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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100)화 (100/228)
  • 100화

    백시후의 상태는 척 봐도 나빠 보였다. 기분 나쁜 기운이 백시후의 몸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의식은 있는 모양이었다. 방금 내 이름을 작게 부른 걸 보면 말이다. 문제는 백시후와 내가 그다지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는 데 있었다.

    “한이진…… 이리 와.”

    “…….”

    이글거리는 눈이 나를 향했다. 불길에 온몸이 잠식당해 활활 타오르고 있으면서, 나를 노려보는 두 눈은 불꽃보다 더 형형했다.

    왜인지 소름 끼치는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백시후가 억지로 채운 팔찌가 있는 손목이 뜨거웠다. 새삼스럽게 그와 내 관계가 떠올랐다.

    백시후는 나를 납치하기 위해 무스펠헤임 던전에 불법 침입했다. 수상쩍은 불법 아이템을 족쇄처럼 채우고 나를 데리고 다녔다. 만약 이 아이템을 풀지 못하면, 나는 백시후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를 향한 집착이 이해는 가는데, 평소보다 과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백시후를 감싸고 있는 기운, 이상한 말을 하던 제단의 몬스터 때문일 것이다.

    “어서…… 너를…… 윽.”

    “백시후!”

    불길에 휩싸인 백시후의 몸이 비틀거렸다. 분명 내가 보조 스킬을 걸어 줬을 텐데, 왜 패시브 스킬이 발동하지 않는 거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백시후를 응시했다. 그제야 그의 몸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몸은 멀쩡하잖아?’

    백시후의 몸은 몬스터의 불길에 영향을 받지 않고 멀쩡했다. 패시브 스킬은 육체가 직접적으로 손상되어야 발동할 것이다. 그가 용식이의 브레스에 당했을 때는 패시브 스킬이 독과 충돌해 주변이 엉망이었다. 하지만 저 몬스터의 불길은 백시후의 몸을 해치지 않아서 패시브 스킬이 발동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백시후에게 영향을 주는 건, 몸이 아니고 정신 쪽인가? 보조 스킬을 받은 백시후를 몬스터가 자유자재로 다루면 어떻게 되는 거지?

    순간 무서운 상상을 하다가 경악했다. 그렇게 된다면 끝장이다. 보스 몬스터를 둘이나 상대해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던전 클리어는커녕 공대가 몰살당할지도 모른다.

    주인공인 강유현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백시후와 그는 상성이 맞지 않아서, 이전부터 껄끄러운 상대였다. 그런 백시후가 보조 스킬을 받아 강유현 못지않게 능력치가 높아졌을 테니, 주인공에게 가장 위협적인 적이 될 것이다. 어쩌면 보스 몬스터보다 더 말이다.

    ‘젠장, 보조 스킬 괜히 걸었나?’

    하지만 후회해 봤자 이미 늦은 일이었다. 저 기묘한 몬스터가 정신계 스킬을 쓸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백시후가 더 정신이 나가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은데.

    “캬아!”

    “용식아!”

    “…….”

    마치 무슨 운명의 장난처럼, 또다시 용식이와 백시후가 대치했다. 백시후는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도 용식이를 보고 뭔가를 느낀 듯 얼굴을 굳혔다. 그의 기세가 더욱 사나워졌다.

    “윽, 젠장.”

    용식이 혼자 백시후를 막을 수 있을까? 전에는 백시후가 용식이의 브레스를 막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보조 스킬로 얼마나 강해졌을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정체불명의 몬스터 때문에 더욱 세졌을 수도 있다.

    “크르륵…….”

    “용식아, 안 돼!”

    그러나 내가 말리기도 전에 흥분한 용식이가 백시후를 향해 브레스를 날렸다.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용식이가 날린 브레스가 정확하게 백시후의 얼굴을 향했다.

    파지지직, 파직!

    용식이의 브레스와 백시후의 패시브 스킬이 충돌했다. 전에는 용식이의 브레스가 패시브 스킬을 뚫고 백시후의 얼굴을 강타했었다. 독 브레스는 그때와 똑같이 녹색 빛을 띠며 위협적으로 백시후를 덮쳤다.

    “……!”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어느 정도 뚫을 수 있을 줄 알았던 용식이의 브레스가 백시후의 패시브 스킬도 뚫지 못하고 소멸한 것이었다. 경악한 얼굴로 백시후를 쳐다봤다.

    “용식아, 피해!”

    날카로운 검이 번득이며 용식이를 덮쳤다. 다행히 기척을 미리 알아챈 용식이가 위로 훌쩍 날아가 검을 피했지만, 그 여파가 장난 아니었다. 용식이가 앉아 있던 곳이 초토화되고 주변이 검기에 휩쓸려 날아갔다.

    “윽……!”

    이거 난 스치기만 해도 죽겠는데. 기겁하며 용식이와 백시후가 싸우는 걸 주시했다. 광포하게 부는 바람이 휘몰아쳤다. 내 몸은 그 날카로운 바람에도 베일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용식이가 혼자 백시후를 막을 수 있으려나. 안 될 것 같은데. 과연 지금의 백시후를 막을 방법이 있을까?

    콰아앙!

    “…….”

    없을 것 같다. 머리 위를 덮치는 파편들을 피해 옆으로 몸을 굴렀다. 이미 용식이와 백시후가 싸우는 여파로 내 몸도 만만치 않게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젠장, 이제 어떡해야 하지. 흘끗 고개를 돌리니 보스 몬스터와 싸우고 있는 쪽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샌드웜 킹의 공격을 막는 불의 장벽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애처롭게 흔들렸다.

    “캬아악!”

    “……!”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백시후의 칼이 용식이의 날개를 스쳤다. 그 칼날을 용식이의 패시브 스킬도 막지 못했고, 용식이의 날개가 길게 찢어졌다. 용식이가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냈다.

    “용식아!”

    소리치며 달려갔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날개를 다친 용식이는 피할 수도 없을 텐데, 백시후는 다시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를 집어삼킨 불꽃이 일렁거리며 사방으로 뻗쳐 나갔기 때문이었다.

    “큭……!”

    “백시후!”

    스스로도 제어가 되지 않는지, 백시후가 괴로워하며 몸부림을 쳤다. 그러다 한쪽 무릎을 꿇고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그가 움직이지 않는 틈을 타 바닥에 널브러진 용식이를 안고 뒤로 물러났다.

    “용식아, 괜찮아?”

    “꺄우우…….”

    용식이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길게 울었다. 포이즌 드래곤은 피에도 독 성분이 있는지, 용식이의 날개에서 흘러내리는 피도 초록색을 띠고 있었다. 날개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걸 이를 악물며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게 대체…….”

    백시후의 몸을 감싸고 있는 불꽃이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내 눈이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에는 불꽃을 집어삼키고 있는 작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걸 본 내 눈이 커졌다.

    “용순이?”

    무너진 미로 파편에 파묻혀 있는 줄 알았던 용순이가 백시후의 몸을 덮은 불꽃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맙소사. 저걸 먹고 있다니. 그러고 보니 용식이도 저번에 정체 모를 저주를 삼켜 먹곤 했었지. 용종들의 특성인가? 경악하는 내 귀로 시스템 음성이 들렸다.

    [소환수 ‘용순이’의 스테이터스 수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소환수 데이터 업데이트 중…….]

    [‘화룡 샐러맨더’가 성체로 진화합니다.]

    “성체……?”

    시스템 음성이 끝나자마자 용순이의 몸이 변화했다. 용순이는 내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자그마한 도마뱀이었다. 그런데 백시후의 몸을 감싸고 있던 불꽃을 빨아들이자 급속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헉.”

    아니, 어디까지 커지는 거야? 거의 파이X에서 리자X급의 변화였다. 순식간에 보스 몬스터 정도로 커진 용순이를 보며 숨을 들이켰다. 불꽃을 다 먹은 용순이는 거대한 입을 쩍 열고는 트림을 했다.

    “꺼억.”

    “…….”

    아주 시원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만족스러워하는 용순이를 순간 할 말을 잃고 쳐다봤다. 그러다가 용순이의 노란 눈과 딱 마주쳤다.

    “삐이익!”

    “으악, 잠깐, 잠깐만!”

    “삐익?”

    용순이 녀석, 몸은 집채만 하게 커졌으면서 새가 지저귀는 것 같은 울음소리는 그대로였다. 게다가 자신이 커졌다는 자각도 없는 건지, 전처럼 거리낌 없이 나에게 다가오려고 했다. 그 모습이 나에게는 제법 두렵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용순아, 너는 모르겠지만 지금 네 모습이 전과 아주 달라요.”

    “삑?”

    “그대로 돌진하면 아빠가 깔려서 죽을 수도 있거든? 조심스럽게 와 줄래?”

    “삐…….”

    조금 기가 죽은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잘못하면 저 커다란 앞발에 깔려 죽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다행히도 용순이는 한 발을 내딛더니 자신의 몸이 전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삐?’ 하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나를 향해 조심조심 발을 내디뎠다.

    “그래, 그래. 착하다.”

    “삐이이.”

    그러고 나서 내 쪽을 향해 머리를 불쑥 들이밀었다. 작았을 때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하는 건가? 손을 뻗어 더 크고 널찍해진 용순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용순이가 기분 좋은 듯 눈을 감고 콧김을 흥, 내뿜었다.

    “꺄우우…….”

    “아차, 용식이.”

    다 죽어 가는 것처럼 기운 없는 목소리에 얼른 시선을 내렸다. 분명 용식이는 백시후의 검에 맞아서 날개에 상처가 났었다.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기 전에 용식이의 상처를 다시 살피려고 했다.

    “……어라?”

    그런데 용식이의 날개는 핏자국만 남아 있을 뿐, 아까 봤던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그사이 다 나은 건가? 회복력이 빠른 건지, 아니면 큰 상처가 아니었던 건지. 어쨌든 안심이 돼서 한숨을 푹 내쉬는데, 용식이가 발발 떨며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꺄웅…….”

    “우리 용식이 많이 놀랐구나.”

    얼마나 많이 아프고 놀랐을까. 측은한 마음에 용식이를 꼭 안아 줄 때였다.

    콰아아앙!

    “……!”

    심상치 않은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울렸다. 흠칫 놀라서 고개를 돌리니, 샌드웜 킹과 싸우고 있는 강유현과 성유빈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용식이를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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