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나는 거울 안의 내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이런 옷을 입는 게 처음이라서 그런지 유독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밤엔 박윤성이 말했던 협회가 주도하는 환영식에 참여해야 한다. 그래서 연승원이 준비해 준 정장으로 갈아입었는데, 영 태가 나지 않는 것 같았다. 아직 머리를 만지지 않아서 그런가? 이마를 덮는 곱슬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다 갈아입으셨습니까?”
“아, 네.”
마지막으로 남색 정장의 깃 부분을 손끝으로 매만지고 돌아섰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정장처럼 보이지만, 강화 스킬을 걸었는지 아이템처럼 옵션을 보여 주는 창이 주르륵 떴다. 오딘 길드에서 지급한 거라 상태는 모두 최상급이었다.
뭐, 이 정도면 갑자기 공격받아도 몇 번쯤은 거뜬히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몰려와 머리를 만지고 메이크업도 해 주었다.
“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네, 오늘 환영식은 대대적으로 기사가 나갈 겁니다. 인터뷰를 하실 수도 있고요.”
“하…….”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한 연승원이 준비하고 있는 나를 흘끗 보더니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도망가고 싶다. 격하게 도망가고 싶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곧 만나게 될 능력자들이 궁금하기도 했다. 아직 다른 대형 길드의 능력자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도 했고, 또 새롭게 합류할 외국의 대형 길드 능력자들도 궁금한 탓이었다.
우선 국내의 대형 길드 중에서 아직 토르 길드, 헤임달 길드를 만나지 못했다. 세(Sæ) 던전과 무스펠헤임 던전 공략에 참여했던 용병 능력자들과는 안면이 생겼지만, 그래도 그중에서 성유빈만큼 유명한 능력자는 없었지.
토르 길드 마스터인 차강태와 헤임달 길드 마스터인 서진한. 둘 다 박윤성만큼이나 유명하고 랭킹에도 드는 능력자들인데, 이번 기회에 만날 수 있으려나.
그리고 세계 연합의 길드들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발두르 길드, 유럽 연합의 우르 길드, 러시아의 스카디 길드와 중국의 발리 길드. 모두 쟁쟁한 길드이고 장차 주인공인 강유현을 도울 랭커들이다. 나는 환상에서 잠깐 본 그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물론 하나로 뭉치기까지 쉽지 않은 가시밭길이긴 했지만……. 원작과 스토리가 상당히 달라진 지금은 어쩌려나. 그래도 그 괄괄하고 배배 꼬인 성격들은 여전하겠지? 쉽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S급 능력자들은 거대한 능력을 받는 대신 인성을 팔아먹었는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도 정의심 하나로 결국엔 같이 똘똘 뭉치긴 하는데, 중간 과정에 우여곡절이 상당히 많았었단 말이지.
음, 신음을 작게 내뱉으며 거의 다 세팅된 머리를 바라보았다. 고불거리던 앞머리가 쫙쫙 펴져서 깔끔하게 뒤로 넘어갔다. 한이진의 몸에 빙의하고 처음으로 이마가 훤히 드러난 모습을 봤다.
메이크업까지 하고 나니까 정장이 꽤 그럴싸하다. 하긴, 다른 S급 능력자들이 워낙 잘나서 그렇지 한이진도 못생긴 얼굴은 아니다. 처음 봤을 땐 무슨 아이돌인 줄 알았지. 근자감이 치솟는 것과 동시에 온몸에 힘이 불끈 솟았다.
좋아. 기죽지 말자! 당당하게 S급 능력자들을 만나고 오자고!
그렇게 속으로 외치고 호기롭게 문을 열었다.
“이진아!”
“형!”
“…….”
그리고 조금 솟아올랐던 근자감은 흔적도 없이 파사삭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바로 나를 기다리고 있던 S급 녀석들 때문이었다.
아니, 이든은 S급이 아니지만……. 근데 이 녀석도 치렁치렁했던 머리를 넘기니 인상이 확 달라 보였다. 평소의 장난기 있는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게다가 주연 보정인지 자비 없이 얼굴이 반짝거렸다. 이든이 입고 있는 연한 갈색의 정장이 묘하게 분홍색과 비슷해 보여서 그의 머리카락과도 잘 어울렸다.
강수현은 하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게 전체적으로 색소가 연한 강수현과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다른 녀석들과 달리 머리카락은 반만 뒤로 넘겼지만, 그게 오히려 더 나이에 맞고 꽤 근사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강유현은……. 더 말해 뭐 해. 마치 남신 조각상 같은 모습을 보며 멍청하게 눈을 비볐다. 진짜 미쳤다. 저 검은색 목티는 죽어도 벗을 수 없는 건지, 그게 좀 거슬리긴 했지만 검은색 정장을 쫙 빼입은 강유현은 늘씬한 흑표범을 보는 것 같았다.
다들 정말 우월하다. 이 사이에 내가 끼면 완벽한 오징어가 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와, 이진아. 정장 잘 어울린다.”
“형, 오늘 멋지네요.”
“…….”
한이진을 순식간에 오징어로 만들어 놓은 녀석들이 입에 발린 말을 지껄였다.
역시 도망갈까. 아프다고 핑계 대고 가지 말까? 용식이와 용순이도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아서 아직도 숙소에 있는데, 가서 돌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익숙한 머스크 향이 확 풍겼다.
“어서 가자.”
“어…… 어?”
성큼 다가온 강유현이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에게 휙 끌려갔다. 이든과 강수현도 얼른 뒤를 따라왔다.
“그럼 가실까요?”
진짜 다들 작정하고 꾸미니 장난이 아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넓은 리무진 안에 구겨 넣어졌다. 멍한 얼굴로 창밖의 어두운 풍경을 쳐다봤다.
리무진은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협회 서울 지부는 특히 폐쇄적인 기관인데, 오늘은 문을 활짝 열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기자들까지 불러서 대대적인 환영회를 한다는 말이 진짜인 모양이었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박윤성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협회 건물이 익숙한 듯 물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얼굴 자체가 프리 패스라도 되는 것처럼 사람들이 길을 비켜 줬다. 새빨간 레드 카펫을 당당하게 걷는 박윤성과 오딘 길드의 능력자들에게서 엄청난 박력이 느껴졌다.
“어서 오십시오. 박윤성 마스터님.”
협회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짙은 녹색 정장을 입은 여자가 박윤성을 맞이했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칼 단발을 한 여자는 얼굴에 웃음기 하나 없이 냉철한 분위기를 풍겼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예림. 한국 능력자 협회 서울 지부의 본부장. 거의 협회의 실세인 사람이었다. 나는 박윤성의 뒤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훑어봤다.
“……오랜만이군요. 본부장님.”
“예.”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인 나예림의 시선이 박윤성의 뒤로 향했다. 우연인지 가장 먼저 그녀의 시선이 꽂힌 곳이 바로 나였다.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오딘 길드 능력자분들도 환영합니다.”
“……?”
이거…… 내가 대답해야 하는 건가? 보통 강유현을 보면서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다 떠나서 내가 뭐라도 되는 듯이 대답해도 되는 일인가?
혼란을 느끼고 있는데, 나예림은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괜히 뻘쭘함을 느끼며 나예림의 뒤를 따라갔다. 생각보다 넓고 큰 연회장 안을 둘러보자 점점 현실감이 떨어졌다. 찰칵찰칵, 유독 나와 옆에 선 강유현을 찍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이래서 주인공 옆에 있으면 안 되는데. 괜히 같이 찍혀서 오징어처럼 나온 사진이 인터넷에 대문짝만하게 올라가는 거 아닌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이진 능력자!”
“어?”
맙소사. 연회장에 배정받은 자리가 프레이야 길드의 바로 옆이었다. 나를 발견한 성유빈이 잽싸게 다가왔다.
“이제 몸은 괜찮으십니까? 입원하셨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네, 그랬죠.”
“죄송합니다. 제가…… 지켜 드려야 했는데……. 그 나쁜 놈들에게 큰일 날 뻔하셨다고요.”
성유빈의 눈에 살기가 스쳤다. 그녀는 무스펠헤임 던전 공략 막바지에 게이트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초조하게 날 기다리기만 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했던 일도 아주 중요한 역할이었기 때문에 탓할 수는 없었다. 강수현도 그렇고, 성유빈도 그렇고, 정의로운 주연들은 별것 아닌 일에 죄책감을 많이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전 괜찮습니다. 성유빈 능력자도 무사해서 다행인걸요.”
“한이진 능력자……!”
왈칵,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성유빈이 내 이름을 외쳤다. 그러자 자리에 앉아 있던 발키리들에 벌떡 일어났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대장님.”
“이러다가 사진 찍히면 큰일 나요. 큰일 나.”
“자리로 돌아가실게요~”
무뚝뚝한 얼굴의 해송연, 장난스러운 말투의 한여름,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차민희가 성유빈을 붙들고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나는 뒤늦게 연회에 참석한 발키리들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전투복을 입지 않은 발키리들이라니! 정말 신선한 느낌이었다. 물론 전투복을 입은 발키리들도 무척 멋졌지만, 정장과 드레스를 입은 발키리들도 눈이 부셨다. 대부분 고등급 능력자들이라 피지컬이 좋아서 그런지 다들 모델처럼 멋져 보였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발키리들을 보는데, 바로 옆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눈 돌려, 한이진.”
“……!”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강유현의 활활 타는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