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뭐, 뭐라고?”
“눈 돌리라고.”
“……?”
이 또라이 새끼가 또 뭐라는 거야. 강유현을 어이없는 눈으로 보다가 다시 발키리들을 흘끗거렸다. 발키리들을 너무 쳐다보지 말라는 건가? 왜? 히로인이 있어서 강유현이 질투하고 있는 건가? 하여간 주인공의 경계심이란…….
그냥 보기만 한 건데. 그런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굳이 주인공을 자극할 필요는 없으니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돌렸다.
“박윤성 마스터! 오랜만에 보네.”
장신의 남자가 박윤성에게 다가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노랗게 탈색한 짧은 스포츠머리에 정장으로 가릴 수 없는 탄탄한 근육질의 몸, 그리고 S급 특유의 심상치 않은 느낌. 설마 토르 길드의 마스터 차강태인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네, 오랜만입니다. 차강태 마스터.”
“……!”
역시 차강태다. 박윤성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차강태와 악수하는 걸 뒤에서 흘끔거렸다.
확실히 차강태의 포스는 엄청났다. 마스터를 포함해서 길드원들의 단순한 무력만 따지면 토르 길드가 국내 1위일 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힘과 체력 스탯만 정점으로 찍었을 것 같은 인상이다. 그의 뒤에 서 있는 길드원들도 하나같이 그런 느낌이 났다. 약간…… 헬스장 트레이너 팀장과 그 뒤에 주르륵 서 있는 트레이너들을 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비유가 좀 이상하긴 한데 지금으로선 찰떡인 예시다. 어째 다들 복붙 수준으로 차강태와 느낌이 비슷하단 말이지.
“…….”
“……?”
그러다가 차강태 바로 뒤에 있는 사람과 눈이 딱 마주쳤다. 차강태만큼이나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남자인데, 왜인지 나를 보는 눈빛이 매서웠다. 나도 모르게 뒤로 조금 주춤거렸다. 그러자 그 남자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걸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아…… 안녕하세요?”
얼떨결에 인사한 다음 남자를 올려다봤다. 나보다 훨씬 키가 크다. 옆에 있는 강유현과 키가 맞먹을 것 같았다. 아니, 강유현보다도 큰 건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데, 남자가 계속 말을 이었다.
“토르 길드의 부마스터, 여민준이라고 합니다.”
“네, 저는…….”
“한이진 능력자 맞으시죠.”
“……!”
나를 알고 다가온 거였구나. 토르 길드의 부마스터 여민준. 물론 소설에서도 나왔던 인물이었다. 힘도 체력도 좋아서, 던전에서 탱커 역할을 톡톡히 하는 능력자였지. 강유현과 상성도 좋아서 던전 공략에 큰 도움을 준 S급 능력자. 마스터인 차강태와 함께 토르 길드의 핵심 역할을 하는 능력자였다.
“맞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낯간지러운 말을 한 여민준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자는 의미겠지. 나도 별다른 생각 없이 여민준의 손을 잡으려고 앞으로 뻗었다.
탁.
“……?”
큼지막한 팔이 앞을 가로막았다. 놀란 얼굴로 옆을 돌아보니, 강유현이 차가운 얼굴로 여민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함부로 잡지 마.”
“뭐?”
그러면서 말은 나에게 하고 있다.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동시에 얘가 또 왜 이러나 싶었다. 발키리들이면 몰라도 갑자기 여민준한테는 왜? 눈살을 찌푸리는데, 강유현이 이번에는 여민준을 향해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여민준 능력자.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한이진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자제해 주십시오.”
“아…….”
내가 라우페이 길드에 납치당할 뻔했던 일을 말하는 건가. 강유현의 말에 여민준은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여전히 무표정하긴 하지만 죄책감 어린 말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 아뇨.”
아니, 전적이 있으니 이러는 걸 이해는 하는데……. 근데 그럴 거면 이런 곳에 데려오질 말든가. 나도 그냥 숙소에 있는 게 더 좋거든? 악수도 못 하게 할 거면 대체 왜 굳이 데려온 건가 싶었다. 후,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여민준을 바라보았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악수는 한 셈으로 치죠.”
“알겠습니다.”
“…….”
그러고 보니 여민준은 능력자가 되기 전에 직업 군인이였다고 했던가. 그래서 그런지 행동 하나하나가 각이 잡혀 있었다. 표정이 딱딱하긴 하지만 서하준처럼 나를 탐탁지 않아 하는 느낌은 아닌 것 같아서 불편하진 않았다. 오히려 저 열렬한 눈이 누군가를 닮은 것 같단 말이지.
“저도 꼭 한이진 능력자의 스킬을 받아 보고 싶습니다.”
“아…… 하하.”
역시 이 사람도 보조 스킬에 눈독 들이고 있었나 보다. S급 보조 스킬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확인하고 싶겠지. 라우페이 길드도 혈안이 되어서 나를 납치하려고 했었으니 말이다. 오히려 그 일로 내가 더 유명해진 것 같았다.
“기회가 된다면, 같은 던전에 들어갈 수 있겠죠.”
“노력하겠습니다.”
여민준은 지나치게 진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의 열렬한 눈빛이 조금 부담스러워질 무렵, 단상 위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각 길드의 능력자분들께서는 자리에 착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나예림이 경직된 얼굴로 회장 안을 둘러봤다. 그에 여민준이 나를 향해 가볍게 묵례를 한 후 자리로 돌아갔고, 나 역시 배정된 자리에 앉았다.
능력자들이 모두 자리에 앉으니 회장 안이 좀 더 잘 보였다. 내가 앉아 있는 자리, 즉 오딘 길드가 앉은 주변으로 국내 대형 길드의 능력자들이 차례대로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외국인 능력자들이 앉아 있었다. 저쪽이 그 세계 연합의 길드들인 모양이었다.
딱히 외국인이라고 신기한 건 아닌데,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이 갔다. 그러다가 한 외국인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
짙은 금발에 파란 눈. 아니, 한쪽만 파란색이고 한쪽은 검은색이다. 내가 알기로 스킬을 쓰지도 않는데 오드 아이인 외국인 능력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설마 리암 화이트? 화이트 기업의 후계자이자, 귀공자 리암?
소설에서 주인공인 강유현과 함께 인기 남자 캐릭터 투톱을 달리던 리암 화이트라니. 실제로 보니 엄청난 미모였다. 나는 주변의 불온한 공기를 느끼지도 못하고 멍하니 리암을 쳐다봤다. 그리고 리암 역시 나를 끈질기게 바라보고 있었다.
싱긋.
“……!”
웃었어……!
금발 벽안의 귀공자가 웃어 주는 파괴력은 엄청났다. 만약 내가 여자라면 영혼이 탈탈 털렸을 것 같다. 하지만 남자인 내게 큰 감흥은 없었다. 많이 놀라기는 했지만 말이다.
리암 화이트도 설마 내 보조 스킬이 탐나는 건가? 하긴, 소설에서 호기심 많은 성격이라고 표현했었으니 관심을 가질 만은 하다. 나는 리암 화이트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주고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국 능력자 협회 서울 지부 본부장인 나예림이라고 합니다.]
단상에 서 있는 나예림이 마이크에 대고 말을 이었다.
[우선, 한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던전 등급 이상 현상을 무사히 막아 낸 각 길드 능력자분들에게 협회를 대표해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나예림의 차분한 목소리가 회장 안에 울려 퍼졌다. 분명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는데도 사무적이기 짝이 없는 음성이라 그런지, 던전 안에서 구르고 구른 나까지 절로 숙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라니까.
[이 자리는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고, 새로운 분들을 맞이하기 위해 마련했습니다. 뜻깊은 화합과 협력의 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화합과 협력이라. 진정한 화합과 협력의 장이 되기까지 지옥의 불꽃길이 열리긴 하겠지만. 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앞에 놓인 샴페인 잔을 들어 올렸다.
[우선, 본격적인 환영식을 시작하기 전에 각 길드의 요청으로 이상 현상을 막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능력자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간소한 보상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호명한 능력자는 단상 위로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아, 이건 그 타이밍이로군. 스포츠로 따지면 MVP 선수 선정! 당연히 강유현이 호명될 테니까,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샴페인 잔에 입술을 댔다. 그리고 과일 맛이 나는 샴페인을 여유롭게 들이켜려고 했을 때였다.
[한이진 능력자는 단상 위로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쿨럭……!”
입에 머금었던 샴페인을 죄다 뱉고 말았다. 그리고 미친 듯이 기침을 했다. 주변에서 깜짝 놀라며 나를 돌아봤다.
“형, 괜찮아요?”
“이진아, 괜찮아?”
“한이진.”
“쿨럭, 쿨럭.”
누가 건네준 건지 모를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다. 손수건을 줬으면 등도 좀 두드려 줄 것이지. 하지만 아무도 내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서러움을 조금 느끼는 중에도 머릿속이 어지럽게 팽팽 돌아갔다.
왜지? 왜 강유현이 받아야 할 보상을 내가 받게 된 거지? 아무리 S급 보조 스킬이 던전 공략에 도움이 되었다고 해도, 그 스킬을 받아서 보스 몬스터들을 무찌른 건 강유현이었잖아? 그러니 원작의 내용이 이렇게까지 바뀔 리는 없을 텐데…….
혼란한 머리로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박윤성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흠칫한 나에게 박윤성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정했으면 올라가요. 한이진 능력자.”
“아니, 저는…….”
“당신에게는 충분히 자격이 있습니다. 다른 길드도 만장일치로 동의한 일이에요.”
“…….”
그 말에 나는 떨떠름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동시에 주변에서 깜짝 놀랄 정도로 큰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