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87)화 (87/228)

87화

“너 왜 그래?”

“그, 그거…….”

“아, 이거?”

이든의 손가락이 파들거리며 내 머리를 가리켰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손바닥에 착 감기는 천을 만지며 대답했다.

“햇빛 가리개 아이템 받았는데, 너무 더워서.”

“…….”

“왜? 이상하냐?”

혼자만 천을 쓰고 있는 모습이 이상한가 싶어서 물었는데, 이든은 입을 꾹 다물고 대답이 없었다.

얘가 왜 이러지? 더위 먹었나?

은근히 걱정되는 마음에 손을 뻗어 이든의 경직된 뺨을 툭툭 쳤다.

“괜찮냐? 냉방 아이템 쓰고 있는 거지?”

“…….”

“야!”

결국 정신을 못 차리는 이든의 뺨을 두 손으로 찰싹찰싹 쳤다.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서야 이든이 핫, 하고 정신을 차리더니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결혼하자! 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

“미친, 왜 또 개소리야.”

안 그래도 제정신이 아닌 놈이 더위 먹고 더 맛이 간 모양이다. 속으로 혀를 쯧쯧 차며 이든의 손을 뿌리쳤다.

“더위 먹은 게 심한 거 같은데 구슬 능력자한테 힐이나…… 어?”

“꺄우!”

“야, 용식아!”

팔랑거리는 천 조각을 반짝이는 눈으로 좇던 용식이가 기어코 앞발을 앞으로 뻗었다. 내 어깨에 매달려 있던 용식이가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서 햇빛 가리개를 잡아채 갔다.

“꺄우우, 꺄우~”

“어이구…….”

숙소에서 맨날 장난감으로 놀아 줘서 그런가. 팔랑거리는 햇빛 가리개가 용식이에게는 훌륭한 장난감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얇은 천을 온몸에 휘감으며 비비적대는 용식이를 피식 웃으며 내려다봤다.

“에휴, 그래. 너 갖고 놀아라.”

“꺄아우!”

크게 소리 지르며 흙바닥을 데굴거리는 용식이를 보다가 던전용 녹화 아이템을 찾았다. 그러다가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 죄송합니다. 신경 써서 주신 건데.”

“…….”

햇빛 가리개를 주었던 이건호가 용식이를 내려다보다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순간 그의 갈색 눈이 반짝 빛났다. 눈동자 색이 옅어서 그런가? 햇빛을 머금은 것 같은 밝은색의 눈을 마주 보며 눈을 깜박였다.

“괜찮아요. 가지고 놀게 두세요.”

“그래도…….”

“비싼 것도 아닌데요, 뭘. 여분 있는데 드릴까요?”

“아, 아뇨.”

고개를 저으며 흘끗 선두에 시선을 주었다. 어차피 곧 전투팀의 싸움도 끝날 것 같다. 새카맣게 몰려왔던 전갈 모습의 몬스터들과 왕도마뱀 같은 몬스터들을 끝도 없이 해치우는 전투팀을 멀리서 흘끗 바라보았다.

콰아앙!

사막 배경의 필드에서 단연 돋보이는 건 성유빈이었다. 바닷가와 심해 배경인 세(Sæ) 던전에서는 화신이라고 불리기엔 불 능력의 화력이 좀 부족해 보였는데, 여기서는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거기서도 반전 스킬로 힘은 비슷했겠지만, 눈에 보이는 임팩트와 느낌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래서인지 뒤에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히어로 영화 찍는 걸 뒤에서 직관하는 느낌이 든다. 그 모습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저 전투만 끝나면 슬슬 중립 지역에 도착할 것이다. 사막이 배경인 무스펠헤임 던전의 중립 지역은 오아시스라고 하던데. 확실히 주변에 물이 있긴 한 건지, 조금은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으아악!”

“……!”

그렇게 안도하고 있었을 때, 전투팀 한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니, 그 주변의 모래가 푹 꺼지며 커다란 구덩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샌드웜이다!”

“……샌드웜?”

누군가가 소리치는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샌드웜은 분명 보스 몬스터가 있는 지역 주변에 나타나는 상급 몬스터 아니었나? 왜 벌써…….

하지만 그건 참 멍청한 생각이었다. 등급 이상 현상으로 그렇게 뒤통수를 맞았는데 학습 능력도 부족하지. 입술을 깨물며 성유빈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성유빈 능력자!”

“윽……!”

멀리서 성유빈의 몸이 훌쩍 뛰어올랐다. 그녀의 주변에 샌드웜이 출몰했기 때문이었다. 푹 꺼지는 모래를 박차며 뛰어오른 성유빈이 화염으로 공중에 불길을 만들고 그 위로 발을 내디뎠다. 그녀가 무사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러나 아직 완전히 안도할 때가 아니었다. 푹 꺼졌던 땅에서 거대한 것이 불쑥 솟아올랐다.

“끼이- 끼이이-!!”

“으윽……!”

샌드웜이 내지르는 소리가 주변으로 확 퍼져 나갔다. 몸통만큼 큰 입에서 나온 귀를 찌르는 소리가 필드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큰일이다. 샌드웜은 소리를 질러 동료를 부르는 습성이 있었다. 저대로 놔두면 다른 샌드웜들이 순식간에 몰려올 터였다.

근데 왜 아무도 공격을 안 하지? 전투팀의 이상한 낌새에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

샌드웜이 내지른 소리가 설마 상태 이상 스킬이었나? 몇몇 S급들 말고는 전투팀의 능력자들이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성유빈 능력자!”

멀리서 성유빈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녀를 향해 샌드웜이 무시무시한 이빨을 번뜩였다.

“안 돼!”

쾅, 하고 샌드웜의 몸과 성유빈이 있는 쪽이 부딪혔다.

***

“크윽……!”

성유빈의 눈앞에서 무수히 많은 상태 창이 빗발쳤다.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화신의 가호(S)의 효과가 50% 이상 하락합니다.」

「상태 이상 ‘공황’의 영향을 받습니다.」

「불굴의 의지(S)의 효과가 약해집니다.」

「파티원들이 상태 이상 ‘공황’의 영향을 받습니다.」

「통솔자의 인도(A)가 발동하지 않습니다.」

“제길……!”

그녀의 주변으로 치솟은 불길이 눈앞을 가렸다. 하지만 전처럼 강한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전투 막바지에 등장한 상급 정예 몬스터 샌드웜 때문이었다.

만약 주변에 있는 게 다른 능력자들이 아닌, 평소에 호흡이 딱딱 맞는 발키리 대원들이였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 타 길드로 지원을 온 상황이다. 그런 즉각적인 반응은 기대할 수가 없었다.

성유빈의 동공까지 화르륵 불타올랐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결코 전투를 포기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성유빈의 낌새를 알아챈 샌드웜이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콰과광!

“큭……!”

눈앞에 치솟은 불길이 샌드웜을 간신히 막아 냈다. 까득까득, 위압적으로 빛나는 무수하게 많은 송곳니가 불의 장벽을 긁어 대기 시작했다. 성유빈은 그 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다른 능력자들은? 몸을 움직일 수 있는 S급 능력자가 한 명도 없는 건가?

시야를 가득 채운 몬스터의 모습에 눈을 부릅뜨며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이대로 가다간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능력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상태 이상의 영향인지, 언제나 온몸을 뜨겁게 만들었던 불의 능력이 점차 식어 가고 있었다.

‘제기랄…….’

이제 끝인가? 설마하니 그런 진부한 대사를 자신이 생각할 줄은 몰랐다. 성유빈의 입에 자조적인 미소가 지어졌다.

“성유빈 능력자!”

“……!”

이곳에서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성유빈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무언가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챘다.

맞잡은 손이 뜨거워졌다. 마치 죽어 가던 불씨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성유빈의 안에 내재한 불길이 순식간에 다시 뜨거워졌다.

「치명적인 오류가 해제되었습니다.」

「화신의 가호(S)가 정상 발동합니다.」

「상태 이상 ‘공황’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불굴의 의지(S)가 정상 발동합니다.」

「스킬의 모든 등급이 일시적으로 올라갑니다.」

“……!”

몇 번이나 느꼈던 익숙한 기운이었다. 달콤한 향이 코끝을 스치고, 순식간에 상태 창의 스탯 숫자가 치솟아 올랐다. 저도 모르게 잡은 손을 꽉 잡으며 힘을 주니, 곤란한 기색이 느껴졌다.

“키에에엑!”

“아.”

위협적인 분위기를 알아챈 건지, 샌드웜이 소리를 지르며 다시 스킬을 썼다. 하지만 이미 능력치가 한계까지 올라간 성유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넵! 이든, 가자!”

애써 담담하게 말하며 손을 놓자, 바람의 기운과 함께 순식간에 달콤한 향이 공중에 흩어졌다. 그 잔향을 음미하며 성유빈이 눈을 치켜떴다.

곧 그녀에게서 검붉은 화염이 솟구쳤다.

***

보조 스킬을 받은 성유빈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샌드웜을 처치했다. 다행히 빨리 해치웠기 때문에 다른 샌드웜은 나오지 않았다. 정말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힐러들이 상태 이상을 해제하고, 포션도 쏟아부은 다음에야 겨우 다시 이동할 수 있었다.

공대가 무사히 중립 지역인 오아시스에 도착하자마자 성유빈은 참았던 화를 터트렸다.

“이 개자식아! 내가 분명히 경고했지!”

“…….”

자칫하면 공대가 전멸할 수도 있었던 위기에 서하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성유빈은 그런 서하준을 노려보며 계속 소리쳤다.

“세(Sæ) 던전에서도 3구역에서나 등장할 상급 몬스터가 1구역부터 출몰했었다고! 부길마 정도 되었으면 이런 상황도 상정했어야지!”

“…….”

“그깟 보조 스킬? 그래, 그 그깟 보조 스킬에 목숨을 건진 소감은 어때. 응?”

신랄한 말에 서하준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가 억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네가 조금만 더 버텨 줬으면 내가 해결할 수 있었어.”

“하…….”

“정말이야. 상태 이상도 다 풀어 가고 있었다고.”

그 말에는 고개가 조금 갸웃거려졌다. 그렇게 변명하기에는 서하준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성유빈 역시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서하준을 노려보았다.

“그런 새끼가 중립 지역 올 때까지 정신을 못 차려?”

“…….”

서하준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