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무슨 남자끼리 키……스야! 싫어.”
“혀엉.”
“빨리 손이나 내놔.”
붙잡고 늘어지는 강수현에게 제법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강수현이 시무룩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붙잡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황스러웠으나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예상치 못한 마력 부족으로 시간이 지체됐기 때문이다. 백시후가 오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 했다.
“하아…….”
우여곡절 끝에 강수현의 손을 잡고 스킬을 걸었다. 머리 위에서 뜨거운 한숨이 터졌다.
“윽.”
몸 안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포션을 마셔서 마력량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이제 슬슬 정신력에 한계가 온 것 같았다. 이걸로 하루에 보조 스킬을 다섯 번이나 썼다. 신기록 달성이었다.
“형, 괜찮아요?”
“괜……찮아.”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아직은 참을 수 있다. 머리를 흔들며 전투 중인 공대 쪽을 보다가 팔찌를 채운 왼팔을 습관적으로 매만졌다. 그러다가 눈을 크게 떴다.
“……!”
팔찌에서 통증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백시후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 팔찌가 경고를 하듯이 팔목을 조여 왔는데, 지금은 통증 하나 없이 멀쩡하기만 했다. 소름이 확 끼쳤다. 백시후가 이 근처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캬아악!”
“……용식아?”
용식이가 어딘가를 보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곳에는 모래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백시후의 능력은 암 속성이다. 그에게 몸을 숨기는 것쯤은 간단한 일일 것이다. 긴장하며 강수현을 돌아보았다.
“수현아!”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인 강수현이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인벤토리를 뒤져 해제 아이템을 다시 꺼냈다.
「S급 해제 아이템: S급 이하의 계약을 해제함
1회 사용 가능」
“으음.”
S급 해제 아이템은 심단테에게 강탈한 아이템 중 가장 비싸고 귀한 것이었다. 그래서 몇 개 가지고 있지 않아 순간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손목이 잘리거나 라우페이 길드에 억지로 끌려가는 것보다는 낫겠지. 지우개처럼 생긴 해제 아이템을 망설임 없이 팔찌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작은 시스템 창이 반짝하고 뜨고 난 뒤, 뱀처럼 생긴 팔찌가 저절로 끊어져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일방적 계약, ‘뱀의 독니’가 해제되었습니다.」
「해당 아이템은 귀속이 불가합니다.」
그리고 해제 아이템은 그대로 허공에서 파스슥 사라졌다. 이렇게 귀한 S급 아이템을 하나 날려 버리고 말았다. 아쉬움에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돌렸다.
강수현이 두 눈을 감고 어딘가를 향해 두 손을 뻗고 있었다. 용식이가 으르렁거리고 있는 방향이었다. 뭘 하려고 그러지? 의아하게 바라보자, 강수현이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저건……!”
허공에 검은 무언가가 여럿 생겨났다. 바로 강수현이 저번에 세(Sæ) 던전에서 썼던, 통칭 ‘블랙홀’이라는 스킬이었다. 그때는 멀리 떨어져 있는 강유현에게 보조 스킬을 걸어 주기 위해 강수현의 블랙홀을 이용했었다.
그런데 왜 지금 그 스킬을 쓴 거지? 블랙홀은 분명 공간 이동 스킬로 기억하고 있다. 그때는 강수현의 능력치가 부족해서 손 하나를 겨우 집어넣어 이동시킬 수 있을 정도로 작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능력치가 올라간 것인지 블랙홀의 크기가 조금 더 커진 것 같았다.
게다가 내 보조 스킬을 받아서 스킬 능력이 더 증폭되었다. 허공에 블랙홀이 여러 개가 둥둥 떠 있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열린 블랙홀은 수박만 한 크기였다.
“아……!”
그러다 그 의미를 깨달았다. 원작에서 강수현이 블랙홀 스킬을 쓴 건 공간 이동 때문만이 아니었다. 백시후처럼 몸을 숨기는 능력자나 몬스터를 잡기 위해 블랙홀 스킬을 쓰곤 했었다. 원작에서는 강수현이 능력자로 각성하고, 던전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훈련한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곧장 떠올리지 못했다. 내가 읽었던 부분까지는 강수현의 활약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큭……!”
곧 백시후의 모습이 허공에서 드러났다. 그의 왼쪽 발 부근에서 블랙홀이 둥둥 떠 있었다. 백시후의 다리는 아마 지금쯤 다른 공간에 둥둥 떠 있을 것이다. 백시후가 발을 빼자, 순식간에 한곳으로 합쳐진 블랙홀이 그를 덮쳤다.
“헐…….”
그렇게 어이없이 백시후가 사라졌다. 나는 놀란 얼굴로 강수현을 쳐다봤다. 강수현은 블랙홀 스킬을 이렇게까지 섬세하게 컨트롤한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 식은땀을 잔뜩 흘리고 있었다.
“어디로 보낸 거야?”
“그냥, 대충 여기서 제일 먼 곳으로요.”
“거기가 어딘데?”
“저도 잘 몰라요.”
“…….”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였나? 놀라웠다. 공간 이동 능력은 컨트롤이 까다로운 스킬 중 하나였다. 내가 썼던 공간 이동 아이템도 정확한 좌표를 입력하지 않으면 쓸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위치를 알지 못하면 대부분은 쓸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강수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적당히 거리가 먼 곳을 도착지로 정해서 블랙홀을 그렇게 많이 열어 버린 것이다.
역시 주인공의 동생이자, 이 세계의 주연이었다. 나는 차마 따라 할 수 없는 재능이 그에게는 있었다. 속으로 혀를 차고 있으니, 강수현의 시선이 바닥으로 내려갔다.
“저것도 보내 버리죠.”
“저거? 팔찌?”
“네.”
강수현이 가리킨 건 해제 아이템으로 해제해서 바닥에 떨어트린 불법 아이템이었다. 방금 전까지 내 손목을 옥죄고 있었던 흉악한 팔찌는 이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보통 이런 건 일회성일 테니까 말이다.
“아마 그 팔찌의 기운을 따라서 왔을 테니까요. 여기서 정반대인 곳으로 보내 버리면 시간을 더 벌 수 있을 거예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자 강수현이 팔찌가 떨어진 곳에도 블랙홀을 작게 열었다. 그러자 팔찌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확인하자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그럼 이제 강유현과 성유빈이 오기만 하면…….”
그리고 그 생각을 하자마자 반가운 시스템 음성이 던전 안을 울렸다.
[무스펠헤임-S207의 보스 몬스터 ‘샌드웜 킹’을 처치하였습니다.]
[무스펠헤임-S207를 최초로 공략한 플레이어에게 ‘불의 세계를 제패한 자(L)’의 칭호가 내려집니다.]
[무스펠헤임-S207의 접속이 곧 종료됩니다.]
“됐다……!”
드디어 강유현과 성유빈이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린 것이다. 곧 던전 밖으로 나갈 워프 포털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우선 공대와 합류하려고 하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유현과 성유빈이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문제는 백시후와 원래 무스펠헤임 던전의 보스 몬스터였던 듄 센티피드뿐인데, 백시후는 강수현이 멀리 보내 버렸고, 그 대왕 지네는…….
“으아아악!”
“……!”
새된 비명 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렸다는 시스템 음성이 들리자마자, 대왕 지네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지네 주변에 있던 능력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어……?”
사람들이 죽는 광경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무언가가 능력자들의 몸을 간단하게 반으로 갈라 버렸다. 나는 그저 멍청하게 눈을 깜박이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윽……!”
촤르륵, 가느다란 무언가가 내 몸을 휘감았다. 피에 젖어 있는 그게 내 몸을 휘감고 난 뒤에야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바로 대왕 지네의 발을 끊어 버렸던 얇은 쇠사슬이었다.
“형!”
“으악……!”
강수현이 소리치자마자 내 몸이 공중으로 확 떠올랐다. 놀란 내 입에서도 비명이 튀어나왔다. 눈앞이 한차례 빙글 돌았다.
“이 스킬, 정말 끝내주네.”
“너……!”
마주친 눈은 갈색이 아니었다. 금을 녹인 것처럼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그 사람 같지 않은 안광에 온몸이 바짝 긴장했다.
“이건호……?”
그의 모습은 이건호처럼 생겼으면서 달랐다. 눈과 머리카락 색이 외국인처럼 금색을 띠고 있었다. 게다가 생긴 건…….
눈앞에서 이건호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달라지고 있었다. 이건, 아이템으로 외형을 바꾼 거다. 이 정도로 정교하게 외모를 바꾸는 아이템이라니, 절대 시중에 유통되는 아이템이 아닐 것이다. 백시후가 가지고 있었던 팔찌처럼 불법 아이템이겠지.
“당신…… 누구야?”
“하하…….”
이건호, 아니, 빌런의 눈은 광기에 젖어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은 정상이 아니었다. 형형한 금안이 나를 응시했다.
“이거, 파파가 왜 그렇게 혈안이 되었는지 알겠는데.”
“크윽……!”
“정말 엄청난 스킬이네?”
빌런 놈의 쇠사슬이 온몸을 꽉 옥죄고 있었다. 숨도 쉴 수가 없어서 겨우 헐떡거렸다. 빌런 놈이 나를 보며 실실 웃었다.
“예상하지 못했어. 그 보조 스킬이란 게 이 정도로 좋을 줄이야.”
“이……!”
“대충하려고 했더니 안 되겠네.”
“……!”
빌런 놈의 몸을 커다란 검은 구체가 집어삼켰다. 아니, 집어삼키려고 했다. 하지만 빌런 놈이 잽싸게 피하는 바람에 블랙홀이 허무하게 허공에 흩어졌다.
“성가신 잔챙이들을 먼저 처리해야겠군.”
“안……!”
눈살을 찌푸린 빌런 놈의 손에서 얇은 사슬이 더 뻗어 나왔다. 실처럼 가느다란 쇠사슬이 강수현과 용식이가 있는 쪽으로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안 돼……! 차마 다 하지 못한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다른 능력자들이 저 쇠사슬에 반 토막이 된 모습이 눈앞에 선명히 그려졌다. 경악하며 강수현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