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첫인상부터 어딘가 좋지 않았던 서하준은 나를 싫어하는 게 분명했다. 시종일관 나를 비꼬면서 브리핑하는 바람에 그걸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성유빈과 드잡이질을 한 후부터 나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깟 보조 스킬’이라는 말에 옆에 있던 성유빈이 이를 으득 갈았다.
“뭐, 정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
대체 뭘 믿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길마인 진상현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티르 길드의 주요 전력도 숭숭 빠져서 그 빈자리를 용병들이 메우고 있는 상황인데 말이다.
비록 서하준이 나에게만 유독 반감을 드러내긴 하지만, 다른 용병들도 불쾌한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대부분은 저번 던전에서 나와 함께 싸웠던 사람들이었으니까.
아무튼 첫 시작부터 이렇게 삐걱거리는데 공략이 잘되려나 모르겠다. 프레이야 길드는 전투부대 발키리를 중심으로 워낙 빠릿빠릿하게 잘 뭉치니까 안심이 되었는데, 티르 길드는 게이트 안에 들어가기 전부터 불안했다.
정 안 되면 강유현이랑 성유빈한테 스킬 써 주고 둘이서 다 쓸어 버리라고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근데 강유현이 너무 늦는데?”
“그러게요.”
“설마 안 기다리고 던전 들어갈 셈인가?”
“음…….”
강수현이 고민하더니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마 강유현에게 전화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 듯 강수현이 핸드폰을 내렸다.
“괜찮지 않을까요? 좀 늦게 입장해도 형이랑 페어 등록되어 있으니까 위치는 찾을 수 있을 테고.”
“그런가.”
원작에서는 강유현이 늦게 오지 않았는데. 또 묘하게 원작 흐름과 다르게 돌아가니까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원작과 달라진 부분들이 너무 많았다. 애초에 이 자리에는 한이진인 나도 없어야 하고 강수현, 이든, 성유빈도 마찬가지였다. 무스펠헤임 던전은 거의 강유현의 독무대였으니 말이다.
어쨌든 클리어하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강유현이 올 때까지만 잘 버틴다면, 이번 에피소드도 어떻게든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한이진 능력자를 지켜 드리겠습니다.”
성유빈이 제법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품에 안고 있던 용식이도 큰 소리로 울었다.
“꺄우!”
“그래, 고마워. 고마워요.”
무스펠헤임 던전은 세(Sæ) 던전과 다르게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고 넓은 사막 필드가 펼쳐져 있다. 탐지계 스킬을 가진 능력자들이 길을 잘 찾지 못하면 영영 사막 안을 헤맨다고 할 정도로 넓다고 한다.
다만, 보스 몬스터가 있는 구역만 따로 떨어져 있다고 하니 강유현이 중간에 입장해도 우리를 찾는 데 문제없을 것이다. 그 강유현이니 말이다.
티르 길드는 영 믿음이 가지 않지만 주인공들은 믿는다. 그런 생각을 하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각 팀은 순서대로 입장해 주십시오!”
곧 게이트 입장이 시작되었다. 길잡이인 강수현과 해송하는 공대의 맨 앞에, 화력의 끝판왕인 성유빈 역시 전투를 담당하는 선두 팀에 섞여 서 있었다.
나는 이번에도 지원팀에 속해서 공대 제일 끝에 섰다. 용식이와 이든, 그리고 구슬과 함께 게이트 안에 들어가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내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한이진 능력자시죠? 만나서 반갑습니다.”
씩 웃는 얼굴이 호감형인 남자였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고 있었는데, 남자치고는 꽤 긴 머리였다.
“아, 네. 안녕하세요.”
“하하, 유명인이랑 같이 던전 공략하다니 영광이네요. 저는 이건호라고 합니다.”
“그렇게 유명인은 아닌데……. 저도 반갑습니다.”
이건호가 내민 손을 얼떨결에 마주 잡았다. 그는 공중에서 두어 번 흔든 다음 내 손을 놓아줬다.
“저는 이런 대규모 공대는 처음이라 좀 떨리네요.”
“그래요? 저도 이번이 두 번째네요.”
“그럼 세(Sæ) 던전이 첫 공대였던 건가요?”
“뭐…… 그렇죠.”
그 전에 SS급으로 변한 D급 던전에 들어갔었지만, 거기는 공대가 아니었으니까. 두 번째 들어간 세(Sæ) 던전이 나에게도, 한이진에게도 첫 공대였다.
“대단하시네요. 처음인데 그렇게 큰 업적을 남기시고.”
“하하…….”
기사나 댓글이 아닌, 생판 모르는 타인에게 직접적으로 칭찬을 들으니까 좀 쑥스러웠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입을 열었다.
“송차현 마스터님이 과장하신 것도 있어요.”
“에이, 그분이 빈말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던데요.”
“그렇긴 한데…….”
송차현이 좀 과장을 하긴 했지만 아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라서 애매했다. 내 목표는 적당히 유명해지고, 적당히 거품이 빠진 다음 편하게 사는 거였는데.
하하, 난감하게 웃고만 있자 옆에 있던 이든이 안 그래도 까칠하게 보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 뭐야? 이진이한테 왜 친한 척해?”
친한 척이 아니라 사회생활을 하는 거란다. 이든아.
나는 그렇게 나무라는 대신, 팔꿈치로 이든의 허리를 찌르고 이건호를 바라보았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얘가 조증이 좀 있어서.”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뭐, 이 자식아?”
눈을 부라리는 이든을 노려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가만히 좀 안 있냐?”
“아니, 저놈이 자꾸…….”
“이 화상아, 언제 철들래? 보는 사람마다 시비야.”
“이진이는 맨날 나한테만 뭐라 그래.”
입술을 비죽 내미는 이든을 한심하단 눈으로 쳐다봤다. 내 어깨에 늘어져 머리를 축 늘어트린 용식이의 입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든을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튼 전 한이진 능력자가 부럽습니다. 저에게도 특출 난 스킬이 하나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이건호의 한탄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킬과 등급은 능력자들의 전부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공대에서도 높은 등급의 스킬을 가진 능력자들을 우대할 테니까 말이다.
“이건호 능력자도 여기 올 정도면 엄청난 실력자 아닌가요?”
“하하, 저요?”
내 물음에 이건호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한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사실 저는 무소속인데다, 올라운더라서 특별히 높은 등급의 스킬이 없어서요.”
“올라운더셨군요.”
“네, 저는 탐지계 스킬 제외하고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어요.”
“그거 대단한 거 아닌가요?”
“대단하긴요. 등급이 죄다 B급인데요.”
“아…….”
올라운더란, 공대가 구분하기 편하게 나눈 XX계 스킬 중 3개 이상을 가진 능력자들을 말했다. 그렇다면 이건호는 전투계, 보조계, 정신계 스킬들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대단한걸. 하지만 본인 입으로 말했듯이 모두 B급이면 좀 애매하긴 하다. 하나라도 A급이면 본인의 등급도 더 올라갈 텐데.
“그래서 저는 거의 땜빵용이에요. 아마 앞에서 전투계 능력자 하나가 나가리 되거나, 실드 칠 능력자가 한 명 더 필요하면 바로 불려 나갈걸요.”
자조적인 미소를 지은 이건호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올라운더라면 효율이 높아서 부르는 데가 많았을 텐데 무소속이라니.
“앞으로 좋은 기회 있을 겁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별거 아닌 위로에 이건호는 활짝 웃었다.
곧 우리 차례가 다가왔다. 새파랗게 일렁이는 게이트를 바라보다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
“위치가 여기에서 끊겼어.”
땅을 짚은 채 윤은호가 중얼거렸다. A급 탐지계 스킬을 가진 그가 이 정도로 애먹는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계약서를 조작했다는 건가.”
“설마…….”
손을 거두고 일어난 윤은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옆에 선 강유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비밀리에 로키 길드의 능력자들을 뒤쫓고 있었다. 장태산이 구속되고 로키 길드의 비리가 세상에 낱낱이 드러난 다음 라우페이 길드가 한 짓은 바로 꼬리 자르기였다.
라이수는 뻔뻔하게도 수족처럼 부리던 로키 길드를 외면하고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를 믿었던 장태산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장태산이 구속되고 난 후, 로키 길드에 속했던 능력자들도 대부분 협회에 의해 추적당해 잡혔다. 하지만 아직도 몇몇 능력자들은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특히 그중 가장 등급이 높았던 백시후. 그의 행적은 철저히 가려져 있었다.
처음에는 협회에서 독자적으로 로키 길드의 능력자들을 추적했다. 무슨 일인지 장태산이 따로 보관해 놨던 고등급 능력자들의 계약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바람에 계약서를 해제해 역추적하는 방법은 하지 못하게 되었다.
대신 계약서 사본을 발견해 추적하고 있었다. 협회에서 인력 부족을 이유로 오딘 길드에게 협력 요청을 한 게 얼마 전이었다.
윤은호는 자신의 옆에 선 강유현을 흘끗 쳐다봤다. 5년 만에 다시 만난 친구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성격도, 분위기도, 행동도 말이다.
하지만 초조한 기분을 느낄 때 입술을 깨무는 버릇은 여전했다. 윤은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네가 이 일에 그렇게 열을 올릴지 몰랐는데.”
“…….”
“혹시…… 한이진 능력자 때문이냐?”