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윤은호의 말에 강유현은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야.”
“아니……. 뭐, 그냥 그런 게 아닐까 하는 거지.”
로키 길드의 잠적한 능력자들이 앞으로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혹여나 자신들을 배신하고 오딘 길드에 붙은 한이진을 원망하고 해코지하려 할 수도 있었다.
물론 오딘 길드의 철저한 보호를 받고 있는 한이진을 쉽게 건들지는 못하겠지만, 빌런들의 상상을 초월한 미친 짓이 한두 번이었어야지. 무슨 짓을 하기 전에 미리 경계하고 뿌리를 뽑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강유현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잔당의 뒤를 쫓을 줄은 몰랐다. 귀환한 후로는 모든 일에 무심하고, 등급 이상 현상도 어디까지나 의무감으로 처리하는 것 같더니.
그런데 한이진을 만나고 나서는 분위기까지 묘하게 변한 것 같았다. 윤은호는 탐색하는 시선으로 강유현을 흘끗거렸다.
“헛소리 그만하고 추적이나 계속해.”
“네에, 네. 그러죠.”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윤은호가 다시금 스킬을 썼다.
로키 길드의 S급 능력자 백시후. 강유현과 마찬가지로 암 속성을 가진 능력자였다. 그래서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달아나는데 도가 텄다. 오딘 길드가 그동안 그를 추적하는 데 어찌나 애를 먹었던가. 윤은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수현이도 데려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동안 오딘 길드에는 S급 탐지 스킬을 가진 능력자가 없었다. 하지만 강유현의 동생인 강수현이 S급 탐지 스킬을 가진 탐지계 능력자로 각성하고 나서 자신의 일이 조금은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그랬는데, 형제가 나란히 한이진에게 빠져서는. 윤은호는 속으로 혀를 찼다.
물론 등급 이상 현상 때문에 혼란한 던전을 클리어하는 거, 중요하지. 중요한데, 그걸 꼭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어린 녀석이 꼭 따라가야 하느냔 말이다.
좀 더 시간을 가지면서 훈련도 하고, 저렙 던전에서 레벨 업도 하고, 선배인 자신이 차분히 알려 주면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처음부터 하드 모드로 대형 공대부터 돌다니. 윤은호는 그게 조금 못마땅했다.
“……걔는 할 일이 있어.”
“물론 그러시겠지.”
“…….”
강유현은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던전에 들어가 있는 한이진을 지키기 위해 강수현을 데려오지 않았다. 물론 강유현이 직접적으로 말을 그렇게 한 건 아니지만, 속이 뻔히 보이는 생각이었다.
“뭐, 나도 그 생각에는 동감하니까.”
모처럼 발견한 S급 보조 스킬을 가진 귀한 능력자였다. 길드에서 특별 취급을 하는 건 백번 동감하는 일이다. 단지, 강유현을 비롯해서 강수현까지 적극적으로 감쌀 줄은 몰랐다. 형제 사이가 어색해 보이더니, 이럴 때는 어찌 그리 쿵짝이 잘 맞는지.
뭐, 불만이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말한다고 누가 들어 주는 것도 아니고. 속으로 한숨을 삼킨 윤은호가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힘껏 능력을 끌어 올렸다.
초록빛을 띠기 시작한 그의 눈이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찾아낼 듯 미세하게 움직였다. 바닥에 닿은 손에서도 초록빛의 기운이 퍼져 나와 주변을 감쌌다. 그리고 점점 범위를 넓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훑어 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질적인 흔적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이내 얼굴을 왈칵 찌푸렸다.
“이런 미친…….”
“……?”
“이거 아니야. 완전 공갈이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윤은호가 고개를 저었다. 초록색을 띠던 그의 눈이 차차 어두워졌다. 의아해하는 강유현을 돌아보며 크게 외쳤다.
“백시후 그 자식, 처음부터 여기 없었다고!”
“……!”
“제길, 왜 이제야 알아챘지?”
여기까지 와서야 공갈인 걸 알아채다니. 윤은호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백시후가 이곳까지 남긴 흔적은 모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점을 너무 늦게 알아챘다.
“대체 무슨 속셈으로…….”
주변에는 함정으로 보이는 것도 없는데, 왜 이런 곳까지 유도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윤은호가 의아해하는 반면, 강유현의 얼굴은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넌 길드로 돌아가.”
“어? 너는?”
“난 바로 대구로 간다.”
“……아!”
지금 시간이라면 무스펠헤임 던전의 공략팀이 포털 안으로 진입할 때였다. 이런 곳까지 자신의 흔적을 남겨 강유현을 유도한 이유라면 이제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난 마스터에게 보고할게.”
“그래.”
무심히 대답한 강유현의 몸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그가 곧 눈에 보이지도 않을 엄청난 속도로 땅을 박차기 시작했다.
백시후가 한이진을 노리고 있다. 강유현이 없는 틈을 타 던전 안에서 납치라도 할 속셈인가.
입술을 깨문 윤은호도 몸을 돌려 빠르게 달려갔다.
***
“우와…….”
눈을 크게 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막!
포털을 지나니 진짜 사막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우와, 우와.”
발이 푹푹 빠지는 바닥이 신기해서 자꾸만 발끝에 힘을 줬다. 발자국이 남을 정도로 밟았다가 발을 떼니, 얇은 모래 알갱이들이 사르르 흘러내렸다.
“이진아, 신기해?”
“응, 근데 덥다.”
태양에서 내리쬐는 햇빛이 장난 아니었다. 더위에 대비해 냉방 아이템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따가운 햇빛까지는 막아 주지 못하니까 말이다.
이마에서 주르륵 흐르는 땀을 닦고 있으려니, 사막을 보면서 신기하고 좋았던 기분이 점점 추락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막은 신기하고, 매우 더웠다. 그리고 아주 상당히 더웠다.
“헉, 헉…….”
“이진아, 괜찮아?”
“물…… 물 좀 줘.”
“자, 여기.”
이든이 인벤토리에서 꺼낸 물을 나에게 건넸다. 다행히 인벤토리 안에 있던 물이라 그런지 냉장고에서 막 꺼낸 것처럼 시원했다.
“하…… 좀 살겠다.”
한숨을 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공대 선두의 전투팀은 한창 전투 중이었다. 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프레이야 길드는 내 보조 스킬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에 전투계 능력자 한 명이 저렙 필드를 시원시원하게 밀고 나갈 수 있었는데, 티르 길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스펠헤임 던전은 세(Sæ) 던전과 달리 사막 필드 하나만 존재했다. 그래서 사방이 뚫려 있었고, 언제 어디서 몬스터가 덮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뒤에 있는 지원팀에도 군데군데 전투계 스킬을 가진 능력자들을 배치하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프레이야 길드처럼 내 보조 스킬을 활용한다면 그럴 필요도 없을 텐데. SS급의 던전에서 상당히 비효율적인 짓이라고 성유빈이 눈살을 찌푸리며 욕을 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디까지나 지원을 온 타 길드의 용병이고, 결정을 내리는 건 티르 길드가 하는 일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면, 우리는 알았다고 대답하며 따를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니 성유빈도 어쩔 수 없이 선두에서 곤욕을 치르는 중이었다.
“후…….”
뭐, 어쨌든 나야 손해 볼 것은 없었다. 하는 일 없이 뒤에서 놀게 해 준다는데 말이다. 이럴 거면 왜 굳이 나에게 지원 요청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더우시죠?”
“……?”
고개를 돌리니 포털을 타기 전에 말을 걸었던 능력자가 내 옆에 서 있었다. 이름이…… 이건호라고 했었나? 그를 얼떨떨한 눈으로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덥네요.”
“이거 쓰실래요?”
나에게 불쑥 내민 것을 내려다보았다. 이건호가 나에게 내민 것은 얇은 천이었다. 마치 망사처럼 얇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흰색 천. 이걸 왜 주나, 하고 쳐다보니 이건호가 씩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햇빛 가리개인데, 던전 아이템이라 부가 효과도 있습니다. 저는 괜찮으니 힘드시면 쓰세요.”
“어…….”
땀을 줄줄 흘리는 내가 안쓰러운지, 이건호가 자신이 쓸 아이템을 나에게 내어 주었다. 나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다가 물었다.
“제가 써도 되나요?”
“그럼요. 물론이죠.”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건호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고맙습니다.”
“뭘요.”
천을 받고 펼쳤다. 안이 다 비칠 정도로 얇은 천인데, 이걸 쓴다고 햇빛을 가릴 수 있는지 조금 의심스러웠다.
그래도 아이템이라고 하니까 무슨 기능이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이건호를 흘끗 쳐다봤다.
“이거 그냥 뒤집어쓰면 되는 건가요?”
“네.”
“음…….”
하늘거리는 천을 잠시 바라보다가 대충 머리에 썼다. 그러자 천이 살랑거리며 자연스럽게 내 머리에 들러붙었다. 쓰자마자 머리부터 시원해지는 느낌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괜찮죠?”
역시 아이템이라 무슨 부가 효과 처리가 되어 있는 건지, 눈앞을 가린 천이 전혀 방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야가 더 또렷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내리쬐는 뜨거운 햇빛까지 가려 주니 금상첨화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활짝 웃는 얼굴로 이건호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잘 어울리시네요.”
“아, 하하…….”
멋쩍게 웃으며 눈앞에 손을 휘저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손바닥에는 얇은 천의 감촉이 느껴졌다.
근데 나 혼자 흰 천을 뒤집어쓰고 있으면 눈에 띄지 않나?
뒤늦게 그런 생각을 했을 때였다.
“이, 이진아. 너…….”
“……?”
이든이 충격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쟤 왜 저래?
고개를 갸웃하며 이든을 쳐다보다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