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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88)화 (88/228)
  • 88화

    싸늘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성유빈은 금방이라도 서하준을 한 대 칠 기세였고, 공대 모두가 그걸 조마조마한 심경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불안한 눈으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어쩐지 티르 길드가 왜 공략에 실패했는지 알 것 같았다. 실력보다도, 이렇게 단합이 안 되는데 어떻게 SS급 던전을 공략할까 싶었다.

    소설에서는 강유현이 다 쓸어 버려서 티르 길드의 무능함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강유현도 없고, 정말이지 총체적 난국이었다.

    한숨을 푹 내쉬는 순간, 고개를 든 서하준과 눈이 딱 마주쳤다. 나를 본 그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쪽도 나한테 할 말 있습니까?”

    “네?”

    이제는 별안간 가만히 있는 나에게 시비를 건다. 어이가 없어서 눈살을 찌푸리며 서하준을 쳐다봤다.

    “할 말 있으면 해 봐요. S급 보조 스킬로 도움 됐다고 으스대고 싶은 것 같은데.”

    “허…….”

    그냥 좋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자꾸 선 넘네, 이 새끼.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서하준을 노려봤다. 으스대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래도 그 상황에서 내 보조 스킬이 도움 된 건 사실이지 않은가.

    어쩌면 오지랖일 수도 있었겠지만, 성유빈을 비롯해 전투팀이 힘들어 보인 것 또한 사실이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못한 건 없는 거 같은데? 더 이상 참지 않고 서하준을 향해 입을 열려고 했었다.

    “할 말은 제가 있는데요. 부길마님.”

    “……?”

    갑자기 다른 곳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를 노려보던 서하준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고, 나 역시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강수현?”

    강수현은 인상이 좋은 편이라 그런지 웃고 있지 않을 때도 항상 어딘가 해맑은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인상 좋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놀란 얼굴로 강수현을 쳐다봤다.

    “전투팀의 진영이 다 무너지는 바람에 저와 해송하 능력자도 전투에 휩쓸렸다고요. 그나마 제가 정신계 스킬로 시간을 끌 수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저희 둘 다 어떻게 됐을지 모른단 말입니다.”

    “그…….”

    “길잡이 없이 하는 던전 공략은 자살행위에요. 티르 길드 부길마님, 당신은 방금 공대를 전멸시킬 뻔했던 겁니다.”

    “…….”

    계속 이어지는 강수현의 날카로운 말에 서하준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나도 처음 보는 강수현의 모습에 두 눈을 깜박였다.

    “으…….”

    “……!”

    그러다 강수현의 옆에서 비틀거리는 해송하를 발견했다. 화들짝 놀라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해송하 능력자! 괜찮아요?”

    “으, 네…….”

    “쮸쮸! 쮸!”

    그의 어깨에 매달린 라티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울어 댔다. 해송하가 손으로 가린 가슴팍에서 피가 번져 나오는 것을 본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찾았다.

    “구슬 능력자! 여기예요!”

    “아, 넵!”

    헐레벌떡 뛰어온 구슬이 해송하의 앞에 섰다. 그리고 그에게 힐을 걸어 줬다. 하얗게 질려 있던 해송하의 안색이 점점 원래대로 돌아왔다.

    “감사해요. 구슬 능력자님.”

    “아니에요. 그리고 이제 당분간 무리하시면 안 돼요.”

    “네, 그럴게요.”

    고개를 끄덕이는 해송하를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구슬은 치료를 끝내자마자 눈치를 보며 다른 곳으로 뛰어갔다. 전투팀을 비롯해, 해송하처럼 부상을 입은 다른 헌터들도 꽤 많았기 때문이었다.

    “…….”

    사람들의 시선이 이번에는 한곳으로 쏠렸다. 사람들의 매서운 시선에 서하준이 당황하며 얼굴을 경직시켰다.

    “그…… 흠, 흠.”

    헛기침한 서하준의 얼굴이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아무리 뻔뻔해도 민망함은 느끼는구나 싶었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본 그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앞으로의 공략에 대해서는 회의 후 다시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길드원들을 데리고 오아시스 한쪽 구석으로 도망치는 것처럼 이동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누군가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이 던전 공략, 과연 정말로 괜찮은 건가. 속으로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서 있지 말고 앉아요. 해송하 능력자.”

    “아…… 감사합니다.”

    용식이가 가지고 놀던 햇빛 가리개를 탁탁 털고 바닥에 깔았다. 해송하를 그 위에 앉혀 놓고 나서야 좀 안심이 되었다.

    “너는? 넌 다친 데 없냐?”

    “저요?”

    강수현을 돌아보며 묻자, 색소가 옅은 갈색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리고 곧 다시 가늘게 뜨며 나를 응시했다.

    “저도 여기 다쳤어요. 형.”

    “어디?”

    해송하의 옆에 있었으니 강수현도 다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정말인가 보다. 상처를 살피려고 강수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해송하만큼 심하면 다시 구슬을 부르고, 아니면 포션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여기요.”

    “……?”

    강수현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걸 본 나는 눈썹을 왈칵 찌푸렸다.

    “야, 장난하냐?”

    새끼손가락을 든 강수현이 아프다고 칭얼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지도 못할 미세한 상처가 새끼손가락 끝에 나 있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노려보자 강수현이 두 눈을 휘었다.

    “진짜 아프단 말이에요.”

    “하…… 그런 거, 침 한번 바르면 나아.”

    “그럼 형이 침 발라 주면 안 돼요?”

    “뭐?”

    실실 웃는 얼굴을 보며 인상을 썼다. 이게 또 장난이나 치고.

    이번에는 정말 단단히 한마디 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나보다 빨리 선수를 치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빨아 줄 테니까 저리 꺼져.”

    “뭐라고요?”

    이든과 강수현이 또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새끼손가락을 치켜든 강수현이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필요 없거든요.”

    “사양하지 말고. 내가 잘 빨아 줄 테니까.”

    “…….”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해송하를 흘끗거렸다. 외모만은 아기 다람쥐 같은 해송하가 겁먹고 파들거리는 게 더욱 안쓰러워 보였다. 그걸 본 나는 얼굴을 더욱더 구기며 소리쳤다.

    “야! 저질 같은 농담 저기 가서 해, 짜증 나니까.”

    “꺄우!”

    “어휴…….”

    그러나 이놈들은 지치지도 않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잘 지내다가도 한 번씩 꼭 이런다니까.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성격이 안 맞나?

    확실히 이든은 겉모습과 행동하는 것만 봐도 불량한 양아치 같고, 강수현은 단정한 모범생 같은 이미지를 풍기긴 하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몸을 돌렸다. 더 싸우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지. 진절머리가 난 나는 이든과 강수현에게서 멀어져 누군가를 찾았다. 그리고 오아시스 근처에서 구슬에게 힐을 받고 있는 성유빈을 찾아냈다.

    “성유빈 능력자!”

    “아, 한이진 능력자…….”

    지친 얼굴을 한 성유빈이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나는 일어나지 말라며 손짓으로 그녀를 말렸다.

    “무리하지 말고 쉬세요.”

    “감사합니다.”

    “다친 곳은 괜찮나요?”

    “네, 이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성유빈은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아까 샌드웜의 정신 이상 스킬로 같은 S급들도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그녀만큼은 꿋꿋하게 일어나서 불의 장벽으로 샌드웜을 막아 냈었다. 만약 성유빈이 그렇게 시간을 끌지 않았다면, 내가 갔을 때 전투팀이 당해 버렸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공대 전체가 순식간에 전멸하고, 이번에도 티르 길드는 무스펠헤임 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했겠지.

    아찔했던 순간을 다시금 되새기며 성유빈을 내려다보았다. 성유빈은 앉은 자세로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깐 덕분에 살았습니다. 한이진 능력자가 보조 스킬을 걸어 주지 않았다면 전 지금쯤 죽었을 겁니다.”

    “아니, 그런 끔찍한 말은 하지 마시고요.”

    손사래를 친 내가 고개를 저었다. 소설의 히로인인 그녀가 그렇게 쉽게 죽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히로인의 위기에는 당연히 주인공이 와야 하는 거 아닌가? 강유현이 늦어도 너무 늦는 것 같은데…….

    걱정이 된 나는 고개를 숙여 성유빈의 얼굴 가까이에서 속삭이듯이 말했다.

    “근데, 저기……. 아무래도 강유현을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음…….”

    고민을 하는 건지, 성유빈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그녀가 조금 멍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한이진 능력자는 항상 좋은 향기가 나는데, 혹시 향수라도 뿌리십니까?”

    “네?”

    갑작스러운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전에 강수현도 나에게 비슷한 말을 했던 거 같은데. 얼굴이 핼쑥해지는 걸 느끼며 성유빈에게 되물었다.

    “저 무슨 냄새 나요?”

    “아니, 냄새가 아니라…….”

    고개를 저은 성유빈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얼굴을 굳히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음……. 강유현이라고 하셨죠.”

    눈을 가늘게 뜬 성유빈이 오아시스의 다른 쪽을 흘끗거렸다. 그곳에서는 티르 길드의 부길마인 서하준과 그의 참모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곳을 보는 성유빈의 얼굴이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저도 그랬으면 하지만……. 티르 길드가 옳은 결정을 내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 역시…….”

    성유빈도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미 한번 전멸할 뻔한 이후라서 그런지 짙은 불신이 깔려 있었다. 성유빈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차라리 티르 길드 놈들을 다 죽이고 던전을 돌까요.”

    “……네?”

    “강유현만 오면 한이진 능력자의 보조 스킬로 우리가 다 쓸어 버릴 수 있습니다. 방해되는 티르 길드 놈들을 그냥 다 처리해서…….”

    “잠깐, 잠깐만요. 진정해요.”

    이글이글 타오르는 성유빈의 눈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이런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대체 히로인이 왜 이렇게 급발진하는 거냔 말이다. 곤란해하는 내 귀로 청량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그거 재미있겠는데요.”

    “……?”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니 이건호가 미소를 지으며 나와 성유빈을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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