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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96)화 (96/228)

96화

“……미로?”

다른 곳은 돌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반면에, 여기는 제법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성인 두 명 정도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통로만 만들어 놓고 거대한 돌이 빈틈없이 쌓여 있었다.

왠지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수상한 분위기가 잔뜩 흐르는 곳이었다.

“허…….”

위를 올려다보니, 돌덩이들이 거의 천장까지 닿아 있었다. 좌우를 둘러봐도 꽉 막혀 있어서 앞으로 갈 수 있는 건 이 좁은 길뿐이었다.

“…….”

“어, 잠깐……!”

백시후는 말도 없이 앞으로 척척 걸어가기 시작했다. 왜 저렇게 제멋대로 구는 거지. 하여간 빌런들이란.

속으로 욕을 구시렁거리며, 하는 수 없이 백시후를 따라서 미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양 갈래로 길이 나 있었다.

“…….”

“…….”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마치 인생의 갈림길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선택을 잘못하면 영영 길을 잃게 되겠지. 마치 커다란 우리 안에 갇힌 기분이라 숨이 턱 하고 막혀 왔다.

이번에도 먼저 움직인 건 백시후였다. 고민하는 나를 놔두고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백시후의 옷소매를 붙들었다.

“아니, 그렇게 막무가내로 가면……!”

“……놔.”

“…….”

살벌하다. 살벌해. 몸이 닿은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무섭게 노려보는 건지. 이래서 나중에 보조 스킬은 걸 수 있으려나. 괜한 생각을 하며 옷을 잡은 손을 놓고 고개를 내저었다.

“조금 더 고민해 보는 게 어때? ……요?”

“오래 고민해 봤자 쓸데없는 일이다.”

“그렇긴 한데…….”

백시후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아무런 단서가 없는 상황에서 오른쪽으로 가든, 왼쪽으로 가든 똑같은 절반의 확률이고, 우선은 아무렇게나 가 보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었다.

나도 이렇게 답답하게 굴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주위가 돌로 가로막힌 흉흉한 공간이 계속해서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침을 꿀꺽 삼키는 나를 백시후가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넌 여기서 기다려라.”

“어……?”

“움직이기 힘들면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

뭐지? 묘하게 배려심 넘치는 말인데? 백시후가 갑자기 왜 이러지?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자, 눈살을 찌푸린 백시후가 고개를 휙 돌렸다.

아니지. 이건 내가 짐짝이 될 것 같아서 떼어 놓으려는 것뿐인 듯했다. 보조 스킬 때문에 숨 붙여 두는 거나 다름없는데, 내가 옆에서 자꾸 얼쩡대니까 짜증이 난 모양이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다. 나에겐 용순이도 있으니, 여기서 백시후를 기다리는 동안 큰일은 일어나지 않겠다 싶었다. 만약 백시후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 할 테지만 말이다.

“삐이!”

“용순아?”

그런데 어깨에 앉아 있던 용순이가 갑자기 훌쩍 밑으로 뛰어내렸다. 바닥에 착지한 용순이가 마치 무언가를 살피듯 작은 얼굴을 좌우로 움직였다. 그리고 백시후를 지나쳐 앞으로 파사삭 뛰어가기 시작했다.

“어? 용순아! 멈춰!”

몸이 조그마한데 움직이는 게 무척 빨랐다. 당황하며 용순이의 뒤를 쫓았다.

“한이진!”

백시후가 단숨에 내 뒤에 따라붙었다. 그에게서도 잔뜩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다.

“아니, 얘가…… 길을 찾는 거 같은데.”

“…….”

뛰어가다가 갑자기 멈춘 용순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노랗게 빛나는 눈이 똑같이 생긴 돌들을 연신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홱 돌렸다.

“삐익!”

“……저쪽?”

“삐이익!”

“…….”

내 물음에 용순이가 그렇다는 듯 큰 소리를 냈다. 작은 뒷발을 땅 위에 탕탕, 치며 나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백시후를 바라보았다.

“…….”

“…….”

잠시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백시후도 아마 고민하고 있을 터다. 하지만 아무리 그라고 할지라도 이런 미로에서 혼자 길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탐지 스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그 역시 탐탁지 않은 얼굴로 용순이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용순이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무언의 허락하에 구불구불한 길을 거침없이 뛰어가던 용순이가 우뚝 멈췄다. 덩달아 용순이의 뒤를 열심히 따라가던 나와 백시후도 멈춰 섰다. 벌써 미로가 끝난 건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

그러나 의문만 더욱 강해졌다. 용순이가 멈춘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앞을 가로막은 돌이 벽처럼 막아서고 있을 뿐이었다. 그걸 의아하게 보다가 용순이를 내려다봤다.

“용순아?”

“삑!”

“여기라고?”

“삐이익!”

맞다고 하는 듯 용순이가 삐익, 삑, 시끄럽게 울어 댔다. 나는 거의 시늉으로만 고개를 끄덕이며 백시후의 눈치를 봤다. 자기 성질 죽이고 용순이의 뒤를 따라왔는데, 눈앞에 벽이 가로막고 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힐까 싶었다.

“저…… 흠, 이제 우리끼리 길 찾는 게……. 어차피 여기 올 동안 아무 일도 없었고…….”

“…….”

“……저기요?”

스릉, 묘하게 익숙한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백시후가 아무 말 없이 검을 뽑았다. 나는 깜짝 놀라며 용순이를 손바닥 위에 올리고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아니, 마음에 안 들면 말로 하지. 왜 맨날 툭하면 검을 꺼내는지 모르겠다. 용순이가 장난친 거라고 생각해서 또 찌르려는 건가?

하지만 백시후의 검은 용순이를 향하지 않았다. 그의 검 끝이 향한 건, 용순이가 방금 가리킨 벽이었다. 두꺼운 돌을 쌓아 올린 벽을 향해 차분하게 검을 겨누었다.

“어……?”

설마 벽을 허물 셈인가?

황당하게 바라보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백시후가 검을 휘둘렀다. 스킬을 썼는지 새카만 기운이 흐르는 검이 벽을 쾅, 하고 내리쳤다.

콰광!

“윽……!”

그 여파에 내 몸이 뒤로 주륵 물러났다. 용순이를 두 손으로 보호하고 몸을 숙였다. 한 번으로는 벽이 무너지지 않았는지, 계속해서 쾅쾅 내리치는 기색이 느껴졌다.

쿠궁, 쿠구궁.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이 땅이 진동했다. 이러다 미로 안에 있는 몬스터들이 죄다 알아채서 몰려오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 미로 안에서 몬스터를 만난 적이 없었다. 던전 안이니까 당연히 몬스터가 널려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도 무언가가 다가오는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설마 미로 안에 몬스터가 없는 건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윽, 쿨럭.”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잠해진 것 같아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돌이 무너져서 그런지, 눈앞에 뿌연 연기가 떠다녔다.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한쪽 팔을 휘둘렀다. 서서히 눈앞의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헐.”

백시후는 정말로 벽을 완벽하게 조각조각 냈다. 까마득하게 높은 벽을 얼마나 잘 부쉈는지, 벽 전체가 용케 무너지지 않고 버티면서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공간만 뚫려 있었다. 의외로 민첩 스탯이 높은 거 아니야? 아니면 예술적인 기질이 있다든지.

순간 오싹한 생각을 하다가 쭈뼛거리며 백시후에게 다가갔다. 그는 뚫려 있는 벽 앞에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여기 대체 뭐가 있……. 어라?”

“…….”

옆에서 슬쩍 봤는데 벽 안쪽에는 의외로 넓은 공간이 있었다. 숨겨진 구역의 숨겨진 공간. 그것도 미로 안에 있는 수상쩍은 곳이었다. 몬스터라도 있나 해서 재빠르게 눈으로 샅샅이 훑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허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눈살을 찌푸리며 가운데에 떡하니 있는 돌무더기를 쳐다봤다.

검은색 빛을 띠는 돌이 반질반질하게 각을 맞춰 쌓아 올려져 있었다. 마치 투박한 느낌의 제단 같았다.

제단이라고 생각하니 이곳의 부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어렴풋이 이해되었다. SS급의 던전인데 몬스터는 잘 나타나지 않고 잠잠하기만 했다. 게다가 그 모습마저도 이상하지 않았었나? 짐승의 형태임이 분명했는데, 팔다리가 뒤틀려 있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었다.

이 제단은 대체 무슨 용도로 만든 걸까. 왜 주위에 몬스터가 하나도 없는 건가. 이상할 정도로 불안한 느낌이 들어 입술을 꽉 깨물었을 때였다.

“삐이익!”

“용순아?”

“삐이, 삐이이!”

손 위에 있던 용순이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제단 쪽에서 확 하고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윽……!”

“뭐지?”

제단에서 뿜어져 나온 불이 순식간에 주변을 감쌌다. 내 손 위에 있었던 용순이가 펄쩍 뛰어 밑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내 앞을 막으며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삐이이!”

“용순아!”

나도 앞으로 다가가고 싶었지만, 불길이 너무 뜨거워서 그럴 수가 없었다. 용순이가 있던 둥지와는 차원이 다른 온도였다.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그렇게 힘겨워하는 내 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물…….

“……뭐?”

오랜만에…… 제물인가…….

“……!”

섬뜩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분명 방금까지 불길에 뜨거움을 느꼈으면서, 이 기괴한 목소리로 인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불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제단에서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윽……!”

그런 나를 누군가가 뒤로 밀쳤다. 뒤로 밀려난 나는 앞을 막아선 누군가를 올려다봤다.

“가만히 있어.”

“……!”

백시후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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