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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93)화 (93/228)

93화

던전 안에는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사막이 배경인 무스펠헤임 던전은 여전히 이글거리는 태양이 무자비하게 작열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성유빈은 땀이 흐르는 이마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앞을 주시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강유현은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것 같았다. 꽉 쥔 성유빈의 주먹에서도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그게…….”

서하준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나 강유현의 기운에 짓눌려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겨우 침을 삼킨 서하준은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제기랄, 망할 한이진. 그러게 왜 오지랖을 부려서.

구덩이 속에서의 기억이 없는 서하준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성유빈의 말과 행동도 그렇고, 아무래도 구덩이 속에 빠진 자신을 한이진이 구하려 했었던 게 사실인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만 살아남아 구덩이를 빠져나왔고, 한이진은 자취를 감췄다. 그게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 서하준은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 유추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필 이럴 때 강유현이 와서 흉흉한 기운을 뿌리고 있었다. 대답을 잘못하면 저 요기가 철철 흐르는 대검이 자신을 반으로 갈라놓을 것 같았다.

게다가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는가. S급들도 제법 모인 전투팀이 하나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샌드웜을 혼자 두 놈이나 물리쳤다. SS급은 그 정도로 엄청난 존재였다. 서하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러니까, 한이진 능력자는…….”

무엇보다 문제는 자신의 목숨뿐만이 아니었다. 한이진은 무려 오딘 길드와 계약한 능력자였다. 자신의 탓으로 한이진이 위험해졌다는 게 오딘 길드에 알려진다면 뒷감당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티르 길드는 그날로 정말 끝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목소리가 더는 나오지 않았다. 서하준이 절망적인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형!”

강수현이 달려와 강유현의 앞에 섰다. 숨을 몰아쉰 강수현이 고개를 들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

강유현은 대답하지 않고 강수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떻게 된 건지 묻는 눈빛에 강수현이 얼른 말을 이었다.

“저번 던전에서처럼 이진 형이 갑자기 사라졌어. 위치도 잘 모르겠고.”

“탐지가 안 된다고?”

“응, 나랑 해송하 능력자가 못 찾는 거면 이 구역에는 확실히 없는 거야.”

“…….”

입을 다문 강유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방금 전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백시후와 대치하던 중 갑자기 생긴 구덩이에 몸이 빠졌고, 동시에 등급 이상 현상이 생겼다. 강유현은 곧바로 스킬을 써서 구덩이를 빠져나왔다.

함께 구덩이에 빠졌던 백시후는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저 안에 처박혀 있는지, 아니면 그사이 모습을 감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기척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샌드웜의 기척이 느껴져 이곳에 왔다. 무스펠헤임 던전을 공략하는 공대팀이 샌드웜들에게 공격받고 있는 걸 보고 무작정 검을 휘둘렀다.

샌드웜을 물리치고 곧바로 한이진을 찾았으나,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정황상 샌드웜이 나타나기 전, 자신과 백시후를 덮쳤던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여기도 두 사람이 빠졌는데, 한 사람은 나오고 나머지 한 사람은 나오지 못했다. 섬뜩한 느낌에 강유현의 눈가가 부르르 떨렸다.

“빨리 찾아.”

“우리도 그러고는 있는데…… 응?”

뒤쪽에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강수현과 강유현은 자신들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작은 몸을 잔뜩 부풀리고 있는 드래곤의 모습이 보였다. 조그마한 몸에 있는 가시가 위로 비쭉 솟아올랐다.

“캬앙!”

철을 두드리는 듯한 쇳소리가 용식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용식이에게 닿았다.

“컁! 컁!”

“……!”

푸드덕거리며 공중으로 날아오른 용식이가 어딘가로 향했다. 의아하게 용식이를 바라보던 강유현과 강수현은 무언가를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소환수들에게는 주인을 찾는 본능이 있었다. 탐지 스킬로도 찾을 수 없는 한이진을 소환수라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서 따라가!”

퍼뜩 정신을 차린 성유빈이 소리쳤다. 그녀 역시 용식이가 세(Sæ) 던전에서 실종된 한이진을 찾기 위해 중간 보스 몬스터와 싸웠던 걸 떠올렸다. 아마도 저 소환수는 제 주인을 다시 찾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다.

그걸 직감적으로 느낀 성유빈이 용식이의 뒤를 따랐고, 곧 공대가 전부 이동했다.

***

대체 이곳이 왜 ‘불의 영역’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불’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었다. 가스레인지에 나오는 파란 불이라든지, 장작에서 타오르는 새빨간 불이라든지.

그리고 최근에 봤던 불은 그보다 훨씬 맹렬하게 타올랐다. 바로 성유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불꽃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아무리 둘러봐도 불같은 건 찾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사막이지만 지하에 있어서 그런지 서늘한 느낌마저 들었다. 급격하게 싸늘해진 기온에 나도 모르게 팔을 문질렀다.

“…….”

“…….”

게다가 말 한마디 붙일 수 없는 상대가 옆에 있어서 그런지 더 춥게 느껴졌다. 눈치를 보다가 무표정한 얼굴의 백시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시후…… 형?”

“…….”

로키 길드가 그렇게 박살 나고 난 후에 대치했을 때는 연상이고 뭐고 반말을 찍찍 내뱉었는데, 둘만 남겨진 상황에서 백시후가 경고했다. 반말하지 말라고. 그래서 그에게 하는 말이 어딘가 좀 이상해져 있었다.

“길은 알고 가는 거 맞아……요? 거기는 아무리 봐도 아닌 거 같은데……요?”

“…….”

“저기……요?”

얘는 아까부터 뭘 알고 가는 건가.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는 백시후의 뒤를 졸졸 따라가고 있긴 한데 영 미심쩍었다.

걸음을 옮기던 백시후가 우뚝 멈춰 섰다. 덩달아 나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백시후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어…….”

몰랐는데 어느샌가 백시후의 손에 긴 장검이 들려 있었다. 같은 능력자들을 수도 없이 도륙했을 검날은 시퍼런 빛을 띠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 화가 나도 검은 일단 내려놓고…….”

“…….”

우리 제발 말로 합시다. 그런 말을 마저 하려고 했으나, 백시후가 검을 크게 휘두르자 목구멍 안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미친놈! 참다못해 말 좀 걸었다고 바로 죽이려고 하냐. 그래, 어디 너 혼자 잘해 봐라. 이…….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몸이 반으로 갈라지거나 목이 떨어지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설마 너무 순식간에 잘라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건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크에엑!”

“……엥?”

돼지 멱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검을 든 백시후가 이상한 모습의 몬스터들과 싸우고 있었다.

아니, 싸운다는 말은 좀 이상했다. 몬스터들의 등급이 그다지 높지 않은지, 백시후의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마치 팔과 다리가 뒤틀린 것 같은 기묘한 모습의 괴물들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대체 저것들은 뭐지? 쌍스급에서 묘사했던 몬스터들 중 일치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하자, 어느새 전투를 끝낸 백시후가 유유히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아이템 챙겨.”

“…….”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살벌하게 말하는 백시후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루만 남은 몬스터들의 시체로 다가갔다.

공대에서는 지원팀에 속한 수거팀이 알아서 다 했지만, 여기서는 아니었다. 나는 찍소리도 못하고 백시후의 명령에 몹들이 떨어트린 아이템을 주워야 했다.

그 단시간에 얼마나 많은 몹들을 처리한 건지, 가루 사이에 파묻힌 아이템이 꽤 많았다. 대부분은 잡템으로 보였는데, 송곳니나 발톱처럼 보이는 것들도 꽤 기괴하게 생겼다.

어쨌든 지금은 아무 생각하지 않고 아이템을 챙겼다. 내 개인 인벤토리가 아닌, 공용 인벤토리에 쑥쑥 집어넣었다. 지금은 백시후와 파티를 맺고 있기 때문에 클리어하면 알아서 아이템 분배가 될 것이다.

“……응?”

잿더미를 파헤치던 중, 이상한 촉감이 만져졌다. 아이템의 딱딱한 느낌이 아니었다. 뭐지? 의아해지는 찰나, 손가락 끝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으악!”

깜짝 놀라 잿더미 속에서 손을 꺼냈다. 그러자 짐승의 입 같은 게 내 손가락을 꽉 물고 있었다. 손가락을 타고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몬스터가 입과 이빨만 남아 내 손가락을 깨문 것이었다. 놀라서 손을 붕붕 흔들었으나 찰거머리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뒤늦게 손끝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순간 당황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너무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손을 움직였다.

총을 쏘면 내 손가락도 날아가 버릴 테니, 칼을 써야 했다. 인벤토리 안에 쓸 만한 나이프가 있는지 뒤졌다. 그러나 평소보다 당황해서 그런지 인벤토리를 잘 뒤질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피가 흐르는 양이 심상치가 않았다.

“윽…….”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설마 이 입만 남은 몬스터, 독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난감한데.

겨우 인벤토리에 있는 잭나이프를 잡고 꺼냈을 때였다.

팍!

“……!”

“도저히 못 봐 주겠군.”

혀를 쯧쯧, 찬 백시후가 차가운 눈으로 날 내려다봤다. 그의 눈에 한심하다는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아니, 당황하면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백시후가 저렇게 뭐라고 할 정도로 시간을 길게 끈 것도 아니었다.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들어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감싸며 백시후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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