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라이수를 직접 보는 건 나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설에서조차 라이수의 모습을 잘 묘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상상하기만 했었다.
암흑가의 수장이니까 당연히 장태산 같은 우락부락한 남자를 생각했는데, 이렇게 예쁘장한 남자라니. 놀란 눈으로 라이수를 쳐다봤다.
“흐음.”
“…….”
그리고 라이수 역시 집요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물건을 품평하듯 몸을 위아래로 훑는 눈길에 절로 긴장되었다.
혼혈인가? 머리카락은 검은색인데 눈은 외국인처럼 파랗다. 그리고 한국인이라고 하기에는 피부가 너무 하얗고 창백했다. 그런데 아파 보이거나 병약해 보이지는 않아서 묘한 느낌이 들었다.
“합격.”
“……?”
뜬금없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기분 좋은 듯 웃고 있는 라이수의 얼굴은 너무나도 현실감이 없었다. 주변에 다른 능력자들이 쫙 깔려 있고, 그에게 무기까지 들이밀고 있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여유로웠다. 이 거대한 연회장 안에서 그와 나만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은 상황에 나는 그저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길고양이처럼 생겼는데, 아무래도 이미 임자 있는 집고양이인 모양이야.”
“……!”
사람을 보고 고양이라니. 정말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라이수의 말에 나는 당황하기만 했다.
“우리 집에 갈래? 내가 잘 키워 줄게.”
“그게 무슨…….”
라이수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나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옆에 있던 강유현과 뒤에 있었던 강수현과 이든까지 우르르 앞으로 몰려와 시야가 차단되었다.
“헛소리는 그쯤 해. 라이수.”
박윤성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들어 본 적 없는 낮고 싸늘한 음성이었다. S급 랭커인 그가 내뿜는 거센 기운에 연회장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왜? 나도 그냥 축하만 해 주려고 온 건데.”
“닥쳐……!”
마치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박윤성에게서 흘러나왔다.
한국의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 능력자들은 어리둥절하고 있었고, 국내의 능력자들은 모두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대체 라이수가 무슨 생각인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고등급 능력자들이 깔린 곳에 혈혈단신으로 오다니. 아무리 협회 안이 중립이라지만, 그건 표면적인 것뿐이었다. 분명 이대로는 능력자들에게 잡혀서 감옥행일 텐데.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게 뭔지 짐작도 되지 않는 게 문제였다. 원작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환영회에 라이수가 혼자 와서 깽판 치는 건 없었던 일이라고!
쿠궁.
“뭐지?”
연회장 바닥이 작게 울렸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이 울리기 시작하는 진동에 사람들의 시선이 라이수에게 쏠렸다.
“씨발, 일단 공격해!”
보다 못한 차강태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자 능력자들의 무기가 한꺼번에 라이수를 향해 쏟아졌다.
콰광!
협회는 모든 지부에 결계가 쳐져 있었다. 특히 건물 안쪽은 능력자들의 능력까지 제어하는 아이템이 깔려 있다고 하던데, 랭커들에게는 소용없는 일인 것 같았다. 어마어마한 공격이 폭격처럼 라이수를 덮쳤다.
“윽……!”
그 반동에 나 혼자였다면 당연히 연회장 밖으로 튕겨 나갔겠지만, 주변에서 나를 감싸고 있어서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강유현이 내 앞에, 강수현과 이든이 양옆을 막아 주고 있었다. 하지만 바람이 꽤 사납게 불어서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
잠시 후, 눈을 떴을 때는 라이수가 있었던 연회장 바닥이 푹 꺼져 있었다. 엉망으로 된 곳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분명 라이수가 있었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쉽게 끝난 건가? 소설의 최종 보스를 벌써 처리한 거야?
아니, 설마. 그럴 리가 없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누군가가 날카롭게 외쳤다.
“환영이었어!”
“……!”
분하다는 듯 외친 목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그에 능력자들이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라이수가 아직 이곳에 남아 있을 확률이 높았다.
생각해 보니 라이수의 능력은 모두 베일에 싸여 있었다. 소설에서 나온 적이 없어서 짐작도 하기 어려웠다. 박윤성이나 송차현이라면 어느 정도 알지 않을까 싶은데, 방금 봤던 라이수가 환영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면 그들도 라이수의 능력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제길, 이런 변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거야. 눈살을 찌푸리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잡아끌었다.
“어?”
“…….”
눈이 마주쳤다. 그는 분명 내 뒤를 지키고 있던 오딘 길드의 능력자였다. 이렇게 가까이 본 건 오늘이 처음이고 통성명도 하지 못한 사이지만 오며 가며 몇 번 봐서 눈에 익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인지 얼굴이 좀 이상했다. 흐리멍덩한 눈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런 눈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티르 길드의 서하준. 그가 에반 리의 암시 스킬에 걸렸을 때 꼭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깐……!”
능력자가 엄청난 힘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소리를 지르려던 나는 목구멍에서부터 무언가가 턱 하고 막히는 게 느껴졌다.
“하여간 너희들은 너무 쉽다니까.”
“……!”
목소리가 라이수와 똑같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환영 스킬을 쓰면서 에반처럼 아이템으로 다른 능력자인 척하고 있었던 건가? 만약 그게 아니면 이건 대체…….
“한이진!”
능력자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확 쏠렸다. 어느새 시퍼런 칼날이 내 목의 대동맥 부근을 꾹 누르고 있었다.
젠장. 무스펠헤임 던전에서도 그 난리를 피웠는데 또 잡히다니.
이를 악무는 나에게 또다시 라이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공주님에게 선물을 하나 줘야겠는데.”
“선물은 무슨, 씨발.”
“크큭.”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린 라이수가 목에 댄 칼날을 꾹 눌렀다. 그러자 화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이를 악물었다.
“윽…….”
“넌 피를 마셔도 능력을 높여 준다더라.”
“젠장…….”
역시 라이수도 알게 되었군. 그래서 이 난리를 치면서까지 날 납치하려고 직접 온 건가? 눈살을 찌푸리며 엄지손가락을 움찔거리자 커다란 손이 내 손가락을 무자비하게 비틀었다.
“아윽!”
“같은 수법은 원래 두 번은 안 통하는 거야. 얘야.”
“큭, 놔……!”
라이수는 에반과 백시후의 일을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두 놈 모두 던전에서 무사히 빠져나갔던 게 틀림없었다. 정말 최악이었다.
“널 굳이 던전에 집어넣지 않고, 피만 뽑아서 포션만 만들어도 이익이 어마어마해지더라고.”
“……!”
그건 나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왜 그런 걸 떠올리지 못했나 싶었다. 물론 직접 보조 스킬을 거는 게 능력치가 훨씬 더 많이 오르겠지만, 던전을 공략하는 수많은 능력자들이 내 피를 넣은 포션을 먹고 조금씩이나마 강해지기만 해도 던전 공략 성공률이 올라가고 클리어 시간도 엄청나게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굳이 던전 공략이 아니라고 해도, 자신의 능력을 올리고 싶은 능력자들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당장에 진짜 한이진만 하더라도 로키 길드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수상한 기계에 손을 대다가 나와 몸이 바뀌지 않았던가. 그런 게 아니더라도 충분히 개인의 욕망 때문에 포션을 원하는 자들이 넘쳐날 거다.
“흠, 근데 오늘은 입양하지 못할 것 같네. 역시 너무 방해하는 놈들이 많아.”
“……!”
“대신 오늘은 선물을 하나 주고 갈게.”
선물? 대체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야. 난 이를 악물며 외쳤다.
“네가 그냥 꺼져 주는 게 선물이야, 이 새끼야!”
“앙칼지고 귀엽네.”
“미친 새끼.”
라우페이 길드에는 진짜 미친놈들밖에 없는 건가? 얼굴을 확 일그러트린 순간이었다.
쿠구구궁!
“바닥이……!”
아까보다 바닥이 흔들리는 게 한층 더 심해졌다. 몸을 잘 가눌 수도 없을 정도였다. 비틀거리는 내 몸을 라이수가 꽉 잡았다.
“슬슬 시간이 됐군.”
“뭘…… 하려는 거야!”
“글쎄.”
뒤를 돌아볼 수는 없지만 분명 재미있다는 듯 싱글싱글 웃고 있을 것 같았다. 이윽고 연회장 바닥이 쩌적, 하고 갈라졌다.
“만약 12시 안에 해결하지 못하면…….”
“뭐?”
“그럼 영원한 잠에 빠져들 거야. 공주님.”
“뭔 개소리……!”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라이수가 갑자기 팍 밀었다. 어? 하는 사이에 내 몸이 균열 사이로 떨어졌다. 잠깐 마주친 라이수의 눈이 웃고 있었다. 그가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안녕, 또 보자.’
동시에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이진……!”
그리고 동시에 누군가가 나를 끌어안는 게 느껴졌다. 갈라진 연회장 바닥 밑은 온통 컴컴하기만 했다. 그렇게 속절없이 밑으로 떨어져 버렸다.
***
“으윽…….”
잠시 후, 눈을 떴다.
“여긴…….”
컴컴한 주변을 둘러보는데, 누군가가 시끄럽게 소리치는 게 들렸다. 무의식적으로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의 얼굴이 불쑥 앞을 가렸다.
“이진아, 정신이 들어?”
“이든?”
이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지막에 나를 붙잡은 게 이든이었나? 하긴, 바람 능력자인 이든이 스피드가 제일 빠르긴 하지. 그럼 나머지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다시 커다란 목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이제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
“……?”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지?
나는 놀란 눈으로 한구석에 몰려 있는 사람들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