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그건 안 되지.”
“하아…….”
이 쓸데없을 정도로 선한 주인공들 같으니. 박윤성도 그렇고 강유현도 그렇고,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왜 안 받겠다는 거야. 고가의 아이템이라서 그러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소리를 버럭 지르고 싶은 걸 참으며 강유현을 쳐다봤다. 그의 차분한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원하는 게 뭐야?”
아이템이 진짜라는 걸 알게 된 강유현이 이대로 포기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방금 했던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까지…….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매일 밤, 내 방에 와서 아이템 써.”
“……뭐?”
강유현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싫어!”
“싫어?”
“그래!”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당연한 의문이 듦과 동시에 강유현을 향한 맹렬한 거부감이 들었다. 또 어제처럼 불상사가 일어나는 건 사양이었다.
하지만 강유현은 여전히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의 눈이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남자 두 명이 누워 있어서 방석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강유현의 서늘한 눈이 다시 나를 향했다.
“어제는 의욕이 넘쳤던 것 같은데.”
“아니, 이건…….”
묘하게 추궁하는 듯한 말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억울하기도 했다. 강유현이 앉은 채로 자 버린 바람에, 그대로 두고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금 도우려고 한 것뿐이었는데.
……역시 방석을 깐 건 좀 오버였나? 하필 강유현 잠버릇이 나빠서 나를 껴안고 자는 바람에 이상한 오해를 받게 생겼잖아. 막을 길 없이 얼굴이 확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기억 안 나냐? 네가 어제 앉아서 잤잖아.”
“그래서?”
“나는 그냥, 좀 누워서 자게 하려고…….”
“그리고?”
“…….”
강유현은 집요하게 물었다. 마치 확신범을 보는 것 같은 눈이었다. 무슨 오해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잠시 당황하던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어제는 네가 멋대로 날 끌어안고 잔 거거든? 네가 잠버릇 나빠서 그런 거지, 내가 일부러 같이 잔 건 줄 알아?”
“내가 널 끌어안았다고?”
“그래!”
그제야 좀 의기양양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나는 잘못한 거 없다. 그저 인간적으로 느낄 수 있는 측은지심 때문에 오지랖을 조금 부린 것뿐이라고. 떳떳하게 쳐다보자 강유현은 왜인지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럼 더더욱 나 혼자 아이템을 쓰면 안 되겠어.”
“……뭐?”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말이야. 네가 계속 도와줘야겠다.”
“왜 그렇게 되는데?”
어이가 없었다. 대체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건가.
어쨌든 나는 매일 밤 주인공의 방에 오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거절하려는 의사를 피력하려 했으나, 강유현이 더 빨랐다.
“한이진.”
“왜…… 왜?”
“네가 먼저 시작한 일에 책임을 져야지.”
“…….”
시발……. 다 내 탓이냐!
결코 거절할 수 없을 거라는 듯이, 강유현은 단호한 얼굴을 했다.
***
달칵.
“하아…….”
등 뒤에서 문이 닫히자마자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그저 도결이와 같은 숙소에서 지내기 위해 주인공이 가진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도록 조금 도우려고 한 것뿐인데. 항상 내가 하는 일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하하, 입에서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소리가 웃음소리처럼 흘러나왔다. 좆 됐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내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형?”
“……?”
고개를 돌리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강수현이 보였다.
“강수현?”
강수현이 여긴 웬일이지. 강유현 만나러 왔나? 얼른 강유현의 방문 앞에서 멀어지며 강수현에게 다가갔다.
“강유현 만나러 왔냐?”
“…….”
숙소에서 강유현과 강수현이 둘이서 만나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알고 보니 틈틈이 교류하면서 지냈던 건가? 참 특이한 형제라고 생각하면서 강수현을 바라보는데, 왜인지 강수현은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며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형 찾으러 온 거예요.”
“나를?”
“네.”
손가락으로 나를 한 번 더 가리키고 나서야 강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왜? 아, 하긴. 어제부터 내내 방에 없었겠구나. 나는 굳게 닫힌 문을 흘끗 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일단 내 방에 가자.”
“…….”
강유현의 방 앞에서 시끄럽게 굴 수 없으니, 강수현을 잡아끌고 내 방으로 향했다. 그동안 강수현은 굳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진짜 무슨 일이길래 저러지? 흘끗 시계를 보니 아직 이른 아침인데, 내가 방에 없다는 걸 알아챈 것도 용했다.
“꺄우우……. 꺄우…….”
“삐이이……. 삐이…….”
“……잘 자네.”
용식이와 용순이는 내가 없는 줄도 모르고 세상모르게 잘 자고 있었다. 어쩐지 기운이 좀 빠져서 피식 웃으며 자고 있는 모습을 내려다봤다.
“……형.”
“응?”
그제야 강수현도 내 방에 데려왔다는 걸 깨달았다. 놀란 얼굴로 바라보자, 뒤에 있던 강수현이 가까이 다가왔다.
“유현 형 방에서 뭐 했어요?”
“그게, 그러니까…….”
“어제부터 거기 있었죠?”
“…….”
얘는 진짜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날 감시라도 하고 있는 건가?
순간 섬뜩한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눈치가 빠르니까 짐작한 거겠지. 나는 본의 아니게 강유현 방에서 자는 바람에 머리카락과 옷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강수현의 눈이 머리를 매만지는 나를 날카롭게 훑었다.
“흠, 박윤성 마스터가 부탁한 일이 있어서 그랬어.”
“……그래요?”
“그래. 생각보다 시간이 좀 오래 걸려서…….”
게다가 왜인지 강수현의 눈빛이 좋지 않았다. 마치 밤새도록 논 다음 외박하고 들어온 딸을 보는 아버지의 눈빛 같았다. 비유가 좀 이상하긴 한데,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눈살을 찌푸리다가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그런데 웬일이야?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아…….”
소파에 앉은 강수현이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형, 제가 던전에서…….”
“던전? 무스펠헤임?”
“네.”
갑작스러운 화제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스펠헤임 던전에서는 워낙 일이 많았기 때문에, 강수현이 왜 갑자기 그때 얘기를 꺼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제가 그때, 형을 구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뭐?”
강수현은 그렇게 말하더니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더욱 푹 숙였다. 나는 강수현의 말을 잠시 이해하지 못하다가 어떤 장면을 떠올렸다.
‘형……!’
‘너도 서하준 막으러 가!’
‘하지만…….’
에반 놈에게 납치당할 때, 강수현은 막으려고 했지만 하지 못했다. 에반의 정신계 스킬에 당한 서하준이 폭주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공대 전체가 말려드는 바람에 나 역시 강수현이 무리해서 에반과 싸우는 것보다 서하준을 말리는 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강수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강수현은 이를 악물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줄곧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뭐 그런 걸로 미안해하고 그러냐.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정말요?”
“당연하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
오히려 그때 강수현이 공대를 외면하고 날 도우려고 했다면……. 그건 캐붕이지. 그리고 강수현까지 휘말려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 에반은 내 보조 스킬을 받은 바람에 만만치 않은 상대였으니까. 강수현과 다르게 올라운더인 에반은 공격 스킬까지 가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아찔한 상황이었구나 싶었다.
“네가 안 다쳐서 다행이지. 나도 결국 무사하고.”
“…….”
“공대도…… 뭐, 전멸하지는 않았었다고 하니.”
비록 티르 길드는 망했지만, 용병으로 왔던 타 길드 능력자들은 피해가 크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지원팀 능력자들은 강수현 덕분에 대부분 무사히 빠져나왔다고 들었다. 강수현은 나를 구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나는 내심 뿌듯했다. 내가 좋아했던 주연 캐릭터가 제 역할을 해낸 거니까 말이다. 역시 주인공 동생답다니까.
“그러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마라. 어?”
“…….”
하지만 그럼에도 의기소침해 보이는 강수현에게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폭신해 보이는 연한 갈색 머리카락에 손이 닿자, 강수현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주친 눈이 파르르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당연하지.”
“…….”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강수현이 입을 꾹 다물었다. 대체 이 작은 머리통으로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우선 감촉 좋은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곧 강수현이 기분 좋은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다음에는…….”
“응?”
“다음에는, 제가 반드시 형 지켜 줄게요.”
“하하.”
강수현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말했지만, 나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래, 그래.”
“…….”
“다음엔 네가 나 지켜 줘.”
그렇게 말하며 강수현의 머리를 다시 헤집었다. 어리다고는 해도 덩치 큰 남잔데 너무 애 취급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강수현도 얌전히 있는 바람에 분위기에 휩쓸리고 말았다.
“진짜예요…….”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