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언제부터 있었지?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느낀 건 성유빈도 똑같았는지, 안색을 굳히며 이건호에게 물었다.
“그쪽은 누굽니까?”
“아.”
날카롭게 묻는 성유빈을 향해 이건호가 습관처럼 빙긋 웃었다. 정말 누구 앞에서도 방긋방긋 잘 웃는 사람이었다. 그 모습이 꽤 어울리기도 하고.
웬만하면 성유빈의 앞에서 기가 죽을 만도 한데, 이건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성유빈에게 대답했다.
“저는 이번 공대에 무소속으로 참가한 이건호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성유빈입니다.”
악수를 나눈 이후에도 성유빈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탐색하는 시선으로 이건호를 훑는 게 느껴졌다.
“우리의 대화를 엿들은 겁니까?”
“음, 엿들은 건 아니고…….”
곤란한 것 같은 얼굴로 이건호가 손가락을 들어 제 뺨을 긁었다. 그리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저는 그냥 지나가는 건데, 패시브 스킬 때문에 의도치 않게 오해하시더군요. 이게 기척을 줄이는 스킬이라서.”
“오해요?”
그 말을 들은 성유빈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위로 솟았다. 내가 봐도 오해라고 치부하긴 힘든 상황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곤란한 대화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들었다니. 성유빈도 나도 거북한 눈으로 이건호를 보고 있었다.
“정말인데…….”
“…….”
눈썹을 축 늘어트린 이건호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방금 이건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거 재미있겠는데요.
그건 대체 무슨 의도로 한 말이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방금 우리가 한 말 들은 거죠?”
“네, 어쨌든 엿들은 게 되었네요.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건 성유빈이 아주 위험한 발언을 했다는 거다. 그걸 다른 사람이 들었다는 거고. 이건호가 티르 길드나 다른 길드 소속이 아닌 무소속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기는 한데.
어색한 얼굴로 이건호에게 계속 말했다.
“방금 성유빈 능력자는 그냥 농담한 거거든요. 그렇게 심각한 얘기가 아니…….”
“전 농담한 거 아닙…….”
“……니까, 그냥 넘어가 주셨으면 좋겠네요!”
얼른 성유빈의 입을 막으며 황급히 말을 이었다. 성유빈은 할 말이 많다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무시하며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이건호를 응시했다.
“흠, 아쉽네요. 저도 티르 길드에 불만이 많았는데.”
“…….”
“이대로 가다간 정말 전멸할 것 같단 말이죠. 솔직히 돈보단 목숨이 더 중요하잖아요?”
어깨를 으쓱인 이건호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조금 전 공대가 전멸할 뻔한 것 때문에 불안함을 느끼는 능력자가 많은 모양이었다.
확실히 이렇게 계속 공략하면 안 될 것 같다. 티르 길드가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는데.
“왜 티르 길드는 한이진 능력자의 보조 스킬을 적극적으로 안 쓰는 걸까요? 이상하지 않아요?”
“그건…….”
아마도 부길마인 서하준이 나를 싫어하기 때문이겠지. 솔직히 그가 왜 나를 그렇게 싫어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한이진과 초면 아닌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으음…….”
아니면 설마 게이트 사태 전에 한이진과 만난 적이 있나? 그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품은 건가?
한이진의 과거까지는 세세하게 알지 못하니, 어쩌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만나자마자 그 얘기부터 꺼내지 않았을까 싶다.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왜 그러는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프레이야 길드는 내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서라도 더 적극적으로 스킬을 쓰도록 요구했다. 보조 스킬의 효과를 직접 눈으로 본 다음에는 강유현과 스킬 사용 제한으로 대립하기까지 했다. 어쨌든 잘 활용해서 무사히 클리어할 수 있었지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원래 열등감이 심한 인간입니다.”
“…….”
성유빈이 이를 갈며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역시나 서하준을 잘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혹시 서하준 부길마와 예전부터 알던 사이였어요?”
“……별것 아닌 인연입니다.”
내 물음에 안색을 굳힌 성유빈이 딱딱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리고 놀라운 말을 내뱉었다.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었거든요. 게이트 사태 전에 말입니다.”
“……!”
“그때부터 아주 재수 없는 자식이었죠.”
불쾌한 기억을 떠올린 듯 성유빈이 이를 으득 갈았다.
소설에서는 두 사람이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동창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하준을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성유빈에게서 철철 흘렀다.
“어쨌든 저희도 방법을 좀 생각해야겠는데요.”
티르 길드가 옳은 결정을 내린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지금 흐름으론 그다지 기대하기 힘들었다. 어떻게든 전멸하지 않고 던전을 클리어할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그러니까 티르 놈들을 몰살시켜서…….”
“그건 안 된다니까요.”
자꾸만 히로인답지 않게 비인도적인 방법을 말하는 성유빈에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방해되는 티르 길드원들을 다 죽이고 마음대로 하자니. 안 될 일이었다.
“혹시 이런 방법은 어떨까요?”
“네?”
잠시 잊고 있었던 이건호가 나와 성유빈을 보며 씩 웃었다. 왠지 악동 같은 미소에 고개를 갸웃했다.
“강유현 능력자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버는 거예요.”
“……어떻게요?”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자, 이건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
“길마는 아직도 연락이 없어?”
길드원끼리 남자마자 서하준은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러자 아이템을 확인한 길드원이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예, 아직 아무 말 없으십니다.”
“하, 제기랄.”
얼굴을 팍 일그러트린 서하준이 주변을 가린 천막을 거세게 잡아당겼다. 바깥의 따가운 시선을 차단한 후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티르 길드가 무스펠헤임 던전 공략에 실패하자, 지금까지 길드를 후원하던 대기업의 지원이 줄줄이 끊어지기 시작했다. 길마인 진상현이 던전 공략에 참가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총수들을 만나 직접 설득하던 진상현은 던전에 들어가기 직전 묘한 말을 남겼다. 자신이 가기 전까지 오딘 길드에서 지원 오는 한이진 능력자를 최대한 전투 관련에서 배제하라고 말이다.
길마의 말이기도 하고, 서하준 역시 갑작스럽게 급부상하며 이름을 떨치는 한이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수긍하며 따랐다.
한이진. 정말 거슬리는 놈이었다. 하찮은 B급 능력자 주제에 S급 보조 스킬 하나 얻었다고 우쭐대는 꼴이라니.
보조 스킬 하나만 달랑 S급이라면, 본인의 능력 자체는 형편없는 놈이라는 뜻 아닌가. 그런 주제에 S급 능력자들에게 둘러싸여 떵떵거리는 꼴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길마의 말에 옳다구나 한이진을 찬밥 신세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전멸 직전의 위기였다. 등급 이상 현상으로 나타난 샌드웜으로 인해 공대가 전멸할 뻔하고 나니 서하준 역시 위기감이 들었다. S급 보조 스킬로 성유빈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바로 눈앞에서 보기까지 했다.
지금이라도 한이진에게 보조 스킬을 부탁해야 하나. 자신을 노려보던 타 길드원들이 생각났다. 서하준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 역시 프레이야 길드처럼 한이진 능력자의 보조 스킬을 적극적으로 쓰는 게 좋지 않을까요…….”
“…….”
한 길드원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했다. 평소 강압적으로 구는 서하준이 무서웠지만, 그보다는 목숨이 더 중요했다. 일단 살아서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길드원을 서하준이 지그시 노려보았다.
안 된다. 이미 한이진에게 한껏 좋지 못한 태도를 취했는데, 자신이 굽혀서 들어가는 건 도무지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공략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하준 역시 제 목숨 아까운 줄은 알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계속 같은 태도를 취하면서 한이진이 스킬을 쓰게 만들 방법이…….
“……!”
아, 하고 서하준의 입이 벌어졌다. 멀리 있었던 한이진이 한걸음에 달려와 보조 스킬을 썼던 때를 떠올렸다. 바로 성유빈이 위험해졌을 때였다.
“좋아.”
입술 끝을 올린 서하준이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티르 길드원들은 그런 서하준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봤다.
***
“이제부터는 대열을 좀 바꿔 볼까 합니다.”
“……?”
천막에서 나온 서하준이 뜬금없이 하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는 일방적으로 각 공대팀의 대열을 이것저것 바꾸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짓인가, 하고 바라보는데 서하준이 나를 보며 말했다.
“한이진 능력자는 전투팀으로 이동해 주십시오.”
“네?”
뜬금없이 보조 스킬을 가진 내가 전투팀에?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보자 서하준이 뻔뻔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원팀에서는 즉각적으로 스킬을 걸기 힘들지 않습니까. 필요할 때 전투원들에게 보조 스킬을 걸어 주었으면 합니다.”
“그럼 차라리 전투 시작 전에 스킬을 거는 게…….”
“세(Sæ) 던전과 다르게 무스펠헤임 던전은 넓은 사막 필드입니다. 갑자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곳에서처럼 편하게 스킬만 걸 수는 없습니다.”
“…….”
개소리인 듯, 아닌 듯 꽤 논리정연하게 느껴지는 말투로 서하준이 술술 말을 내뱉었다. 나는 그의 말에 인상을 팍 찡그렸다.
“개소리 좀 그만해. 서하준. 더는 못 참겠으니까.”
온몸에 분노를 띠며 성유빈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스쳤다. 티르 길드를 몰살시키고 멋대로 던전 클리어를 하겠다는 말. 진지했던 말을 농담으로 치부하긴 힘들었다. 서둘러 성유빈을 붙잡고 앞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