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이제 출발하도록 하죠.”
“…….”
결국 강유현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 공대는 출발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난 이번엔 공대의 끝이 아닌, 선두에서 출발했다. 바로 전투팀의 한가운데였다.
확실히 후열에 있는 지원팀과 함께 있을 때와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공대의 선두에서 몬스터와 직접적으로 싸우는 전투팀에게서는 비장한 분위기까지 흘렀다. 덩달아 나도 잔뜩 긴장됐다.
성유빈은 나에게 달라붙어 방어 아이템을 이것저것 챙기기 바빴다. 괜찮다는 데도 인벤토리를 뒤져서 끝도 없이 장비 아이템을 쏟아 냈다.
“저 귀 안 뚫었는데요.”
“아이템이니까 저절로 착용됩니다.”
“어…… 근데, 이거 등급이 높아서 제가 착용하면 귀속될 텐데.”
“괜찮습니다.”
“…….”
눈을 부릅뜬 성유빈이 괜찮다는 말을 강조했다. 생각해 보니 성유빈만큼 돈을 잘 버는 능력자도 얼마 없을 텐데 괜한 걱정이다 싶었다. 나는 군말 없이 동그란 모양의 피어싱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뭘요.”
그녀의 말대로 피어싱같이 생긴 아이템은 귀에 대자마자 저절로 착용됐다. 신기한 마음에 손가락 끝을 대자 차가운 금속이 만져졌다. 귀도 안 뚫었는데 진짜 신기하네. 감탄하며 만지작거리자 짜증 어린 서하준의 말이 주변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출발합시다!”
“…….”
저놈 일부러 내 쪽 보면서 소리친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얼굴을 찌푸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발밑에 사박거리는 모래가 어제보다 더 뜨거워진 것 같았다.
“하…….”
무스펠헤임 던전은 갈수록 더위가 더 심해졌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전투팀을 따라갔다. 몸이 고되긴 해도 전투계 능력자들에게 보조 스킬을 빨리 걸어 줄 수 있으니 보스 몬스터에게 그만큼 더 빨리 갈 수 있을 것이다.
“음?”
더위에 지친 개처럼 헥헥거리면서 걷는데, 옆에서 미지근한 미풍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이든이 손바닥을 펼치고 있었다. 아마 바람 능력으로 나에게 바람을 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좀 괜찮아?”
“어……. 좀 낫다. 고맙다.”
사실 너무 더워서 시원하기는커녕 미지근한 바람 때문에 오히려 짜증이 더 날 정도였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나를 생각해서 바람을 날려 주고 있는 건데 사이코처럼 화를 낼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이든은 내 떨떠름한 얼굴에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 드렸던 아이템 꺼내 드릴까요?”
“네?”
옆에 다가온 이건호가 넌지시 물었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멀쩡한 이건호의 얼굴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그 역시 서하준의 변덕에 휘둘린 처지였다. 원래는 나와 같이 지원팀에서 설렁설렁 있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이건호의 얼굴에는 흔한 짜증도 서려 있지 않았다. 멘탈이 진짜 튼튼한가 싶었다.
“괜찮아요. 아직 버틸 만하거든요.”
“그래요?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세요.”
“하하, 네…….”
이건호가 줬던 아이템이 새삼 생각나 멋쩍게 웃었다. 흰색 천 모양의 햇빛 가리개 아이템은 뒤집어쓰면 정말 시원했다. 결국 용식이의 장난감이 되고 해송하의 엉덩이에 깔려 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왠지 이번에도 비슷한 패턴이 될 것 같아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이건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사막 전갈 떼다!”
“전투 준비!”
“……!”
오아시스를 벗어나자마자 몬스터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무스펠헤임 던전에서 흔히 보이는 사막 전갈들이었다. 꼬리에 치명적인 독을 가진 녀석들인데, 등급이 높지 않아 그다지 위협적인 몬스터는 아니었다. 전투팀의 능력자들도 전갈이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조금 안도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어, 숫자가 좀…….”
“……?”
그런데 몰려오는 전갈들의 숫자가 심상치 않았다. 저 멀리 수평선까지 까맣게 보일 정도로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혀를 찬 서하준이 뒤늦게 외쳤다.
“야, 장판 깔아!”
“네!”
광역 스킬을 가진 능력자 몇 명이 앞으로 나서서 스킬을 썼다. 그리고 장거리 스킬과 무기를 가진 능력자들도 우르르 앞으로 몰려갔다. 이윽고 전갈 떼와 능력자들이 격돌했다.
쾅, 콰광!
“윽……!”
전투의 여파로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 났다. 이를 악물며 버텨 내자 이든의 손이 내 허리를 감쌌다.
“위로 올라갈까?”
“아니, 아직.”
지금은 아직 전투 초반이라 버틸 만했다. 앞을 쳐다보자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 전투팀이 보였다. 성유빈이 내지른 주먹에 불꽃이 터지고 수도 없이 많은 몬스터가 불에 타올랐다. 후끈한 열기가 얼굴에 확 와 닿았다.
이제야 진짜 던전 안에 온 느낌이 나네. 인벤토리에서 총을 꺼낸 나도 전갈을 향해 미친 듯이 총을 난사했다.
“꺄우!”
“멀리 가지 마, 용식아!”
“꺄아우!”
용식이는 마치 두더지를 때려잡듯이 폴짝거리며 전갈 사이를 누볐다. 용식이는 어쩌면 이 전투를 놀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를 악물며 계속 총을 쏴 댔다. 땅을 새카맣게 만들던 전갈 무리의 수가 점점 줄어드는 게 보였다. 능력자들이 겨우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을 때였다.
[……의 간섭에 의해 등급 조정이 이루어집니다.]
[무스펠헤임-S207의 등급이 SS급으로 조정됩니다.]
“…….”
망할 시스템. 눈치 없는 이상 현상 같으니!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등급 이상 현상을 알리는 시스템 음성에 잔뜩 당황한 서하준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발밑이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
샌드웜의 기척이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이든을 붙들었다.
“가자!”
“하지만…….”
“빨리!”
“……알았어.”
이든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몸이 붕 떠오르더니, 이든이 나를 안고 날아갔다. 다행히 샌드웜이 튀어나오기 전에 서하준의 곁에 갈 수 있었다.
“서하준 능력자!”
“……어?”
“손 줘요, 어서!”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서하준 역시 S급 능력자였다. 주변에는 그 말고 보조 스킬을 걸 만한 능력자가 없었다. 그러나 서하준은 멍하니 내 뒤를 쳐다볼 뿐이었다.
“지금 뭐 하는…… 윽!”
쿠르릉. 쿠릉.
다시 소리친 순간, 발밑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몸이 기우뚱거리더니 모래 속으로 발이 쑥 들어갔다. 당황하는 내 귀에 이든과 용식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진아!”
“꺄우!”
“이든, 용……식…….”
순식간에 모래에 파묻히는 내 머릿속에 무덤덤한 시스템 음성이 들렸다.
[특수 조건에 부합하여 ‘히든 스테이지’에 진입합니다.]
[무스펠헤임-SS207. 숨겨진 구역, ‘불의 영역’이 열립니다.]
‘그건 또 뭐야…….’
이윽고 주변이 암전되듯이 새카맣게 변했다. 희박해지는 산소를 느끼며 까무룩 눈을 감았다.
***
“서하준! 이 개자식아!”
“으윽……!”
모래 구덩이에서 겨우 빠져나온 서하준을 죽일 듯이 성유빈이 달려들었다. 죽다 살아난 서하준이 성유빈에게 멱살을 잡힌 채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성유빈을 쳐다봤다.
“왜 너 혼자 나와, 한이진 능력자는 어디 있어!”
“나도 모르…….”
“그게 말이 돼?”
“…….”
서하준은 억울했다. 모래 구덩이에서 겨우 빠져나왔더니 다짜고짜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는 한이진과 같이 모래 구덩이에 빠졌다는 자각도 없었다. 어느 순간 상태 이상에 걸린 듯 정신이 멍해졌기 때문이었다.
“왜 한이진 능력자를 나한테서 찾는…… 윽!”
“크윽.”
쿠구구구.
땅이 다시 격하게 흔들렸다. 이번에는 정말 심상치 않은 땅울림이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에서 샌드웜 한 마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키에에엑!”
“이런……!”
“키에에에!”
“……!”
심지어 한 마리가 아닌 둘이었다. 반대편에서도 비슷한 크기의 샌드웜이 불쑥 튀어 올라 거친 포효를 내질렀다.
샌드웜 하나에도 전투팀이 전멸할 뻔했는데 둘이나……. 성유빈의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화신의 가호(S)의 효과가 50% 이상 하락합니다.」
「상태 이상 ‘공황’의 영향을 받습니다.」
「불굴의 의지(S)의 효과가 약해집니다.」
「파티원들이 상태 이상 ‘공황’의 영향을 받습니다.」
「통솔자의 인도(A)가 발동하지 않습니다.」
“제기랄.”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보조 스킬을 받아야 샌드웜 한 마리를 간신히 해치울까 말까인데 둘이나 있다니. 까득, 이를 깨문 성유빈이 필사적으로 능력을 끌어 올렸다.
“키아아!”
“어딜!”
소리치며 주먹을 내질렀다. 불의 장막이 성유빈의 주변에서 화르륵 타올랐다. 그러나 샌드웜 두 마리를 막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진짜 이번엔 전멸인가…….’
불의 장막을 뚫고 점점 더 다가오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더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콰득, 콰드득!
“……!”
새카만 무언가가 날아와 샌드웜을 도륙 냈다. 샌드웜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샌드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초록색 체액이 성유빈의 얼굴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윽…….”
남자는 흉흉한 기세로 다른 샌드웜을 공격했다. 익숙한 뒷모습에 성유빈의 눈이 커졌다.
“……강유현?”
“…….”
그토록 기다리던 강유현이었다. 순식간에 샌드웜을 해치운 그가 뒤를 돌아 성유빈과 주변을 훑었다.
“한이진은?”
“…….”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강유현의 위압감에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마치 지옥에서 타오르는 불처럼 푸른색을 두른 강유현의 눈이 공대를 샅샅이 훑었다.
“한이진 어디 있어.”
“윽……!”
마지막으로 시선이 머문 곳에 형편없이 쓰러져 있는 서하준이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겁에 질린 얼굴로 강유현을 올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