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용식이의 입에서 초록빛을 띤 독 브레스가 맹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정확하게 가면을 쓴 에반의 머리 위로 브레스가 떨어졌다.
“크아악!”
에반의 비명과 함께 치지직, 소리가 났다. 살이 타는 냄새가 매캐하게 풍겼다. 브레스를 멀리서 쌌다면 패시브 스킬에 막혔을 텐데, 얼굴에 닿을 듯 가까이 쏜 덕분에 타격을 제대로 준 모양이었다.
“용식아, 됐어. 돌아와!”
하지만 그 때문에 용식이의 몸도 에반의 패시브 스킬에 데미지를 받고 있었다. 내 말을 들은 용식이가 제자리에서 다시 휙 날아올랐다. 그리고 마치 나를 지켜 주듯이 날개를 퍼덕이며 내 어깨를 감쌌다.
본의 아니게 용식이와 몇 번 멀리 떨어졌었는데, 아무래도 소환수인 용식이는 내 위치를 어렴풋이 알 수 있는 것 같았다. 동물의 귀소 본능과 비슷한 게 아닌가 싶었다.
나 역시 용식이가 어느 정도 가까이 오면 기척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용식이가 올 때까지 에반의 관심을 나에게 붙잡아 둔 거였다. 그리고 그 생각은 멋지게 적중했다.
“크으윽, 시발!”
“저런 미친…….”
에반은 욕설을 퍼부으며 브레스에 녹아 버린 가면을 휙 던져 버렸다. 저 가면도 보통 아이템은 아닌 모양이었다. 브레스를 정통으로 맞은 얼굴이 꽤 멀쩡해 보였다.
“그 용 새끼는 죽이고, 너는 사지 절단해서 끌고 간다.”
“윽……!”
눈이 마주치자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마치 누군가가 머릿속을 손으로 주무르는 것 같았다. 에반의 웃고 있는 얼굴이 점점 흐리게 보였다.
【그 결계에서 나와.】
“읏…….”
【어서 나와, 한이진.】
이름을 불린 순간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어쩐지 그 말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캬아악!’ 하고 카랑카랑하게 우는 소리가 꽤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자 다른 쪽 발도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렇게 홀린 듯이 앞으로 걸어갔다.
“어라……?”
근데 왜 내가 이렇게 걷고 있는 거지. 의아함을 느낀 나는 제자리에 서서 고개를 갸웃했다. 머릿속이 점점 맑아지고 있었다.
【어서 나오라니까!】
“……!”
노호와 같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점령했다. 나는 저 말을 거부할 수 없다. 거부할 수 없을 터였다.
“이…….”
“……?”
그런데 왜인지 짜증이 났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누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건방진 말을 하는 놈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듯이 말을 내뱉었다.
“네가 뭔데 명령하고 지랄이야.”
“……!”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에 ‘띵동!’ 하는 청량한 소리가 울렸다. 뒤를 이어 묘하게 익숙한 무뚝뚝한 음성이 들렸다.
[드높은 정신력으로 S급의 스킬을 극복한 그대!]
[인내와 정신력의 화신인 유저에게 ‘정신력 갑(S)’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의 부가 효과가 상시 발동합니다.]
“……뭐?”
그제야 안개가 낀 듯 흐릿했던 머릿속이 멀쩡해졌다. 결계 바로 앞까지 다가왔던 나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내가 방금 뭘 하려고 한 거지?
“어떻게 암시를…….”
“암시?”
에반이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깨달았다. 저 녀석이 나에게 정신계 스킬을 걸었었구나.
올라운더인 에반은 공격 스킬과 방어 스킬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고, 탐지 스킬은 없다고 했으니 나머지 하나는 정신계 아니면 보조계였을 것이다. 그런데 보조 스킬이었으면 서하준이 그렇게 망가지고 폭주한 게 말이 되지 않는다. 서하준에게 쓴 정신계 스킬을 나에게 건 것이다. ‘암시’라. 최면 같은 정신계 스킬인 건가?
주춤거리며 뒤로 더 물러났다. 깜박 잘못하면 나 스스로 결계를 벗어나서 꼼짝없이 에반의 쇠사슬에 다시 온몸이 칭칭 묶였겠지. 그리고 저 녀석이 말한 대로 나는 사지가 잘리고 용식이는…….
상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한이진의 정신력 스탯이 높아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던전을 클리어하면서 레벨 업을 많이 해서 스탯 수치가 더 올라간 것도 도움이 된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보조 스킬을 받은 S급의 스킬을 견뎌 낸 건 의외지만…….
“너 도대체 뭐야?”
“알 거 없어.”
무뚝뚝한 대답에 에반 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대답 대신 총을 들어 갈겨 줬다. 매섭게 날아드는 총알을 피하는 에반 놈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렇게 견제하는 것만으로는 끝이 나지 않는다. 나에겐 저놈을 끝장낼 힘은 없었다. 용식이도 열심히 공격을 퍼붓고 있긴 하지만, 성체였을 때에 비하면 큰 위협은 되지 못했다. 아무래도 세(Sæ) 던전에서 성체로 변했던 건 특별한 조건이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용식아, 이리 와!”
“꺄우!”
그리고 이제 스킬 지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강유현은 내 보조 스킬에 강한 부작용을 겪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지속 시간이 끝나서 강유현이 부작용으로 쓰러진다면, 그땐 정말 방법이 없었다.
백시후와 에반도 부작용을 겪을 가능성이 있지만……. 7명에게 걸었던 보조 스킬은 강유현에게만 부작용을 일으켰다. 그중에 3명은 S급이었지만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았다. 같은 S급인 백시후와 에반에게도 부작용이 일어날 확률은 낮았다.
나는 강유현이 SS급이라 부작용이 일어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야 말이 된다. 너무 강한 능력치와 힘을 가진 그에게만 보조 스킬의 부작용이 일어나는 사실이 말이다. 그러니 지속 시간이 끝나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 한다.
그래도 지속 시간이 먼저 끝나는 건 백시후 쪽일 텐데. 보조 스킬을 건 순서를 상기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
거대한 어둠이 강유현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런데 왜인지 강유현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상태가 이상해 보였다.
설마 벌써 지속 시간이 끝난 건가? 비틀거리는 강유현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용식아!”
“꺄!”
에반을 향해 독침을 쏟아 낸 용식이가 날개를 퍼덕이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 어깨를 앞발로 잡고 날아올랐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용식이는 정확하게 내가 원하는 곳으로 향했다. 바로 강유현이 있는 곳이었다.
“강유현!”
“윽…….”
어지럼증을 느끼는 듯, 강유현이 머리를 흔들었다. 쓰러지려는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용식이가 백시후를 견제하며 브레스를 사납게 내뿜었다.
“강유현, 정신 차려!”
“한……이진.”
속삭이는 듯한 작은 목소리에 입술을 깨물었다. 강유현은 보조 스킬을 받은 상태에서 SS급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리고 왔다. 그때는 성유빈과 용순이가 함께 싸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옆에 있는 난 도움을 주기는커녕 방해만 되었으니까.
‘※ 부작용이 있을 수 있음’
순간,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는 스킬 창의 경고가 떠올랐다. 스킬 지속 시간이 끝나 부작용까지 온 지금,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낼 수 없었다. 손을 올려 강유현의 뺨을 붙잡았다. 뜨끈한 열기가 손에서 느껴졌다.
지금부터 하려는 짓 때문인지, 아니면 살고 싶은 욕구 때문인 건지 계속해서 가슴이 쿵쿵 뛰었다.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완전히 결심을 끝낸 나는 망설이지 않으며 고개를 숙였다.
“한이진…… 뭘…….”
“조용히 해.”
강유현의 까만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은 스킬을 쓰지 못하는지, 파란빛은 그의 눈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곧 그의 눈이 다시 파랗게 빛날지도 모른다.
‘※ 상위 등급에게는 특수한 조건이 필요함’
이 이상한 보조 스킬은 나에게 저질스러운 짓을 항상 강요했다. 이번에도 어쩌면 요행을 바랄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릿속의 잡념을 떨친 나는 눈을 딱 감고 강유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
눈을 감고 있어서 강유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엄청나게 당황하고 있겠지. 드라우그 킹을 쓰러트리기 위해 강유현과 입을 맞췄던 때를 떠올렸다. 이건 그때보다 더 진한 스킨십이었다.
“하아…….”
“…….”
효과가 있는 건가? 입술을 떼고 미심쩍은 눈으로 강유현의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그의 눈에서 지금껏 본 적 없던 열기가 느껴졌다.
“너…….”
“어때? 혹시 지금 스킬이…….”
발동되냐고 물으려고 했는데, 그때 ‘띠링’ 소리를 내며 눈앞에 새파란 시스템 알림창이 떴다.
「‘개박하를 흔들어 보세요(S)’의 스킬 설명 일부가 변경됩니다.」
「※ 특수한 조건에 부합하는 경우 스킬 지속 시간이 연장됩니다.」
「※ 특수 조건으로 인한 스킬 지속 시간 연장의 시간은 랜덤으로 설정됩니다.」
“이게 무슨…….”
너무 많은 글자가 떠올라서 쉽게 읽히지 않았다. 그래도 알림 창이 말하는 ‘특수 조건’은 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개박하 스킬의 조건인 스킨십이었다. 대충 강유현의 스킬 지속 시간이 랜덤으로 늘어난 거라고 이해하면 되나?
“캬아아!”
“……용식아!”
날카롭게 우는 소리와 함께 용식이가 땅 위로 떨어졌다. 백시후. 그가 흉흉한 눈으로 나와 강유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에반까지 그의 옆에 다가와 있었다.
긴장하며 쳐다보자, 누군가가 내 앞을 막아섰다. 놀란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강유현, 너…….”
“괜찮아.”
담담하게 말한 강유현이 말을 덧붙였다.
“괜찮으니까 기다려.”
“…….”
그 순간, 강유현에게서 엄청난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지금껏 본 적 없었던 거칠고 강대한 기운이었다. 순도 높은 검고 푸른 불꽃을 그저 멍하니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