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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110)화 (110/228)

110화

“너희들, 혹시 포털이 불의 영역에서 열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뭐?”

에반이 내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시선이 백시후에게서 나로 향했다. 백시후 역시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순식간에 그들의 눈이 나에게 고정되었다.

“포털은 보스 몬스터를 죽인 곳 근처에서 생기잖아? 근데 거기가 불의 영역이 아니라면 어쩌려고?”

“…….”

내 물음에 빌런들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내 말에 말렸기 때문만은 아니고, 자기들도 확신이 서지 않으니까 순간 말문이 막힌 거였다.

순간적으로 스친 생각이지만, 어느 정도 맞는 것 같다. 에반은 줄곧 공대 쪽에 있어서 불의 영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백시후는 그 이상한 몬스터에게 자아를 빼앗겨 그때의 기억이 흐릿할 터였다.

무작정 나를 잡으려고 따라오긴 했는데, 강유현과 성유빈이 불의 영역에서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는 걸 보진 못했다는 뜻이었다. 백시후의 가면 같은 하얀 얼굴에 균열이 조금 일어났다.

“무슨 헛소리야. 거기가 아니면 어디라고.”

“글쎄. 어쨌든 나는 불의 영역에서 보스 몬스터는 보지 못했거든? 그러니 알아서 생각해.”

“…….”

S급들의 기운에 몸은 짓눌리고 있지만, 하찮은 등급의 패시브 스킬들은 열심히 일했다. 용케 떨지 않고 청산유수 같은 말을 내뱉은 것이다. 그렇게 제법 뻔뻔한 얼굴로 두 빌런을 당당히 쳐다볼 수 있었다.

“사냥개, 진짜냐?”

“…….”

“야, 대답 안 해?”

얼굴을 일그러트린 에반의 기세가 더욱 험해졌다. 순간 멀쩡한 척했던 나도 숨을 죽였다. 몸을 옥죄고 있는 쇠사슬이 더욱 팽팽하게 당겨졌다.

만약 긴가민가한 상태로 불의 영역에 갔다가, 그곳에 포털이 열려 있지 않으면 난감해지겠지. 긴급 탈출용 귀환 스크롤은 혼자만 쓸 수 있는 데다가 각자 선택한 귀환 지점으로 이동하니까. 나를 데리고 던전 밖으로 나가려면 포털을 타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에반은 이건호로 위장하고 공대를 쑥대밭으로 만든 거고, 백시후는 강제로 계약하는 불법 아이템을 나에게 채우고 돌아다닌 거였다. 공대가 보스 몬스터를 해치우면 뒤통수치고 나를 납치해 포털을 타려고 말이다.

이들로서는 이제 마지막 관문만 남은 셈인데, 내 말에 포털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으니 혼란스러울 것이다. 나는 일부러 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뭐, 시간 낭비하고 싶으면 그냥 가 봐도 되고.”

“…….”

“…….”

구역이 나뉘어 있지 않은 무스펠헤임 던전은 그 거리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넓었다. 게다가 에반은 올라운더지만 탐지 능력은 없다고 스스로 말했었다. 길을 탐지할 수 없는 저들은 자신이 직접 가서 좌표를 찍은 곳들만 아이템에 의지해 찾아갈 수 있었다.

여기서 이렇게 버티다가 누군가가 나를 구하러 와 줄 수도 있지만……. 이제 그렇게 무력하게 기다리기만 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강유현이랑 페어라서 걔 위치가 어딘지 알 수 있거든? 그럼 포털 위치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을 텐데.”

“하…….”

“왜? 궁금하지 않아?”

쇠사슬이 감긴 손을 에반의 눈앞에서 짤짤 흔들었다. 그러자 놈의 아름다운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 내가 바보인 줄 알아?”

“…….”

응, 좀 바보인 것 같기는 한데.

차마 하지 못할 말을 속으로 내뱉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반은 여전히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고, 백시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이 없었다.

왜인지 가만히 있는 백시후가 조금 신경 쓰였지만, 잘하면 여기서 잘 속여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목표로 삼은 건 에반 놈이었다. 그는 올라운더라서 백시후가 무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능력자이기도 했다. 아마 저 둘 중 의사 결정이 큰 건 백시후가 아닌 에반일 확률이 높았다.

“포털을 타지 못하면 너희가 어떻게 나를 데리고 던전 밖에 나갈 수 있겠어. 그래서 이 난리를 친 거 아니야?”

“…….”

“잘 생각하는 게 좋을걸?”

좋아. 조금만 더 당기면 넘어올 것 같다. 에반의 기색을 살피며 몰래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것도 아닌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면을 쓴 것처럼 태연자약하게 구는 건 한이진의 몸에 빙의해서 익숙하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에반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이거 수 쓰네?”

“큭……!”

팽팽하게 당겨진 쇠사슬이 또다시 목을 거세게 졸랐다. 너무 도발한 게 문제였던 건가. 아무래도 에반의 심기를 거스른 것 같았다. 흉흉한 금색 눈을 마주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만해라.”

“……!”

의외의 인물이 에반을 제지했다. 그러자 에반의 희번덕거리는 눈이 백시후를 향했다.

“뭐?”

“그만하라고 했다.”

“하, 너 돌았냐?”

“……쿨럭.”

그러게. 백시후가 저러는 건 나도 의외였다. 에반의 관심이 백시후에게 쏠려서 그런지 목을 조이는 쇠사슬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 바람에 작게 기침이 나왔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저들끼리 다투기 시작했다.

“이 개새끼가 쥐약이라도 처먹었나.”

“입조심해라.”

“싫은데?”

“…….”

두 사람의 패시브 스킬이 흉흉하게 부딪쳤다. 욕망에 충실한 놈들 같으니라고. 하지만 덕분에 나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손과 손목을 꽁꽁 묶고 있던 쇠사슬이 조금 더 느슨해졌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넌 닥치고 하라는 대로나 해. 어?”

에반의 기운이 더욱 거세졌다. 아무리 봐도 둘 사이가 너무 나쁜 것 같다. 이 정도 일에 목에 핏대 세우는 걸 보니 말이다.

그리고 백시후에게서도 지지 않고 맹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둘 다 내 보조 스킬을 받았기 때문에 기운이 어마어마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됐다……!’

에반의 신경이 나에게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손을 움직일 수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겨우 손을 움직여 왼쪽 엄지손가락으로 허공을 그을 수 있었다.

박윤성은 나를 지키기 위해 많은 전투 시 생길 수 있는 수많은 가정을 세웠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내 곁을 지킬 수 있는 능력자가 아무도 없이 혼자 남겨질 경우, 혼자서 도망칠 수 있게 만든 작은 장치였다.

통칭 간이 인벤토리. 능력자로 각성하면 시스템에 의해 주어지는 기본 인벤토리가 아닌, 또 다른 인벤토리였다. 보통은 그걸 스킬로 쓸 수 있지만 나는 박윤성이 준 아이템으로 다룰 수 있었다. 심단테가 제작한 아이템이 아닌 것 중에서 가장 비싸고 쓸 만한 아이템이기도 했다.

크기가 작아서 많은 걸 넣을 수 없는 대신에 손짓 한 번에 아이템을 꺼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이 간이 인벤토리에는 딱 하나밖에 넣어 놓지 않았다. 내 손짓에 딱딱한 무언가가 허공에 생겨나 손에 쥐어졌다.

그걸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내던졌다.

팡!

“윽……!”

“……!”

촤르륵, 내 몸을 옥죄던 쇠사슬이 밑으로 흘러내렸다. 순간적으로 능력자의 능력을 봉인하는 봉인 아이템. 말만 들었지 실제로 써 보는 건 처음이었다. 곧바로 몸을 뒤로 물려 진짜 인벤토리를 열었다. 이제 랜덤 이동 아이템을 써서 이곳을 탈출하기만 하면 된다.

“악……!”

그러나 손목에 극심한 통증과 함께 인벤토리에서 막 꺼낸 랜덤 이동 아이템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손목을 감싼 쇠사슬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아, 빡치게 하네. 진짜.”

“아윽……!”

빠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손목을 감싸 쥐며 몸을 숙였다.

벌써? 봉인 아이템 쓴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능력을 회복했다고?

“박윤성이 너한테 돈깨나 쏟아부었나 봐.”

“이…… 씨발.”

욕을 짓씹고 있자, 에반이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의 눈이 맹수처럼 노랗게 빛났다.

“네 스킬이 진짜 물건이긴 물건인가 봐. 별 타격이 없네.”

“크윽.”

“기대했을 텐데 어째?”

비웃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팔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좆까.”

“하하.”

아, 이 썩을 놈들. 보조 스킬이 너무 뛰어난 것도 통탄할 일이었다. 즐거운 듯한 웃음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봐 봐, 진작에 팔다리를 다 끊어 버려야 했다고. 조금만 틈을 주니까 이 난리를 치잖아.”

“…….”

백시후는 이번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대놓고 도망치려고 했으니, 그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애초에 무슨 기대를 한 것도 아니지만.

이제 정말로 끝났다는 절망감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팔다리가 끊어진 채 보조 스킬을 쓰는 고깃덩이처럼 끌려다니는 미래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죽는 것보다 끔찍한 일이었다. 차라리 원작의 한이진처럼 죽어 버리는 게 낫지, 그렇게 살 거면.

이대로 확 혀를 깨물어 버릴까. 그런 흉흉한 생각까지 했다.

“사냥개, 네가 해라. 내가 하면 쇼크사할지도 모르니까.”

“…….”

“빨리 안 해?”

서슬 퍼런 말에 백시후가 가까이 다가왔다. 스릉, 하고 검을 꺼내는 소리에 눈을 감았다. 그나마 백시후의 실력이면 순식간에 잘려서 고통이 덜할 거라는 어이없는 생각까지 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쇄애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뜨자 무언가가 순식간에 쇠사슬을 끊어 냈다. 그대로 휘두른 검이 에반과 백시후를 한꺼번에 공격했다.

“……강유현?”

익숙한 코튼 향이 코끝을 스쳤다. 이번에야말로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감싼 남자를 올려다봤다.

“늦어서 미안하다.”

“……!”

무뚝뚝하게 대답한 강유현이 앞을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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