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120)화 (120/228)
  • 120화

    왜인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주인공이나 히로인과 엮여서 좋았던 적이 나에게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끼어들면 원작과 스토리가 달라질뿐더러, 그때마다 달라진 스토리가 더 큰 업보로 나에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러니 강유현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하려는 일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내 물음에 강유현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넌 몰라도 돼.”

    “…….”

    불안해! 그 말 엄청 불안하거든!

    순간 소설 중반쯤에서 나온 대사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때부터 강유현의 멘탈이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할 때라서 인상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넌 몰라도 된다.’

    ‘……강유현 능력자……!’

    분명, 무스펠헤임 던전 공략 후 등급 이상 현상이 줄어들면서 강유현의 멘탈이 흔들리기 시작했었지. 게이트에서 빠져나와 귀환했을 때부터 사실 그는 지독한 PTSD에 시달렸었으니까. 하지만 등급 이상 현상을 해결하려고 바빴을 땐 억지로 억누를 수 있었지만, 이상 현상이 해결된 뒤로는 그게 어려워졌었다.

    가장 먼저 조짐을 알아챈 사람이 히로인이자 가장 가까이에서 전투를 함께 했던 성유빈이지만, 강유현은 그녀에게 철저하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숨겼다. 그리고 잘못된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억누르려고 했다. 나는 경악한 눈으로 강유현을 쳐다봤다.

    “너 설마…….”

    “……?”

    “아, 아무것도 아니야.”

    누가 봐도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강유현을 외면했다. 하지만 여기서 선무당처럼 아는 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걱정되었다. 당연히 강유현을 걱정하는 건 아니고, 그의 잘못된 결정으로 피해 볼 사람들이 걱정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강유현의 정신 상태에 영향을 크게 받는 건 도결이일 테니까.

    또 꼬이고 말았다. 더 이상 원작을 망치지 않으려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도결이를 생각하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도결이가 강유현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숙소를 옮긴다고 해도, 어쨌든 같은 길드에 있으면 가끔 마주칠 수밖에 없다. 그때마다 도결이가 받을 충격을 생각하면…….

    ‘……젠장.’

    어쩔 수 없이 강유현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딱 한 번만, 이번 딱 한 번만 더 오지랖을 부리자. 그렇게 생각하며 강유현에게 말을 걸었다.

    “너…… 괜찮은 거 맞지?”

    “…….”

    “아니, 그니까…….”

    문제는 뭐라고 말해야 수습할 수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 데 있었다. 고작 말 몇 마디 해서 해결할 수 있으면 원작에서 히로인들이 진작에 어떻게 했겠지. 하지만 강유현은 아집으로 똘똘 뭉친 꽉 막힌 주인공이다. 유일한 SS급으로서 세상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까지 합쳐져 누구에게도 약한 면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다가 사달을 낸단 말이지.

    역시 오서현 원장을 빨리 만나게 해야……. 아니, 그 전에 강유현이 저지르는 일부터 수습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한껏 복잡해졌다.

    “……한이진?”

    “아.”

    나를 내려다보는 강유현의 눈이 묘했다. 생각해 보니, 그와 살가운 대화를 하기에는 사이가 좀 애매했다. 게다가 왜 하필 이럴 때 강유현의 입술 따위가 눈에 띄는 거지. 그건 단지 보조 스킬을 쓰기 위해 한 부차적인 행위였을 뿐이라고!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동생이 걱정돼서 그러는 건가?”

    “뭐?

    갑작스러운 강유현의 물음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진지해 보이는 강유현의 얼굴을 보자 뻘쭘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아, 뭐…… 그렇지.”

    네 입술을 보고 있었다고 말하면 변태로 찍힐 테니까,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얼버무렸다.

    “근데 뭐, 너도…… 무리하진 말고.”

    “…….”

    “우리 도결이가 예민한 것도 문제니까 말이야.”

    비단 강유현의 탓만 할 수 없는 건, 도결이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거였다. 그 아이는 아직 능력 컨트롤이 미숙했다. 그러니 천천히 드러나야 할 강유현의 정신적 문제를 이렇게 빨리 들추게 된 것이지.

    “그러니까,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꼭 말해야 한다?”

    “……그래.”

    강유현은 어딘가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난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강유현의 눈길이 집요하게 나를 쫓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알겠다. 이번엔 과연 잘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속으로 침을 꾹 삼키며 계속 걸어갔다.

    ***

    자다가 일어난 도결이를 어르고 달래 밥을 먹이고 제 방에 데려다 놓았다. 이 녀석 은근슬쩍 자기 방에 가기 싫어하는 것 같던데, 점점 더 응석이 심해지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진짜 한이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처음 하룻밤 정도는 같이 자 주지 않았을까. 너무 매정하게 대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

    “에휴…….”

    하지만 오늘 밤에는 할 일이 있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작게 한숨을 쉬고 주변을 점검했다.

    방 밖에 인기척 들리지 않고, 조용하고, 시간도 이 정도면 적당하다. 나는 핸드폰을 들었다. 평소에는 오딘 길드에서 지급해 준 핸드폰을 들고 다니지만, 이건 그게 아니었다. 단 하나의 연락처밖에 저장되어 있지 않은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약속 지켜.」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답장이 왔다.

    「심단테: 언제요?」

    「오늘.」

    「심단테: 헐.」

    짤막한 메시지를 무표정한 얼굴로 응시했다.

    무스펠헤임 던전에 들어가기 전, 심단테는 나에게 제 연구실을 보여 주겠다고 말했었다. 내가 그 영혼을 바꾸는 Q…… 어쩌고 하는 기계를 제대로 고치고 있는지 물어보니까 그가 했던 말이었다.

    만약 정말로 심단테가 라우페이 길드에 협력하고 있는 게 맞다면 그의 소굴 안에 들어가는 게 상당히 꺼림직한 일이 될 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우선은 기계의 성과를 두 눈으로 확인해서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고 싶었고, 심단테에게서 받아 내야 할 아이템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단테: 그러죠. 고갱님!」

    의외로 심단테는 곧바로 흔쾌히 허락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역시 이미 준비를 다 끝내 놓고 있었나 보다. 이 능구렁이 같은 녀석.

    「심단테: https://sim.com/345dt」

    “음?”

    그리고 대뜸 스팸 문자 같은 메시지가 왔다. 이 자식이 또 무슨 개수작이야. 눈살을 찌푸리며 욕을 쓰는데, 금세 또 메시지가 왔다.

    「심단테: 스팸 아님요!」

    “…….”

    「심단테: 링크 누르세요ㅎㅎ」

    좀 찝찝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군. 눈살을 찌푸리던 나는 곧바로 손가락을 움직여 심단테가 보냈던 링크를 꾹 눌렀다. 그러자 으레 보이는 경고 메시지가 떴다. 무감하게 확인을 눌렀다.

    그리고 이제 인터넷 창이 떠야…….

    파앗!

    “……!”

    갑자기 화면에서 파란 불빛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대비도 하지 못한 채 눈앞을 파랗게 물들이는 빛에 그저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시발, 심단테 이 개자식!

    잠에 빠지는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끼며 속으로 심단테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

    “으윽…….”

    억지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는 기분은 언제나 최악이었다. 어질어질한 머리를 손으로 누르며 겨우 일어났다.

    “하…… 여긴 어디야.”

    일어나면 당연히 내 방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처음 보는 풍경에 고개를 갸웃했다.

    방 안은 조금 어두운 편이었고, 잡동사니 같은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렇다고 지저분한 느낌은 들지 않는 게 참 묘한 곳이다 싶었다.

    “아, 씨발.”

    그리고 몸을 내려다본 나는 저도 모르게 격한 욕설을 내뱉었다. 벌거벗은 상체에 줄 같은 게 덕지덕지 붙어서 매달려 있었다. 이곳에 처음 빙의해 한이진의 몸을 내려다봤을 때가 떠올랐다. 인상을 확 구기며 얼른 기계와 연결된 줄을 떼어 냈다.

    “심단테 이 개…….”

    “저요?”

    “헉!”

    옆에서 불쑥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그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심……단테?”

    하얀 의사 가운을 입은 남자가 씩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넵, 맞습니다.”

    “헐…….”

    생각보다 더…… 뭔가 어려 보이고 깔끔한 인상이었다. 히키코모리처럼 처박혀서 실험만 한다기에, 수염 나고 꼬질꼬질한 아저씨일 줄 알았지 뭐야. 하지만 겉으로 봐선 그냥 건실한 청년처럼 보였다. 나는 화를 내는 것도 잊고 얼떨떨하게 그를 쳐다봤다.

    “몸은 좀 어떠세요? 임시 빙의는 저도 오늘 처음 해 본 건데.”

    “임시…… 빙의?”

    심단테의 말에 나는 놀라서 몸을 내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느낌이 좀 이상했다. 한이진의 몸은 내가 빙의한 후 던전에서 굴러서 그런지 전보다 더 단단한 근육이 자리 잡았었는데, 지금 이 몸은 이상할 정도로 새하얗고 비실비실했다. 게다가 손가락도 가늘고 길었다. 아무리 봐도 성인 남성의 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무슨……!”

    결정적으로 건너편 거울에 비친 모습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나는 경악하며 작은 거울에 비친 모습을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한이진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 거울 속에 있었다. 부들부들 떨며 거울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