자도 깨어났으니 한번 이동해 보는 게 어떨까요?”

    서지안은 헤임달 길드의 부마스터이자 마스터인 서진한의 동생이었다. 오빠를 닮아 총명해 보이는 눈이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반짝 빛났다.

    “하지만 아무도 길을 모르잖아. 여기 탐지 스킬 가지고 있는 사람 있나?”

    “…….”

    차강태의 물음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들 S급의 고등급 능력자들이지만 탐지 스킬은 한 명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강수현이 같이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아무래도 강수현과 강유현은 같이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그래도 휘말리지 않아서 다행이지.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또 한숨을 삼켰을 때였다.

    “여기 탐지 스킬 가진 능력자 있습니다.”

    “……!”

    부드러운 미성이 동굴 안을 울렸다. 능력자들의 시선이 곧바로 한곳에 쏠렸다. 바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외국인들에게 말이다.

    리암 화이트가 우리 쪽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누군가를 가리켰다.

    “여기 있는 앤드류가 탐지 스킬을 가지고 있어요.”

    “오!”

    나지막한 리암 화이트의 말에 차강태가 손뼉을 쳤다. 그리고 다른 능력자들의 얼굴에도 안도하는 빛이 스쳤다. 나예림이 입을 열지 않아 아무 정보도 알 수 없는 던전에서 길까지 찾지 못하면 최악의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고등급 능력자들만 모인 파티라고 해도 말이다.

    “그럼 우리 빨리 파티 짜서 길을 찾아보죠.”

    “그래, 팍팍 가 보자고!”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던 능력자들이 생기를 띠며 외쳤다. 상태 창을 열어 파티를 짠 다음 모두 기대하는 눈으로 리암 화이트의 옆에 있는 능력자를 쳐다봤다.

    “음, 저는 리암의 비서인 앤드류 베일리라고 합니다. A급 스킬이긴 하지만 한번 시도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앤드류 베일리가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는 곧 난감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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