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109)화 (109/228)

109화

“크윽!”

사막의 모래 위로 몸이 내던져졌다. 여전히 얇은 쇠사슬에 온몸이 꽁꽁 묶인 채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를 이렇게 만든 놈은 느긋한 얼굴로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이제 사냥개를 불러 볼까.”

“…….”

에반이 인벤토리에서 꺼낸 건 던전 안에서 서로를 부르는 통신기였다. 저걸로 백시후를 부를 셈인가. 하긴, 포털이 열린 곳은 나와 백시후가 떨어졌던 불의 영역이니까. 백시후나 내가 포털이 열린 곳을 아는데, 나는 죽어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의외였다. 저렇게 얌전히 기다리는 것보다는 나를 패서라도 입을 열게 만들 줄 알았는데. 에반은 여전히 실실 웃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우리 할 말을 마저 할까?”

“……뭐?”

가까이 다가온 에반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데, 하얗고 긴 손이 뻗어 나와 내 목을 움켜잡았다.

“윽……!”

“너 뭐야? 내 이름 어떻게 알고 있어?”

“…….”

아, 그것 때문인가.

확실히 섣불리 에반을 아는 척한 건 잘못한 일이었다. 에반의 정체는 내가 읽었던 소설 부분에서 철저히 감춰져 있었으니까. 나는 독자로서 서술로 나온 부분을 읽어 알고 있었지만,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에반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라우페이 길드에 고등급 올라운더 능력자가 있다는 소문은 무성했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과 모습을 알지 못한다. 그나마 정체를 드러내고 활동하는 백시후보다 훨씬 베일에 감춰져 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내가 아는 척을 하고 말았으니…….

실책이었다. 차라리 모르는 척해야 했는데. 괜한 일을 하고 말았다. 그래도 나를 죽이지는 않을 테지만, 출처가 어딘지 지독하게 물을지도 모른다.

“박윤성? 오딘 길드가 그 정도로 정보력이 좋았던가?”

“…….”

“말 안 해?”

나는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소설에서 봤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박윤성을 팔 수도 없는 일이고. 여러모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깜찍한 짓만 하네. 흥분되게.”

“으윽!”

그런데 왜인지 이 미친놈은 내가 이러는 게 더 기뻐 보였다. 햇빛을 받은 금색 눈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목을 졸리고 있는 상황만 아니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고 생각해도 될 모습이었다. 이 잔악무도한 빌런은 외모 하나는 기가 막혔다. 이건호라는 B급 헌터로 위장했을 때도 평범한 얼굴은 아니었는데, 변장을 푼 원래 얼굴은 정말이지…….

라우페이 길드는 사람 얼굴을 보고 길드원을 뽑나? 아니면 저렇게 눈깔 돌은 빌런들은 죄다 외모가 아름다운 건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저놈이 천사처럼 아름다운 건 둘째치고, 일단 내가 살 궁리를 해야 했다.

-다리 하나쯤 자르면 그런 생각은 안 하겠지.

-보조 스킬 쓰는 건 팔다리가 없어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 아냐?

“…….”

나를 무슨 보조 스킬 기능이 달린 고깃덩이 취급하는 놈들이었다. 목숨만 붙어 있으면 팔다리를 자르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단 말이지.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시후가 오는 게 빠를까, 강유현이 빠를까.’

공대는 서하준의 폭주를 막느라 급급할 테고, 내가 지금 믿을 수 있는 건 페어인 강유현뿐이었다. 그는 내 위치를 알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보스 몬스터를 해치웠으니, 곧바로 나에게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올까?’

나도 모르게 올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순간 멈칫했다.

강유현은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모를 것이다. 그런데 포털이 열린 곳에서 대기하지 않고 나를 찾으러 올까? 온다고 해도, 중간에 공대 상황을 알게 될 텐데 나를 구하러 온다고?

의문이 한번 생기니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불안해졌다. 누구도 나를 찾으러 오지 않을 거라는 불안함이 들었다.

아니야. 그래도 내 보조 스킬은 쓸 만하니까, 이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뭐, 상관없어. 길드에 데려가서 천천히 물어보면 되니까.”

“으윽.”

“내 얼굴을 본 놈들은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거든.”

“……!”

웃는 얼굴로 섬뜩한 말을 한 에반이 얼굴을 반쯤 가리는 새하얀 가면을 썼다. 보는 것만으로도 인상에 남는 외모이니 빌런 짓을 하려면 가리고 다니는 게 좋을 것 같긴 한데, 가면을 쓰는 건 조금 중2병처럼 보였다.

하지만 티는 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건호로 위장했을 때 썼던 변장 아이템은 곧바로 또 쓰지 못하나 보지? 제한 시간이 있거나 수량이 부족한 게 틀림없었다. 주저앉은 채 가만히 이를 으득 갈았다.

‘심단테 개자식.’

S급 해제 아이템을 써야 하는 계약 아이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변장 아이템, 랜덤으로 이동하는 순간 이동 아이템. 다 등급까지 높은 걸 보면 보통의 제작자가 만든 아이템들이 아니었다. 레긴 길드의 S급 제작자 심단테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아이템이 수두룩했다.

심단테가 라우페이 길드에 협력하고 있었다니. 원작에도 나오지 않는 얘기였다.

그런데 그런 주제에 나에게도 협력하고 있었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지. 아니,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건가? 이익을 위해서라면 상관없이 아이템을 대 주는 건가? 나에게는 차원 이동 연구를 위해 협력하는 것뿐이고, 라우페이 길드는 예전부터 중요한 고객이었을 수도 있다. 어찌 됐든 기분 더러운 일이었다.

“이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 중이실까?”

“윽, 하지 마……!”

실실 웃던 에반이 내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정말 기분 나쁜 자식이었다.

“너 지금 강유현 기다리지?”

“……!”

내 생각 따위는 다 간파했다는 듯 에반이 씩 웃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하, 진짜 올 거라고 생각해? 그 만인을 지켜야 할 히어로님께서?”

“…….”

애석하게도 저 재수 없는 면상에 대고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아무 말 못 하고 이를 으득 깨물자 에반 놈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포기해. 너만 비참해질 테니까.”

“크윽.”

내 목을 잡고 흔들던 에반이 히죽 웃으며 손을 놓았다. 기침이 튀어나와 허리를 숙이자, 에반 놈이 어딘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왔다.”

“……!”

“하여간 사냥개 새끼, 존나 느리다니까.”

혀를 쯧쯧 찬 에반이 모래를 발로 찼다. 그러자 팍, 하고 모래가 사방으로 튀었다. 나는 모래가 날아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가 있다는 걸 에반의 행동으로 알 수 있었다.

백시후다. 백시후가 온 거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나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리고 말았다.

“포털 열린 곳은?”

“…….”

에반의 물음에 백시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모습을 드러낸 후 무심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이 엉망이 된 내 꼴을 훑어 내렸다.

“대답 안 하냐?”

기분 나쁜지 에반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하지만 백시후는 상관하지 않으며 집요하게 나만 쳐다봤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대로면 나는 꼼짝없이 라우페이 길드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백시후가 지금 좀 이상해 보이긴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불의 영역 쪽으로 나를 끌고 가겠지. 그곳에서 포털을 타고 나가면 모든 게 끝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나를 구하러 올 능력자가…….

“……!”

그러다가 나는 깨달았다. 혼자가 되고 나서야 멍청하게 가장 큰 오류를 깨닫고 만 것이다. 머릿속에서 과거 한이진의 기억들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내가 빙의하고 난 뒤에 일어났던 일들도 말이다.

언제부터 그렇게 남에게 의지해서만 살아왔다고. 이 세상에 빌런들 한가운데서 눈을 떴을 때부터 혼자였던 것처럼,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뿐이다.

멍청한 놈, 멍청한 자식. 스스로에게 욕설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생각해. 어서 생각을 해 내. 여기서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하라고, 남에게 널 구해달라고 애원하지만 말고!

S급 보조 스킬로 S급 이상의 능력자들에게 둘러싸였을 때부터 내 독기가 많이 빠졌던 모양이다. 내가 보조 스킬만 걸어 주면 이놈들이 알아서 해결하겠지. 주인공만 오면 다 끝나겠지. 히로인이 있으니까 괜찮겠지. 그딴 바보 같은 생각을 하니까 상황이 이렇게 된 거다.

정말 훌륭한 자업자득이었다. 픽,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야? 너 울어?”

“…….”

“사냥개 자식아,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니까 애 울잖아. 이거 어쩔 거야, 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그러자 백시후에게서 확, 하고 불쾌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뭐지?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숙이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자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백시후와 에반의 모습이 보였다.

“나 때문이라는 건가?”

“그럼 아니야?”

“저 몸을 칭칭 감고 있는 쇠사슬 때문이겠지.”

“뭐? 그럼 그냥 망아지처럼 풀어 놓으라고?”

“…….”

마치 으르렁거리는 사자와 흑표범 같았다. 이놈들, 척 봐도 사이가 안 좋아 보였다.

어서 빨리 나를 데리고 가 포털을 타야 할 때에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그러다가 퍼뜩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쩌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