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어째서 강유현이…….
공대가 아니라 나를 구하러 왔다고?
믿기지 않아서 잠시 멍하니 강유현을 쳐다봤다. 항상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이 불쾌하다는 듯이 일그러져 있었다. 바로 눈앞에 그가 증오하는 빌런들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뭐야, 강유현?”
그리고 빌런들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강유현이 나를 구하러 올 리 없다고 호언장담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신은 내 편인가 보다. 어쩌면 강유현이 공대의 상황을 모르고 나에게 먼저 온 게 아닌가 싶었다.
“우리 영웅님께선 공대가 전멸해도 상관없으신가 봐?”
“…….”
비아냥거리는 말에 강유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냥 농담으로 치부하는 건가? 하지만 공대가 위험한 건 진짠데.
물론 이런 상황에서 강유현이 나를 두고 공대를 도우러 갈 리는 없겠지만, 어쩔 수 없이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강유현의 팔을 꽉 잡았다. 강유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괜찮아.”
“……!”
무뚝뚝하지만 묘하게 부드러운 말투였다. 강유현과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식의 대사는 강유현이 쉽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썸 타고 있는 히로인들에게 하는 거면 모를까. 그래서인지 감동보다는 얼떨떨한 기분이 더 들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어쨌든 강유현이 날 구하러 왔다는 게 중요하지. 라우페이 길드에 끌려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강유현뿐만 아니라 저 빌런 놈들도 나에게 보조 스킬을 받아 능력치가 훨씬 올라간 데 있었다.
특히 백시후는 내 피를 마셔서 능력이 더 증폭된 모양이고, 에반은 올라운더라서 공격과 보조가 매우 능숙한 능력자다. 라우페이 길드의 마스터가 왜 저 두 사람을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윽……!”
강유현은 다짜고짜 공격하기 시작했다. 저 두 놈에게도 보조 스킬을 걸었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럴 시간도 없었다. 강유현의 스킬이 야차처럼 주변을 휩쓸었다.
그러고 보니 강유현에게도 보조 스킬을 걸었었지. 그럼 믿어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지속 시간이…….
“크으윽.”
에반의 쇠사슬로 으스러진 손목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통째로 부었다. 눈에 보이는 상처는 사라졌지만,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동안 생겼던 상처로 인한 피로도가 누적된 탓이었다. 포션은 상처를 치료해 주지만, 상처로 인해 떨어진 기력까지는 회복시켜 주지 못했다. 그래서 공대에는 힐러들이 꼭 필요했다.
구슬은 무사할까. 공대가 난리 났을 텐데. 용식이와 용순이는…….
어지러운 머리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이곳에서 살아남아 빠져나가는 게 중요했다. 지끈거리는 머리의 통증을 참으며 인벤토리에서 총을 꺼냈다.
파박!
“큭.”
쇠사슬이 나를 향해 뻗었다가 중간에 막혀 사라졌다. 에반은 강유현을 상대하면서 끈질기게 나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백시후는…….
콰쾅!
“으악……!”
세 능력자가 싸우는 곳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B급인 나는 휩쓸리지 않도록 버티는 것만으로도 최선이었다.
강유현과 백시후의 주변으로 검은 기운이 확 퍼져 나갔다. 백시후와 에반은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으면서 상성 때문인지 전투 합은 기가 막히게 잘 맞았다.
게다가 상황이 좋지 않았다. 강유현은 짐이 되는 날 감싸면서 싸우고 있었다. 그의 뒤에 있는 나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전투에 끼지도 못하고 멍청하게 있어야 했다. S급의 전투는 보스전 못지않게 치열했다.
콰득, 콰드득.
그때, 땅이 갈라지며 지면에서 무언가가 불쑥 솟아올랐다. 괴물의 손 같은 검은 물체가 강유현을 공격했다. 강유현의 패시브 스킬과 부딪친 괴물의 손이 치지직,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그런데 그 연기에서 찝찝한 느낌이 났다.
괴물의 손, 불쾌한 연기…….
“시발, 저런 게 아니었잖아.”
백시후는 흡혈이라는 스킬로 다른 능력자들의 능력을 훔칠 수 있었다. 물론 다 훔칠 수 있는 건 아니고, 자신과 상성이 맞는 능력에 한했다. 게다가 스킬을 그대로 훔치는 게 아니고, 능력자가 가진 스킬의 일부를 자신의 스킬에 융합시키는 거였다. 사실상 스킬을 훔치는 것보다 더 질이 나빴다.
저 괴물의 손을 능력자들은 암암리에 ‘악마의 손’이라고 불렀다. 원래 저 스킬을 가진 능력자는 신체의 일부를 변형시킬 수 있었다고 하던데, 백시후가 뺏은 뒤에는 끔찍한 괴물의 손이 소환되었다. 그리고 내 보조 스킬로 그 손은 더욱 흉측해져 있었다.
“강유현, 피해!”
“……!”
능력이 증폭된 탓인지 악마의 손은 소설의 묘사보다 더욱 무시무시해져 있었다. 그리고 더욱 집요하게 강유현의 뒤를 쫓았다. 아슬아슬하게 손톱에 빗맞은 강유현의 뺨에 가느다란 상처가 생겼다.
저 고약한 손은 단순히 손아귀 힘이 강한 것뿐만이 아니고 팔 자체의 기운도 심상치 않았다. 특히 능력에 의해 팔에 상처가 생기거나 피가 나는 경우, 고약한 연기가 퍼지면서 능력자의 스킬을 무력화시키는 짓도 했다. 그래서 강유현의 패시브 스킬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SS급인 강유현의 패시브 스킬까지 건드리다니.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콰아아앙!
“강유현……!”
강유현도 무슨 스킬을 쓴 건지, 악마의 손과 부딪쳐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버티면서 강유현의 이름을 불렀지만, 내 목소리 같은 건 그에게 닫지 않았다.
촤르륵!
“젠장.”
“싸우는 건 저놈들끼리 하라고 하고, 우린 우리끼리 볼일 좀 볼까?”
에반 놈의 쇠사슬을 향해 총을 갈겼다. 하지만 눈에도 잘 보이지 않는 쇠사슬을 총으로 쏘는 건 무리가 있었다. 불을 내뿜던 은색 총구에 뱀처럼 쇠사슬이 감겼다. 눈살을 찌푸리며 총을 잡아당겼다.
“난 너랑 볼일 없어, 개새끼야.”
“하여간 깜찍한 말만 하기는.”
눈웃음치는 에반의 얼굴을 노려봤다. 마음만 먹으면 곧바로 나를 제압할 수 있으면서, 질질 끄는 꼴이 뭔가 수상했다. 그러다가 에반 놈의 발이 일정 선을 넘지 못하는 걸 보고 깨달았다.
‘……결계?’
그제야 내 주위에 얇은 결계가 쳐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에반의 쇠사슬이 결계를 뚫으면서 힘이 약해져 고작 내 총을 칭칭 감은 것밖에 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내 힘으로도 버틸 수 있는 거고. 하지만 이 정도의 결계를 치려면 강유현은 그만큼 자신의 능력을 분산해야 한다.
‘젠장.’
이를 악물었다. 주인공인 강유현이라면 백시후와 에반을 해치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나 때문인가…….’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빌런들에게 내가 보조 스킬을 걸었고, 지금은 나를 지키기 위해 강유현이 무리하고 있었다. 게다가 애초에 나를 납치하기 위해 빌런들이 던전에 난입해서 이 난리가 난 것이 아닌가.
‘시발, 뭔 생각 하는 거야.’
잘못은 이 빌런 놈들이 저지른 거지. 그게 내 탓은 아니었다. 그저 같은 공대원으로서 조금은 책임감이 느껴져서다. 특히 내 S급 보조 스킬은 많은 사람에게 기대를 받았으니 말이다.
그러니 더 이상 강유현에게 짐이 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라우페이 길마가 꽤 몸이 단 모양이야. 이런 짓까지 하고.”
한껏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에반의 기색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은 가면까지 쓰고 있어서 더욱 표정을 알아채기 곤란했다. 그래도 꿋꿋하게 에반 놈을 계속 도발했다.
“뭐, 얼마나 엄청난 양반인가 했는데. 요즘 라우페이 길드도 인력난인가 보지? 너 같은 올라운더 능력자도 쓰고 버릴 만큼?”
“……뭐?”
되묻는 목소리에 살짝 균열이 일어났다.
이거다. 저놈은 라우페이 길마에게 민감한 모양이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아니, 그렇잖아. SS급 강유현이랑 내가 있는 던전 공략에 달랑 둘을 보내서 납치하라고 시킨 게. 실패하면 던전 안에 사장되는 건데, 그냥 쓰다 버리는 말 취급 아닌가?”
“닥쳐.”
“하긴, 나도 빌런 길드에 있었지만. 거긴 사람 아까운 줄을 몰라요. 어차피 다 대체할 게 있다고 생각한다니까?”
물론 로키 길드 마스터에게 특별 취급을 받았던 한이진의 몸에 빙의한 내가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녀석의 정신을 분산시켜야 했기에, 일단 되는 대로 말을 지껄여 댔다. 그런데 의외로 에반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네가 뭘 알아!”
“…….”
이 새끼 너무 단순한데. 초딩인가? 잠시 어이가 없는 얼굴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에반의 눈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차분히 다시 입을 열었다.
“알지, 나도 빌런 출신이었는데.”
쇄애애액.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쇄애액!
“엿이나 먹어! 이 빌런 새끼야!”
탕!
그대로 총구를 겨눠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쇠사슬로 감겨 있는 총은 대상을 제대로 맞추지는 못했다.
“이 미친…….”
화를 내던 에반이 눈을 크게 떴다.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와 에반 놈의 눈을 가렸다. 파지직, 패시브 스킬이 부딪치는 소리가 맹렬하게 울렸다.
“용식아, 쏴!”
미리 공중에서 브레스를 쏠 준비를 마쳤는지, 용식이의 횡격막이 급격하게 부풀어 올랐다.
“캬아악!”
제로 거리에서 쏘는 독 브레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