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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130)화 (130/228)
  • 130화

    큰일이다. 예상치 못한 일에 몸이 굳어 버렸다.

    분명 이건 뭔가가 잘못된 거라고, 항변해야 할 입술마저 딱딱하게 굳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서 가.”

    “……!”

    부드럽게 나를 미는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박윤성에 이어 강유현마저 나에게 단상 위로 올라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키자 주변에서 호들갑 떠는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우와, 형 진짜 멋져요.”

    “이진아, 저 여자가 네 이름 부르는데? 뭐 하는 거야?”

    “하하…….”

    어색하게 웃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얼떨떨하긴 했지만, 이것도 내가 벌인 일들의 결과라면 받아들여야 했다. 나는 천천히 단상 위로 올라갔다.

    단상 위에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거대한 기운이 넘쳐흐르는 S급들이 집요하게 바라보는 와중에 카메라 플래시는 계속해서 터졌고, 내 업적을 말하는 나예림의 차분한 말이 귓가에 웅웅거렸다. 나예림의 말투나 행동이 차분해서 그나마 제정신을 유지한 것 같았다.

    [……그리하여 이 모든 노고를 치하하여 작은 보상을 드리는 바입니다.]

    표창과 상장을 받고 나예림과 악수했다. 그녀가 어딘가를 보라는 듯 눈짓해서 고개를 돌리자, 곧바로 플래시가 터졌다. 눈을 부릅뜬 채로 굳었던 나는 다시 나예림의 안내에 따라 마이크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여기서 뭘 하라고?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나예림이 짧게 말했다.

    “소감 말씀 부탁드립니다.”

    “…….”

    그런 것까지 해야 해?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끌어 올려 웃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무심코 단상 위에서 정면을 바라보다, 연회장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를 향해 꽂힌 무수히 많은 시선들. S급을 비롯해 고등급 능력자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흉흉했다.

    여기서 소감을 말하라고? 소감…….

    고민하던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순간 연회장 안이 썰렁해졌다. 내가 말하긴 했지만, 내가 들어도 너무 형편없는 소감이었다. 식상한 데다가 짧기까지. 그나마 패시브 스킬로 덜덜 떨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마지막으로 허리를 숙이고 인사하자마자 굴러떨어지듯이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그제야 뒤늦게 박수가 다시 터졌다. 자리로 돌아가는 길은 주변이 어땠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고, 자리에 앉자 심장이 무섭도록 쿵쿵거렸다.

    “이진아, 잘했어.”

    “형, 진짜 멋졌어요.”

    “그래…… 고맙다.”

    이든과 강수현이 입바른 말을 해 주고 나서야 겨우 쿵쿵거리던 가슴이 진정되었다.

    와, 진짜…….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자연재해가 덮친 것 같은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채 마시지 못한 샴페인을 입 안에 쏟아부었다.

    “하…… 좀 살겠다.”

    이후에는 무난하게 시간이 흘렀다. 애초에 환영회라는 이름에 충실하게 머리 아픈 문제를 논하는 자리도 아니었다. 협회는 앞으로도 길드와 능력자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모두 힘을 합쳐서 위기를 극복하자 등의 식상한 말을 나예림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줄줄 말하고 나자 정해진 식순이 거의 끝나 갔다. 이제는 정말 파티를 할 시간이었다.

    소설에서는 이 부분이 꽤 자세하게 나왔었지. 왜냐하면 강유현이 외국 대형 길드의 능력자들과 안면을 익히는 자리였으니까 말이다. 페어인 나는 오늘 밤 내내 그의 옆에 꼭 붙어 있어야 할 처지였다. 그 김에 나도 궁금했던 외국인 능력자들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한이진 능력자.”

    “어……?”

    키가 훤칠한 미인이 나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진한 갈색 머리카락.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한이진이 결코 작은 키가 아닌데도 나보다 훨씬 키가 커서 가까이 다가오니 그녀를 올려다봐야 했다. 색이 옅은 갈색 눈이 나를 똑바로 직시했다.

    “스카디 길드의 마스터를 맡고 있는 아나스타샤 바라노프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아나스타샤 바라노프……!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강한 공격 스킬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능력자였다. 소설에서도 그 스킬만 따지면 SS급인 강유현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서술이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다가 허리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한이진이라고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스카디 길드의 마스터, 아나스타샤가 내 옆을 흘끔거렸다. 그리고 싱긋 웃더니 앞으로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여민준처럼 악수를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아나스타샤가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부디 타샤라고 불러 주세요.”

    “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아나스타샤의 애칭이 타샤라는 건 소설을 읽어서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애칭을 부를 수 있는 인물은 지극히 적었다. 주인공인 강유현마저 애칭을 허락받기까지 오래 걸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읽었던 부분까지 아나스타샤랑 친해지지 못해서 딱딱하게 성까지 붙여 부르고 그랬으니까.

    그리고 애초에 아나스타샤가 이런 성격이었나? 러시아인인 그녀는 표정도 한결같이 딱딱해서, 다른 능력자들에게 친절하게 말하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게다가 다른 연합 길드와 다르게 한국을 돕는 걸 싫어해서 환영회 때부터 기분 안 좋은 티를 팍팍 내고 그러지 않았나? 대체 이게…….

    그러나 내 상념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나스타샤를 제치고 누군가가 내 앞에 불쑥 몸을 들이민 거였다.

    “반갑습니다. 저는 발리 길드의 마스터, 류하오란(유호연)이라고 합니다.”

    “어…….”

    번역 아이템이 중국어를 번역하면서 머릿속에 한글로 바꾼 이름까지 입력해 줬다.

    류하오란. 한국 이름으로는 유호연. 중국의 대표적인 대형 길드인 발리의 마스터. 소설에서는 엄청난 지략가라고 했었지. 그리고 호기심 많은 성격이라고도 했다. 실제로 나를 보는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한이진과 같은 나이대의 능력자인데도 키가 어린아이 정도로 작아서 나는 그를 한참이나 내려다봐야 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후에 시간이 괜찮으시면 따로 차 한잔 마시면서 얘기를 할까요? 중국에서 특별히 가져온 차가 있는데…….”

    “류하오란. 아직 내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무례하게 구는군.”

    아나스타샤가 눈살을 찌푸리며 류하오란을 노려봤다. 류하오란은 시큰둥한 얼굴로 아나스타샤를 쳐다봤다.

    “굼뜨게 행동한 건 그쪽이면서 왜 나한테 뭐라고 합니까?”

    “뭐라고?”

    “아, 너무 위 공기만 맡으니 주변이 잘 안 보이시나?”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네, 발리 길드 마스터.”

    금방이라도 싸우기라도 할 것처럼 위태로웠다. 게다가 둘 다 내 앞에서 보인 모습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사납게 부딪치는 S급들의 기운에 나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거기까지.”

    강유현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제야 두 사람의 신경전이 뚝 하고 멈췄다. 그리고 마치 잘 훈련된 강아지처럼 내 쪽을 휙 돌아봤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나를 보며 둘 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건, 그러니까…… 저는 절대 폭력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물론 저 러시아인은 맨손으로 곰도 때려잡을 위인이지만요.”

    “지금 말 다 했나?”

    “좀 더 남긴 했는데, 더 해 드려요?”

    “…….”

    둘이 사이가…… 나쁜 거 맞나? 묘하게 장단 맞추는 게 사이가 좋은 것도 같다. 하긴, 연합의 길드 마스터들은 마주치면 으르렁거리지만 함께 싸울 땐 죽이 꽤 잘 맞았었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돌렸다. 왜인지 주변이 웅성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언가의 예언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한평생 만나기 어려운 능력자들이 한데 모여 있으니 연회장 안은 당연히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어쩐지 그게 다가 아닌 느낌이었다.

    웅성거리던 연회장 안이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개성 강한 능력자들이 한순간 입을 다무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나는 마치 홍해처럼 갈라지는 사람들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내 주변을 감싼 주연들 말고, 다른 능력자들은 왜인지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하며 옆으로 물러났다.

    뚜벅뚜벅.

    “……!”

    작은 발걸음 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검고 긴 머리카락을 한데 묶어 오른쪽 어깨 위에 늘어뜨린 남자는 피부가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눈을 크게 떴다.

    게다가 남자임이 분명한데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언뜻 보면 여자라고 착각할 정도로 가느다란 몸에 작은 키. 하지만 몸 전체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몸에 꼭 맞는 하얀 정장과 코트를 입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

    “……!”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남자가 입을 연 동시에, 시간이 멈춘 것 같았던 연회장 안의 능력자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였다. 그야말로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그저 그 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이런.”

    “큭…….”

    “환영 인사가 격하네.”

    수많은 능력자들에게 무기로 위협당하는 와중에도 남자는 여유로웠다. 그의 새파란 눈이 재미있다는 듯이 휘어졌다.

    “……당신이 여긴 왜 왔습니까?”

    “박윤성.”

    목에 칼날이 들이밀어져 있는데도 웃고 있는 남자는 어쩐지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오랜만이네.”

    “라이수……!”

    라이수? 저 남자가?

    나는 깜짝 놀라며 분노한 박윤성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라이수라고 불린 남자와 또 눈이 마주쳤다.

    “마치 공주님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마녀가 된 기분이야.”

    한숨과 함께 중얼거린 라이수가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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