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박윤성은 경악하며 나예림을 바라보았다.
협회는 불과 얼마 전까지 능력자들에게 생체 실험을 자행했다는 의심을 받았었다. 하지만 협회는 그 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했고, 그 이후 길드들에게 권한을 일부 일임했기에 생체 실험 논란은 서서히 묻혀 갔다.
순간, 박윤성의 머릿속으로 어떤 가설이 떠올랐다. 그동안 협회의 온갖 더러운 일을 라우페이 길드가 대신하고, 협회가 그 일을 숨긴 게 아닌가 하는 가설 말이다. 박윤성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박윤성 마스터님.”
나직한 목소리가 상념에 잠겨 있던 박윤성을 일깨웠다. 인형 같은 차가운 얼굴은 그저 무미건조한 말을 내뱉었다.
“협회는 세상을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겁니다.”
“…….”
“그게 무슨 일이든지요.”
박윤성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
공대가 겨우 다시 이동을 시작했을 때는 시간이 꽤 지체된 후였다. 공대를 지휘해야 할 티르 길드의 부마스터인 서하준은 왜인지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고, 길드원들은 그저 그의 눈치만 보았다.
게다가 전투 부대원들을 이끌던 성유빈 능력자가 강유현 능력자를 쫓아가는 바람에 공대와 멀리 떨어졌다. 애써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공대원들의 불안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정말 이 상태로 공략이 가능한 건가.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에서 현실 감각도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야, 고딩.”
“……?”
선두 쪽으로 다가간 이든이 강수현의 어깨를 툭 쳤다. 강수현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일그러진 얼굴이었지만, 그나마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며 입을 열었다.
“왜요?”
“한이진 아직도 안 찾아져?”
“하…….”
짧은 한숨을 내쉰 강수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맡겨 놓은 사람처럼 시도 때도 없이 묻고 있는데, 이젠 짜증이 날 정도였다. 원래부터 얼굴만 봐도 짜증 나는 사람이긴 했는데. 강수현은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네, 안 찾아진다고요.”
“능력 부족인 거 아냐?”
“하아…….”
대놓고 이죽거리는 거라면 뭐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진지한 낯짝으로 중얼거리고 있으니 화도 나지 않았다. 강수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일단 유현 형 따라가는 중이에요. 방해하지 말고 저리 가요, 좀.”
“강유현도 그 못생긴 파충류 따라가고 있는 거 아니야? 걔 따라간다고 찾을 수 있는 거 맞아?”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해요? 말이 되는 소리를…….”
“그 파충류, 이번에는 확 돌아서 크게 변하지도 않았잖아. 그냥 무작정 가고 있는 거 아냐?”
“…….”
투덜거리는 입을 막고 싶었지만, 의외로 하는 말이 날카로웠다. 강수현도 내심 속으로는 신경 쓰고 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저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래도 굳이 싫은 사람과 오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강수현은 다시 한번 정색하며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공대 전체에 묵직한 시스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무스펠헤임-SS207. 숨겨진 구역, ‘불의 영역’이 일시적으로 일반 공개 지역으로 전환됩니다.]
[무스펠헤임-SS207. 지역 통합으로 인해 보스 몬스터가 변경됩니다.]
“뭐?”
“이게 무슨 소리야?”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숨겨진 구역이 일반 지역으로 전환, 그로 인한 보스 몬스터의 변경. 다른 이들은 쉽게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강수현은 시스템 음성을 듣자마자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곧바로 스킬을 썼다.
“된다!”
“뭐?”
“탐지된다고요, 이진이 형.”
“정말?”
예상했던 대로, 탐지가 되지 않던 한이진의 위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이진이 사라진 곳이 바로 시스템 음성이 말했던 숨겨진 구역, ‘불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모종의 이유로 구역이 통합되어 이곳에서도 감지할 수 있게 된 거다. 강수현이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크으윽……!”
“저 새끼 또 왜 저래?”
이든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시스템 음성이 들린 직후, 상태가 안 좋아 보이던 서하준이 별안간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흰자위만 보이는 눈이 꽤 섬뜩해 보였다.
“부마스터님! 정신 차리세요!”
“아까부터 왜 이러시지?”
길드원들의 걱정 섞인 목소리와 함께 공대 전체가 시끌시끌해졌지만, 그걸 보는 이든과 강수현의 얼굴은 심드렁했다. 특히 공대에 여러 차례 불만을 표현했던 강수현은 또 이러냐는 듯이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 진짜.”
“야.”
“왜요.”
이젠 대놓고 짜증을 내는 강수현을 보며 이든이 눈을 반짝였다. 그의 눈엔 주변 분위기와 맞지 않게 장난기가 가득했다.
“우리 둘이 빠질래?”
“뭐요?”
“내 능력으로 이진이 있는 곳까지 순식간에 갈 수 있을걸.”
“…….”
강수현은 길을 알고, 그곳까지 단번에 갈 능력은 없다. 반면에 이든은 길은 모르지만 빠른 이동 수단을 가지고 있다. 그걸 깨달은 강수현이 이제야 이든과 제대로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은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둘 다 괜찮아요? 아니, 안 괜찮나.”
“…….”
“…….”
행색이 말이 아닌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멋쩍게 중얼거렸다. 보스 몬스터에게 한창 시달려서 둘 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성유빈이었다.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올려 나를 가리켰다.
“한이진 능력자……?”
“네, 저 맞아요.”
“이게 대체…….”
얼떨떨해하는 성유빈을 보며 그동안의 일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동시에 뒤에서 ‘콰광!’ 하는 폭발음이 들렸다. 흘끗 뒤를 보니 용순이와 샌드웜 킹이 괴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한창 싸우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시간이 없으니 우선 스킬부터 걸어 드릴게요!”
“아.”
그제야 성유빈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얼굴을 끄덕였다. 자연스럽게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던 성유빈이 내 손을 보고는 흠칫, 몸을 떨었다.
“한이진 능력자, 다쳤습니까?”
“네?”
성유빈의 말에 내 손을 내려다봤다. 죽은 줄 알았던 몬스터에게 깨물리고 남았던 핏자국이 아직도 손에 조금 남아 있었다. 물론, 지금은 흔적도 제대로 남지 않아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걸 한순간에 보다니. S급의 시력은 정말 남다른 면이 있었다.
“괜찮아요. 이제 다 나았거든요.”
“하지만 흔적을 보면 피가 꽤 나온 것 같습니다.”
“그땐 그랬는데요. 지금은 뭐, 보시다시피.”
가볍게 말하고 성유빈의 손을 꽉 잡았다. 순식간에 맞잡은 손이 뜨거워졌다. 성유빈에게 스킬을 걸자마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강유현.”
“…….”
“강유현?”
강유현은 아무 말도 없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워낙 무표정한 얼굴이라 노려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손을 내민 어정쩡한 자세로 잠시 얼어붙었다. 무섭게 또 왜 저래?
그런 나를 내려다보던 강유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내 손을 거칠게 잡았다.
“나중에 얘기해.”
“어…….”
“어떻게 된 건지, 전부.”
새파란 눈이 일렁거리며 내 얼굴을 훑었다. 그에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휴.”
스킬을 걸고 강유현과 성유빈을 보내고 나서 겨우 숨을 돌렸다. 아직도 뜨거운 것 같은 손을 꽉 쥐었다.
이제 강유현과 성유빈이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고 나면 던전 클리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포털이 열리고, 닫히기 전까지 공대와 합류하면 되는데…….
“윽.”
백시후가 채웠던 팔찌가 손목을 조였다. 일정 시간 이상 백시후와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손목이 잘려 버릴 터였다.
어쩌지. 그냥 지금 해제 아이템을 써 버릴까? 어차피 강유현과 성유빈을 만났고, 불의 영역이라는 이곳도 무스펠헤임 던전과 합쳐졌으니 말이다. 굳이 길을 찾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아마 지금쯤 공대에서도 내 위치를 알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을 것이다.
“좋아, 지금 쓰자.”
결심한 나는 곧바로 인벤토리를 뒤졌다. 사실 나에게는 심단테가 준 S급 해제 아이템이 있었다. 이걸 언제 쓰려나 했는데, 이럴 때 쓸 줄이야.
“찾았다.”
인벤토리에서 꺼낸 아이템을 응시했다. 지우개처럼 생긴 하얗고 네모난 아이템에는 작은 메모가 붙어 있었다.
「뭐든지 다 지워 드림」
“…….”
직접 쓴 글씨 같은데, 심단테가 쓴 건가? 엄청 악필이네. 읽는 게 아니라 해석해야 할 수준이었다.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해제 아이템을 팔찌 쪽으로 가져다 대려고 했을 때였다.
쾅!
“으악!”
젠장, 싸움의 여파가 너무 심하다. 눈살을 찌푸리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머리 위로 파괴된 돌덩이가 휙 지나갔다. 아무래도 여기서 조금 벗어난 다음 아이템을 써야 할 것 같았다.
“끙, 용식…….”
“꺄우!”
용식이를 불러 격전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용식이가 어딘가를 노려보며 가시를 바짝 세웠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남자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백시후…….”
“…….”
한층 더 창백해진 안색으로 백시후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다가오니 손목을 옥죄던 힘이 약해졌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다.”
“뭐?”
주춤거리며 물러나던 나는 백시후의 손에 꼼짝없이 붙잡혔다.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목을 움켜잡았다.
“윽……!”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