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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117)화 (117/228)
  • 117화

    “저, 박윤성 마스터…….”

    막 박윤성을 향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똑똑.

    다급한 노크 소리가 병실 안을 울렸다. 박윤성의 시선이 문가로 향했다.

    “들어와.”

    그러자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박윤성의 비서인 연승원이었다. 평소엔 고요한 물처럼 차분하던 그가 어쩐 일인지 잔뜩 경직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우선 나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다. 박윤성과 대화하고 있던 나를 방해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연승원의 성격상 보통 일이 아니면 이러지 않을 테니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 않았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지?”

    “마스터, 협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

    협회라는 말을 듣자마자 박윤성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가만히 있던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입술이 잠시 달싹거리다가, 나지막한 물음을 내뱉었다.

    “일이 생겨서 이만 가 봐도 괜찮겠습니까?”

    “아, 네.”

    “혹시 하실 말씀이 있었던 건…….”

    “아뇨, 없습니다.”

    나는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종장에 대한 말을 직접적으로는 하기 힘들어서, 최후의 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예언자가 한 말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이 얘기는 다음에 계속해야 할 것 같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박윤성이 이렇게 당황한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어서 가세요.”

    “네, 그럼…… 아.”

    서둘러 뒤를 돌아 나가려던 박윤성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나를 흘끗 보며 말했다.

    “몸이 괜찮아지셨다면, 도결 군을 만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도결이요?”

    “그의 훈련이 순조롭게 진행 중이라서, 곧 숙소를 옮겨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정말인가요?”

    “네, 조만간 두 분이 함께 퇴원하실 수 있을 것 같군요.”

    “아…….”

    말을 마친 박윤성은 고개를 까닥하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닫힌 문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무스펠헤임 던전은 클리어했다. 공대에 피해가 크긴 했지만 말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사하지만, 그건 그들이 뛰어난 S급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선두에서 싸웠던 티르 길드와 타 길드의 S급 전투원들도 서하준의 폭주에 휘말려 죽기도 했다던데.

    “하아…….”

    나는 그들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라우페이 길드의 난입은 나에게도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후의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도 문제지만, 라우페이 길드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조만간 또 큰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다. 소설에서는 주인공인 강유현이 어떻게든 라우페이 길드를 무너트렸겠지만, 내가 본 데에서는 한참 당하기만 했으니까.

    그렇다고 주인공에게 기대서 기다리기만 했다간 무스펠헤임 던전에서의 꼴만 날 것 같았다. 이제는 내가 저지른 일들 때문에 정해진 순서대로 에피소드가 진행되지도 않을 것이 분명했다.

    “무스펠헤임 던전 다음이 분명…….”

    중얼거리면서 이다음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박윤성이 했던 말처럼 무스펠헤임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서부터는 강유현이 귀환한 바람에 일어났던 등급 이상 현상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하고, 전체적으로 던전들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강유현에게 주변국들이 접촉을 시도하는데, 등급 이상 현상에 휘말린 가까운 나라들이 그랬다. 자국의 힘으로 감당하기 힘드니 SS급인 강유현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렇게 강유현은 점점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게 원래는 정상적인 스토리인데.”

    과연 그렇게 진행될지 의문이었다. 왜인지 더 엄청난 일들이 벌어질 것 같단 말이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식은땀을 흘리다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아, 모르겠다. 일단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들만 생각해야지.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원.

    내일 퇴원 처리를 하면서 도결이를 만나고, 같이 숙소로 돌아가자. 용식이와 용순이도 숙소에 있을 것이다. 특히 용식이는 많이 다쳐서 나처럼 따로 치료하고 숙소에 돌려보내기로 했는데, 잘하면 타이밍이 맞을 것 같았다.

    가슴 속에서 이는 불안을 애써 모르는 척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

    다음 날, 퇴원하기 전에 먼저 다른 병실을 찾아갔다. 도결이는 아직 병원에 있긴 하지만 훈련을 병행하고 있기 때문에 나와 같은 병동에 있지 않았다. 내가 찾아간 건 바로 용식이가 있는 병실이었다.

    “……용식아!”

    “…….”

    무스펠헤임 던전에서 무리한 용식이는 결국 나처럼 쓰러져서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게다가 나보다 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중간에 딱 한 번 일어나 마수석을 산더미처럼 먹어 치운 후에는 죽은 듯이 잠만 자고 있었다.

    “용식아…….”

    “…….”

    대답 대신 고롱, 고로롱 하고 숨 쉬는 소리만 들렸다. 마수 전문의는 용식이가 단순히 기력이 다해 쓰러진 것뿐이라고 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용식이는 병동에서도 안쪽 구석 격리된 곳에 머물고 있었다. 깨어난 용식이가 숙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소동을 벌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러지도 못할 정도로 죽은 듯이 잠만 잤다고 하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걱정된다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동안 박윤성이 준비를 철저히 한 건지, 용식이는 특별 제작한 우리 안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정말로 이 우리가 용식이의 독을 견딜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험해 볼 일이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긴 한 것 같았다.

    “용식아, 이따가 아빠가 데리러 올게. 조금만 더 자고 있어.”

    “갸우우…….”

    그러자 마치 대답하듯이 용식이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찬찬히 오르내리는 용식이의 등을 손바닥으로 잠시 토닥거려 주었다.

    그리고 조금은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실에서 나가자 경호원들이 내 뒤로 주르륵 따라붙었다.

    이제 도결이를 만나러 가야 한다. 도결이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신계 스킬을 훈련하고 있었다. 마침 도결이가 얼마나 능숙해졌는지 확인할 겸 훈련장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박윤성이 숙소에서 함께 지내도 된다고 할 정도면 굳이 내가 확인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떤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비록 나는 진짜 한이진은 아니지만 도결이에게 있어서 유일한 혈육이자 보호자니까 말이다. 한이진이 돌아올 때까진 도결이를 보살피겠다고 마음먹었으니, 허투루 도결이를 돌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 조금 더 정신을 집중해 봐. 사람들과 네 사이를 얇은 막이 둘러싸고 있다고 생각해.”

    “…….”

    투명한 유리창 너머에 도결이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키가 훤칠한 외국인 남자가 서 있었고, 주변에 길드원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몇 명 서 있었다.

    이름이…… 오스카 노턴이라고 했던가. 박윤성이 직접 초빙한 외국인 능력자였다.

    그는 도결이가 각성하기 전에는 강유현과 마찬가지로 ‘유일’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능력자였다. 그만큼 정신계 스킬을 가진 능력자 중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었다. 도결이가 각성하면서 여러모로 ‘유일’이라는 수식어가 사라지게 될 테지만 말이다.

    인상이 꽤 좋아 보였다. 오딘 길드에 거금을 받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특이한 성격인지 몰라도 도결이를 가르치는 그의 얼굴에는 뿌듯한 기색마저 느껴졌다. 조금 걱정스러운 부분이었는데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

    “도결아.”

    오늘치 훈련을 마치고 나온 도결이가 나를 보더니 강아지처럼 후다닥 뛰어왔다. 꼬리라도 달려 있었다면 잔뜩 흔들 기세였다.

    “언제부터 와 있었어?”

    “방금 왔어.”

    “형, 그럼 내가 저 무거운 거 드는 것도 봤어? 응? 그리고 내가…….”

    오스카가 뭘 가르칠 때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이던 도결이는 내 앞에 오자마자 막고 있던 둑이 무너진 것처럼 쉴새 없이 조잘거렸다. 나는 웃으면서 도결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그래. 장하다. 내 동생.”

    “헤헤.”

    뺨을 발그레하게 물든 도결이가 기쁜 얼굴로 웃었다. 나도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니까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이 들었다.

    “아, 맞다. 형, 몸은 괜찮아? 입원했었다면서.”

    “이제 괜찮아. 다 나았어.”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아직 아픈데 무리하는 거 아니야?”

    “괜찮다니까.”

    괜찮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도결이는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하긴, 내가 던전에서 나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렸을 텐데 다쳐서 입원했다고 하니 걱정 많이 했을 것이다. VIP 병실에서 푹 쉬면서 치료받아서 그런지 몸이 개운할 정도인데, 이걸 어떻게 증명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불쑥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한……이진 능력자?”

    “아.”

    아까부터 멀뚱멀뚱 서 있던 오스카였다. 도결이에게 한눈팔렸던 나는 뒤늦게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한이진이라고 합니다.”

    “역시 그렇군요! 저는 오스카 노턴입니다. 반갑습니다.”

    “네, 우리 도결이 잘 부탁드릴게요.”

    이 사람도 너튜브 영상을 본 건가. 나를 알고 있다니 의외였다. 어색한 얼굴로 악수를 하는데, 오스카의 얼굴이 옆으로 조금 기울여졌다.

    “음.”

    “……?”

    묘한 신음을 내뱉은 그는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싱긋 웃었다. 영국인이라고 했던가. 번역 아이템으로 인해 자동으로 한국어가 머릿속에 입력되어서 영국인들 특유의 악센트는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 들어 봤자 내가 잘 알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왜 그러시죠?”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스카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손을 놓았다. 그리고 나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그럼 앞으로 종종 뵙도록 하죠.”

    “네…… 아. 선생님께 인사해야지. 도결아.”

    “……안녕히 가세요.”

    도결이는 왜인지 탐탁지 않은 얼굴로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훈련할 때 분위기는 나쁘지 않더니, 왜 또 낯을 가리나 싶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오스카는 개의치 않아 하며 손을 흔들었다.

    오스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도결이는 상기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도 오늘부터 형이랑 같은 숙소에서 지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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