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어, 그게…….”
당황한 얼굴로 강유현을 쳐다봤다. 이렇게 갑자기 문이 열리고 강유현이 나오다니. 예상치 못한 일이라 당황해서 두 눈을 깜박였다.
“한이진?”
“……!”
하지만 생각보다 강유현의 얼굴이 불쾌해 보이진 않았다. 저번처럼 방으로 오라는 연락을 했다면 몰랐을까, 내가 먼저 불쑥 찾아오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아 보였다. 그저 조금 의아한 모양이었다. 강유현의 눈이 놀라고 있는 내 얼굴을 훑었다.
“음, 그러니까…….”
재빨리 눈을 굴렸다. 이렇게 갑자기 맞닥뜨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된 거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강유현에게 아이템을 써야 한다. 당장 그럴싸한 핑계를 생각해 봤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몇 가지 떠오르긴 했지만, 뭘 말하든 어색하기만 했다.
이든과 강수현이라면 몰라도, 내가 강유현에게 치근덕거릴 만한 접점이…….
‘아.’
딱 하나 있네. 퍼뜩 떠올리자마자 내 입술이 멋대로 움직였다.
“디, 디즈미플러스!”
“뭐?”
“전에 봤던 미드 보고 싶어서. 네 방에만 나오잖아, 디플.”
“아…….”
내 말에 강유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 부탁을 강유현이 과연 들어줄까. 친한 사이도 아닌데 방 안에 들여보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강유현은 자신의 영역에 민감한 주인공…….
“들어와.”
“…….”
……이었을 텐데. 강유현은 너무나도 선선히 문을 열어 줬다. 나는 잠시 놀라며 강유현을 쳐다봤다.
“안 들어와?”
“아니, 들어가.”
강유현이 다시 문을 닫을 기세라, 나는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갔다. 문에서 슬쩍 비켜섰던 강유현이 내가 들어가자 천천히 문을 닫았다.
탁.
“…….”
여전히 강유현의 방 안은 어두웠다. 아직도 한창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을 테니 밝은 곳이 싫은 거겠지. 소설의 등장인물들도 발을 들이지 못했던 공간 안에서 한동안 눈을 깜박였다. 두 번째지만 이번에도 역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번에 뭐 봤었지?”
“아, 저거. 지금 목록에 떠 있는 거.”
커다란 화면에 내가 봤던 드라마가 떠 있자 얼른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결제하고 싶어도 못 하는 걸, 강유현 이놈은 평소에 잘 보지도 않는지 내가 봤던 드라마가 고스란히 첫 줄에 떠 있었다. 이럴 거면 내 방에도 깔아 달라고!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드라마가 시작하기에 얼른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물었다.
“과자는 없어?”
“…….”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는 당연히 짭짤한 과자를 먹어 줘야지. 게임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물론 게임 할 때는 컵라면이 더 맛있지만, 어쩐지 강유현이 게임하면서 컵라면을 먹는 장면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과자 정도는 가지고 있겠지? 조금 기대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강유현의 큰 몸이 움찔거렸다.
“……잠깐 기다려.”
“그래.”
인벤토리를 뒤지는지, 강유현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얘는 무슨 과자를 찾으려고 인벤토리를 뒤져? 당연히 방에 쌓아 둬야 하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기왕이면 짭짤한 감자칩을 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달달한 캐러멜 팝콘 같은 거.
“…….”
속으로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화면을 보는데, 아무래도 옆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결국 움직이고 싶지 않은 고개를 끼긱거리며 돌렸다.
“너 뭐…… 하냐?”
“…….”
허공을 노려보는 강유현의 눈이 빨갛다. 아니, 왜 빨갛지? 쟤 스킬 쓸 때만 눈 색깔 변하는 거 아니었어? 게다가 스킬을 써도 파랗게 변하지, 빨갛게 변하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이윽고 강유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조금…… 기다려.”
“뭐? 야, 어디 가!”
강유현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놈이 강수현처럼 순간 이동 스킬은 못 쓸 텐데, 내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뛰어간 건가? 근데 대체 어딜 간 거야?
……설마 과자 하나 사려고 뛰쳐나간 건 아니겠지?
아니,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나간 걸 수도 있잖아. 내가 과자 하나 달라고 한 이유로 급하게 뛰쳐나가서 과자를 사러 간 거겠어? 설마, 하하. 완전 캐붕이잖아.
“어…… 왔어?”
“…….”
강유현은 생각보다 금방 돌아왔다.
그렇지. 고작 과자 하나 사러 나갔을 리가 없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 잠깐 나갔다가 온 거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은 강유현이 인벤토리를 열어 무언가를 쏟아 내자 멈추고 말았다.
투두두둑!
“…….”
어마어마한 양의 과자들이 강유현의 방 안에 쌓이기 시작했다. 종류별로 하나씩은 가져온 건지, 봉지 과자부터 시작해서 상자에 든 과자, 한 번도 보지 못한 과자와 초콜릿부터 사탕과 젤리까지 차곡차곡 쌓여 갔다.
무슨…… 편의점을 하나 다 털어 왔나? 바닥에 발 디딜 틈도 없이 쌓이는 과자를 피해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이, 이게 뭐야!”
“과자.”
“…….”
나는 할 말을 잃고 강유현을 쳐다봤다.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나를 응시했다. 끝도 없이 과자를 쏟아 내면서.
“과자 먹고 싶다고 했잖아.”
“…….”
이 미친 새끼…….
방구석 끝에 달라붙은 나는 질린 눈으로 강유현과 산처럼 쌓인 과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
나를 아주 기겁하게 만들었던 과자 사건은 지금 당장 먹을 것만 일부 남기고 인벤토리에 집어넣는 것으로 어떻게 해결했다. 이 넓은 방에 과자 동산이 쌓였던 게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과자 하나 먹고 싶어 했다는 이유로 그렇게 많이 사 오는 건 오버 아닌가? 도저히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에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결국 내 손에는 감자칩 한 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 우여곡절 끝에 얻은 감자칩 한 봉지가 왜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 건지. 한숨이 나오려는 걸 꾹 참으며 과자를 천천히 씹어 먹었다.
[와하하하!]
“…….”
요란한 웃음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분명 집중해야 할 부분인데도 불구하고 눈길이 가지 않았다. 자꾸만 옆에 있는 강유현을 흘끗거렸다.
이제 슬슬 운을 띄어야 하는데. 무스펠헤임 던전을 클리어한 후 개박하 스킬의 부작용이 세게 왔던 강유현도 당분간은 나처럼 숙소에서 쉬면서 대기하는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주인공인 이 녀석은 나와는 달리 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등급 이상 현상도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니까.
기회가 온 지금 어떻게서든 아이템을 써야 하는데. 어떻게 말하지? 다짜고짜 아이템을 쓰면 땅에 파묻히고 말겠지?
“으음…….”
고민하다가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흠칫 놀라 옆을 쳐다보니 강유현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어…….”
“할 말 있는 거 아닌가?”
강유현이 나를 지그시 보며 물었다. 평소에는 강유현이 저렇게 보면 무섭기만 했는데, 오늘은 왜인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긴장이 좀 되긴 하지만, 어쩐지 강유현이 나에게 해코지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지금 말을 꺼내 보자. 나는 결심하며 입을 열었다.
“그게…… 생각해 보니 너한테 고맙다는 말도 안 했었잖아, 내가.”
“고맙다고?”
“그래.”
강유현에게 아이템을 쓰는 핑계를 밤새도록 생각해 봤으나, 어떤 말을 해도 핑곗거리로 썩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아이템을 꺼내서 쓸 수도 없고 말이다. 시도하기도 전에 내가 죽고 말겠지.
결국 생각한 게 무스펠헤임에서 나를 구해 줬던 강유현에게 보답하는 시나리오였다. 그때 강유현이 백시후와 에반에게 납치당한 나를 혼자서 구하러 왔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던전에서 네가 날 구하러 왔었잖아. 공대가 엉망이 되었는데도 말이지.”
“…….”
아마 강유현은 공대가 그렇게 된 줄 모르고 나를 찾으러 온 거겠지만,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였다. 강유현이 오지 않았다면 나는 꼼짝 없이 라우페이 길드에 끌려갔을 테고, 지금쯤 무슨 짓을 당했을지 알 수 없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하지만 강유현은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야.”
“뭐, 물론 사람을 구하는 건 너에게 당연한 일이었을 테지만…….”
“그런 게 아니야.”
“……?”
강유현은 단호한 목소리로 내 말을 끊었다. 의아하게 바라보자, 제법 진지한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너라서 중요했던 거야.”
“……!”
쿵, 하고 심장이 밑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놀란 얼굴로 강유현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그만큼 내 보조 스킬……이 중요하다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겨우 강유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어…… 고맙다?”
“한이진, 나는…….”
“아무튼 네 덕분에 죽다 살았잖아, 내가.”
나는 무거워진 분위기를 애써 모르는 척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강유현이 뭔가를 더 말하려고 했는데, 당황해서 그런지 그땐 귀에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기계적으로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냈다.
“이거 한 번 써 볼래? 랭커들이 환장한다던데.”
“그건…….”
꿀잠 아이템을 꺼내자 강유현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그도 남몰래 찾고 있던 아이템이니 많이 놀랐을 것이다. 나는 알아채지 못한 척하며 계속 말했다.
“S급이니까 너한테도 잘 들을걸?”
“어디서 난 거지? 사기당한 거 아닌가?”
“뭐?”
사기는 네가 당할 예정이었지. 이 주인공 놈아.
톡 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애써 입을 열었다.
“아니거든? 시험해 볼래?”
“…….”
그러자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마침 찾고 있던 아이템이니 넙죽 받으려고 하지 않을까 했는데, 의심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와 아이템을 경계하고 있었다. 아이템을 바라보는 강유현의 눈이 순간 파랗게 변했다.
“……진짜인 것 같긴 한데.”
“아, 진짜 맞다니까?”
감정을 했는데도 긴가민가한 그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만,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좀 격해졌다.
“자, 일단 한번 써 봐.”
“…….”
아이템을 건넸는데, 강유현은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답답한 자식 같으니라고.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자 강유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 네가 해 줘.”
“내가?”
“그래. 네가 나한테.”
“……?”
그건 또 무슨 개떡 같은…….
욕을 하려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주인공이 의심하는 상황이잖아. 일단은 맞춰 줘야지.
“그래, 그럼……. 한다……?”
뭔가 이상해진 상황이었지만, 나는 꿋꿋하게 아이템을 들었다.
향수병처럼 생긴 꿀잠 아이템은 쓰는 방법도 향수와 비슷했다. 이렇게 아이템을 쓰는 사람을 향해 들어서…….
칙.
뿌리면 된다.
곧 아이템에서 뿜어져 나온 무언가가 강유현의 몸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